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다가가서 자신을 받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부족을 얻지 못했다면 최소한 일족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족장이 된다면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다.”
그렇게 중얼거린 현기는 굳게 다짐하였다.
저 대왕이라는 자에게 배웠던 것처럼 더욱 빠르고 더욱 과감하게 움직여 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겠노라고.
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혼자 해 보겠노라고 말이다.
‘물론 우영이라는 자에게 협조를 얻기는 해야겠지. 그자가 앞으로 감찰을 담당할 것 같으니.’
현기는 눈빛을 빛내며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복수라…….”
준기는 지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상씨 일족의 몰락. 비록 게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준기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얼마 동안은 센추리를 생각하는 것조차 두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두려움은 여전하였다. 센추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허탈함과 공허함이 해일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영의 이야기를 들으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가문이 왜 몰락하였는가?
바로 마법사 때문에 몰락하지 않았던가!
지영의 말처럼 복수도 하지 않고 혼자만 끙끙 앓는 것이 왠지 모르게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후손들의 복수 정도는 제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미친개가 되어야겠어.’
미친개. 이것은 고등학교 시절 그의 별명이었다. 물론 그가 원해서 얻은 별명은 아니었다.
지독하리만치 당하고 또 당하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불의에 맞서 싸웠더니 어느샌가 그에게 주어진 별명이었다.
당연히 그로선 마음에 들지 않은 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별명이 필요하였다.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미친개가 되어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웅…….
결국 준기는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힘겨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결정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나 되건 접속 자체는 순식간이었다.
게임에 접속한 지 불과 1분도 안 되어 새로운 육체로 눈을 뜬 준기. 그는 몇 주라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초씨 일족?’
당연하겠지만 준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었다. 물론 2회 차가 처음 시작했을 때 이미 정보를 습득하기는 하였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이 상씨 일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현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렇기에 준기는 자신의 아바타가 ‘초씨 일족’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었다. 준기는 초씨 일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쁘지 않네. 왜 초씨 일족이 현리가 아닌 전혀 다른 부족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추장은 추장이니까.’
복수를 하려면 당연히 권력이 높은 쪽이 좋았다.
더군다나 능력치를 보니 무공을 익히기에도 나쁘지 않은 수준.
‘아바타’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준기로선 상씨 일족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힘을 키우자.”
당장에 현리로 달려가 마법사들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미친개라 불리던 준기지만 그는 결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미친개라 불리던 그때도 사실은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았었다.
물론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이성을 잃고 분노를 폭발시킨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의 그에게는 힘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준기가 생각하는 힘은 ‘무공’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신은 무공을 사용하리라.
그렇게 마음의 결심을 한 준기는 열흘 동안 쉬지 않고 수련을 하였다.
종종 아바타의 측근들이 그에게 다가와 우려를 표하였지만 준기는 모두 무시하였다.
호영과의 접촉도 삼갔다.
그와 연락하고 싶고 도움도 받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1회 차에 입었던 은혜도 갚지 못하였는데 또다시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힘을 키운 뒤에 이번에는 자신이 호영을 도와주리라. 호영과 함께 힘을 모아 마법사를 응징할 것이었다.
“뭐? 마법사들을 모두 죽였다고? 정말 호영 형님이 마법사들을 무찌르고 추장이 되었대?”
“그렇다는데? 근데 오빠는 왜 그것도 몰라? 센추리 하고 있잖아?”
“…….”
하지만 준기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으니, 바로 호영이 혼자 힘으로 마법사들을 물리친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다, 원재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니. 그러나 준기의 입장에서는 호영 혼자서 마법사들을 응징한 것과 다름없었다.
‘형님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구나. 솔직히 내가 도와줘야만 마법사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준기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외부에서 지원해 줘야만 마법사 세력을 타파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였다.
스스로를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지영에게 들은 현리의 사정이 그 정도로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무공을 키우며 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호영에게는 외부의 지원 따위는 필요도 없었나 보다, 이토록 빠르게 마법사를 정리하다니.
‘내가 했던 것은 의미가 없었군.’
준기는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의 노력이 의미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마법사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하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관성적으로 센추리에 접속한 순간, 자신의 노력이 아주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사라고?”
“그, 그렇습니다.”
