# 63
그의 휴대폰에는 센추리 공식 홈페이지가 켜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민이라는 사람의 게시물인 것 같았다.
호영은 원재의 휴대폰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예의 신분이 되었을 줄이야.
“아, 그리고 팀장님,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어떤 거?”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현리에 유저들이 제법 늘어났잖아요. 아직 제가 제대로 된 정보 조직을 구축하지 못해서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홈페이지를 보니 확실히 늘어난 것 같더라고요.”
“뭐, 많이 늘어나긴 했지. 마법사가 등장해서 더 많아진 것 같던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제가 하려는 이야기도 그겁니다. 마법사. 유저 중에 마법사가 있는 것 같아요.”
“유저가 벌써 마법사라고?”
“이 게시물 좀 보실래요?”
원재는 다시 한 번 휴대폰을 들이밀었는데 그곳에는 민의 게시물보다 훨씬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 마법사 됨 ㅎㅎㅎㅎㅎ
어쩌다가 니들이 말했던 현리에서 시작하게 되었거든? 근데 뜬금없이 마법사의 일족에서 태어나더라? 진짜 개이득 ㅋㅋㅋ
뭐, 스킬 보니까 대단한 것은 없는데, 마나는 있더라 ㄷㄷ. 센추리에 마나가 있을 줄이야. 니들은 알고 있었냐?
마법은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쓸 줄을 모르거든 ㅅㅂ.
이게 말이 되냐? 스킬은 있는데 쓸 수가 없다니! 그래서 마법 써야 할 일 있으면 로그아웃한다. 아바타는 쓸 수 있으니까 ㅠㅠ.
(중략)
아무튼 마법 빼고 다 좋은데 거의 막내급이라서 NPC들한테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X 같다. 추장도 존나 오만하고 까칠해. NPC 주제에 ㅅㅂ.
(중략)
근데 현리에도 유저 꽤 있지 않냐? 있다면 나랑 함 만나자. X 같은 NPC들 상대하는 것보다 같은 유저 상대하는 게 낫잖아.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그 게시물을 보는 순간 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저가 마법사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호영이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원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팀장님, 유저도 마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마족은 될 수 없지. 하지만 마법사는 될 수 있어. 현리의 마법사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혼혈이니까.”
“그러면 이거 쓴 사람이 구라 까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아마 진짜일 거다. 내성의 이야기가 너무 사실적이야.”
“와, 그럼 사기 아닙니까? 현리 부족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전혀 상관없는 놈만 이득을 보다니. 완전 어부지리 아닙니까?”
“센추리는 원래 불공평한 게임이야. 유저들에 대한 배려도 없지.”
그로서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자기가 노력한 결과로 얻어야 할 과실을 제3의 인물이 가져간 셈이니까.
하지만 호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다른 유저가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3회 차부터는 오직 호영과 호영을 따르는 이들만이 과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원재야.”
“예?”
“이 사람과 한번 접촉해 봐라.”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으나 원재는 자연스럽게 대꾸하였다.
“현실에서 접촉합니까, 아니면 센추리에서 접촉합니까?”
“센추리에서 만나. 그리고 어떻게든 정보원으로 꼬셔. 내가 정보비는 두둑하게 줄 테니까, 돈 아까워하지 말고 써.”
“정보비요? 이 사람에게 정보를 사라는 말씀이십니까?”
“무려 마법사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이야. 당연히 돈으로 사야지, 물론 현실 돈 말고 센추리 코인으로.”
“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배신웅이라는 자를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 보겠습니다.”
“그래.”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배신웅이라는 자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팀장님? 제가 듣기로 팀장님 아바타의 평판이 좋지 못하던데……. 그 아바타로 추장이 될 수 있을까요?”
원재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사실 뒤늦은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대왕이라는 아바타의 평판을 알아낸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호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호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호영이라면 대왕 같은 아바타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호영에게서 ‘마법사들의 견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원재조차도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거의 현리 전체가 적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아무리 호영이 대단하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에서 추장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지. 학살자가 되어 일족이건 마법사건 전부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원재의 말처럼 현재 대왕의 평판은 최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반마족 혈맹에게서는 ‘마법사들의 개’라는 인식을 받고 있으며, 마법사들에게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회색분자’라는 인식을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마법사들이 ‘평민’이라 부르는 부족민들 사이에서도 그리 입지가 좋지 못하였다. 대왕이 워낙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영은 이같은 상황에서 어찌 해야 될지 상당한 고민을 하였었다.
전체적으로 1회 차보다 열악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
힘이 있더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저들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왕을 연기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어찌 되었건 호영에게는 무력이 있었고, 원재와 호위대 그리고 새롭게 그의 세력이 된 봉씨 일족이 있었다. 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추장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네가 이것을 해 준다면 한 가지 방법이 생겨날 거다.”
호영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이미 지시한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또다시 새로운 지시를 내리니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호영을 보좌할 수 있는 유저는 원재가 유일하였다. 호영으로선 원재를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뭘 주저하십니까? 무엇이든 맡겨 주십시오.”
“고맙다.”
원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호영은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나갔다. 물론 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원재가 해야 할 일도 설명해 주었다.
“오오, 그런 계획을 세우셨을 줄이야! 정말 대단합니다. 팀장님!”
“괜찮은 거 같아?”
“당연하죠! 충분합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팀장님은 진정한 현리의 영웅이 되실 것입니다!”
크게 흥분한 원재는 그렇게 외치며 한참 동안 호영의 계획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칭찬이 끝나자 원재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계획대로만 진행하세요. 그럼 제가 팀장님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겠습니다.”
“음, 그래.”
“그런데 첫 번째, 아니 첫 번째는 이미 한 셈인가? 왜 그 사람을 암살하셨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아무튼 두 번째로 암살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역시 악명이 높은 인물이겠죠?”
암살! 이것이 원재에게 설명했던 호영의 계획이었다. 암살이라는 과격한 수단을 이용해 자신과 적대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을 제거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계획하는 것은 민심을 얻는 것. 그렇기에 호영이 제거해야 할 대상은 ‘공공의 적’이어야만 하였다.
“마법사로 해야겠지. 악명 높은 마법사를 죽이는 것만큼 민심을 얻는 일은 또 없으니까. 그래서 배신웅이라는 자의 조력이 필요한 거야.”
“알겠습니다! 배신웅도 얻고, 일족들의 여론도 완전히 휘어잡겠습니다. 이제 팀장님은 현리의 영웅이 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 나는 너만 믿겠다.”
자신만 믿는다는 호영의 말에 원재는 격앙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오글거릴 수도 있는 말인데 원재는 그저 기쁘기만 한 모양이었다.
‘참 요즘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이지. 군인 출신이라고 저런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원재가 있어서 다행이야.’
준기도 없는 상황에서 원재까지 없었다면? 2회 차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호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원재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서 쉬어. 나는 준기의 여동생과 통화할 테니까.”
“예. 통화 끝나면 이따가 결과 좀 알려 주십시오.”
“알았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호영은 원재와 헤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홍지영에게 통화를 걸었다.
‘이 여자도 센추리 폐인인데 지금 전화받을 수 있으려나?’
순간 그같은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홍지영 씨?”
“오빠 때문에 전화하셨나요?”
“예. 준기는 괜찮나요?”
“글쎄요. 지금 시간 되세요? 만나서 이야기해야 될 것 같은데요.”
“됩니다. 어디로 갈까요?”
“5번 출구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요. 역 주변에서 사시는 거 맞죠?”
“맞습니다. 한 20분 뒤에 카페에서 만나는 걸로 하죠.”
20분 뒤. 호영은 역 근처의 카페에서 홍준기의 여동생 홍지영을 마주하였다. 둘은 간단하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준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금 거의 폐인이 되었거든요? 그나마 밥은 꼬박 챙겨 먹고 있기는 한데, 운동도, 센추리도 안 하고 그냥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센추리는 아예 안 하는 겁니까?”
“그렇다니까요. 저였으면 그냥 초보자의 섬에서 놀 텐데, 센추리 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지영의 말에 호영은 얼굴을 굳혔다.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라고 해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준기와는 센추리에서 친해진 사이였다. 그렇다 보니 호영은 준기의 과거가 어떤지,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물론 현실에서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센추리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였다.
한마디로 준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마음의 상처를 풀어 줄 방법도 없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이라도 변화가 보일 시에 연락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럴게요. 근데, 저희 오빠 정확히 왜 저러는 거예요? 벌써 일주일째 저러는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네요.”
“준기가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그냥 짐작만 하고 있죠.”
호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하였다.
“후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예? 아, 센추리 상의 후손요. 그 정도면 충격 받을 만하네요. 오빠는 센추리를 거의 현실처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죽었대요?”
“본보기로 처형당했습니다. 준기네 가문이 마법사들에게 반기를 들었거든요.”
“헐. 겨우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였다는 건가요?”
“마법사들의 신분이 중세 귀족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본 게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뭐, 그렇다고 제가 마법사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로선 본 게임을 하는 이유가 의문으로 느껴졌을 터. 하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정말 바보 같네요, 우리 오빠도. 그런 일이 생겼다면 복수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끙끙 앓고만 있다니.”
“복수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우리 오빠, 때려서라도 센추리에 접속하게 만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