마법사라는 존재는 현리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준기의 아바타가 살아가는 이곳에도 마법사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마법사가 튀어나오는 것이냐? 그들은 왜 우리를 공격한 것이고?”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족의 전사가 그들에게 공격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군. 하긴, 공격당한 상황에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지.”
왜 현리에 있어야 할 마법사들이 주변에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복수해야 할 마법사들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현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어.’
* * *
“이제 한 부족만 남았군.”
“마법사들을 보냈으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마법사를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하였는데.”
가죽으로 된, 원시인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가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피부는 까맣게 그을렸고 복장도 원시인 복장인데 이상하게 오만한 미소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의 옆에는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장신의 사내가 정자세로 서 있었다. 마치 사내를 호종하는 것만 같았다.
“근데 마법사들은 어때? 제법 머리 쓰는 족속들이잖아. 의심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새까만 피부의 사내, 최진수의 물음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던 프로 게이머 출신의 마재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고항 형님이 자신하였으니 마법사들은 따로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고항이 있었지. 그놈 역시 너만큼은 머리 쓰는 것 같으니 마법사들 정도는 알아서 관리하겠네.”
자신보다 여덟 살이 많은 고항에게 그놈이라고 부르는 최진수.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시는 것 같군.’
최진수의 말투는 현실에서보다 오만해져 있었다. 본래도 오만한 말투였지만 센추리에서 그의 말투는 마치 귀족이 평민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곳은 센추리니까.’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상. 그중에 최진수는 부족의 최고 권력자였다. 당연히 유저들도 그런 최진수에게 현실에서보다 공경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최진수의 말투도 오만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재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최진수에게 새로운 소식에 대해 알려 주었다.
“현리 부족에 대한 소식, 들으셨습니까?”
“거기도 유저가 추장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이름이 대왕이라더군요.”
“대왕? 기분 나쁠 정도로 오만한 이름이군.”
“하지만 현재 한국 유저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대왕이라고 불릴 만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자의 현리 부족은 인구가 1만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최진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최진수로선 현리 부족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보다 유명하다는 것도 그렇고, 부족의 힘이 강하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지금 공략하고 있는 부족을 정리하고 나면 현리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했지?”
“임재황의 말대로라면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대략 영등포에 해당하는 지역이라면 현리라는 부족은 강서 쪽에 있다고 추정되니 말입니다.”
최진수. 그는 제법 체계적으로 센추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여러 장르의 프로 게이머를 고용한 만큼 철저하게 분업하여 전략, 모략, 내정 등 다방면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프로 게이머의 경우는 튜토리얼만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즉, 튜토리얼에 나오는 상대들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지 어디를 공격하면 되는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재광이 말한 임재황이라는 사내 같은 경우는 ‘전술’을 담당하였다. 앞으로 부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임재황이 주도적으로 나설 것이리라.
참고로 마재광 같은 경우는 최진수를 대신해서 프로 게이머들을 조율하고 지시를 내리며 최진수에게는 보고와 정보들을 전달해 주는 일종의 비서 역할이었다.
“아직 현리 부족과 싸우는 것은 무리겠지?”
“유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 같습니다. 군사력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만약 유저들이 마법을 쓰게 된다면?”
프로 게이머들을 이용해 다방면을 공략하고 있는 만큼, ‘스킬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유저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현재 스킬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유저가 주로 연구하는 것이 바로 마법이었다.
“마법은 아직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마법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마나라는 것을 어떻게 얻고 어떻게 느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법 연구에 대한 성과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재광이 말한 것처럼 마법의 필수 조건인 마나라는 것이 너무 난해하였기 때문이다.
“마법사 유저가 있는데도 마법을 쓸 줄 모르다니.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그러고도 잘나가던 프로 게이머 출신 맞아?”
“죄송합니다.”
마재광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였다. 어쨌든 최진수의 앞에 있는 것은 그였고 마재광 역시 프로 게이머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사과하지 말고 결과를 보이란 말이야. 결과를.”
“…….”
“짜증 나네. 진짜 무술가나 무당, 뭐 이런 자들을 데려와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쪽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역시 마법사들한테 배우는 방법밖에 없나?”
인상을 찡그린 채 그렇게 중얼거리는 최진수. 그로서도 마나라는 것 때문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그 역시 마법이라는 것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