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이씨 일족
혁명으로 인한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무식하게 생긴 외향과는 달리 대왕은 아주 유능한 지도자였다.
군부를 가장 먼저 장악하고서는 그 뒤로 민심을 휘어잡고 행정 체계를 바로잡은 대왕. 마치 십 수 년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거침없는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그에 따라 현리 부족의 치안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부족민들 역시 긍정적인 분위기로 생업에 몰두하였다.
“우리의 힘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혁명의 의미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몇몇 일족을 제외하고는 마법사들이 다스리던 때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그들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마법사가 대왕으로 바뀐 격이 될 것입니다.”
지배자로 군림하던 마법사들이 사라짐에 따라 부족 전체가 활력을 되찾았다. 어디를 가든 웃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같은 결과에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현리 제일의 명문이라 불리는 일곱 개의 일족. 그중 우씨 일족과 사씨 일족을 제외한 다섯 개의 일족이 대왕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불만을 품은 이유는 단순했다.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
즉, 혁명을 일으켰음에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불만을 표출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족장들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범한 외모의 중년 사내. 하지만 사내에게서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현리에서 대현자라 불리며 전설로 비유되는 이사의 증손자 이일. 현 이씨 일족의 족장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대왕과 대왕을 따르는 세 일족, 아니 두 일족을 압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추장을 어떤 방식으로 압박한다는 것입니까?”
강씨 일족의 족장이 대씨 일족의 대적이라는 자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하니 이일이 웃음기를 지우며 되물었다.
“으음, 일단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두 일족 말고 우리들도 기용해 달라는 식으로?”
“그것은 이미 여러 번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추장은 들어주지 않았죠. 능력이 부족하고 마법사들에게 결탁했다는 핑계로 말입니다.”
“하나 대왕이라고 언제까지 우리들의 요구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현리를 어찌 다스리겠습니까?”
“추장은 이미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망루가 새로 지워지고 치안이나 행정이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 느껴지는 게 없으십니까? 추장은 우리의 조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실을 일깨우는 이일의 말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현리의 명문 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없다면 현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자부심! 그런 자부심이 이일의 한마디에 무참하게 깨졌다. 당연히 그들로선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때 조용하게 토론을 지켜보던 대적이 ‘흠흠!’ 하고 헛기침 소리를 내며 말문을 열었다.
“현자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대왕이 무슨 짓을 하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그렇게 온건한 방법으론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건한 방법이라니! 설마 현자께서는……?”
“그렇습니다. 추장, 아니 대왕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마법사가 소유하던 수천의 노예도 혼자 독점하였고, 농토 역시 우리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간부 자리도 두 일족과 대씨 일족의 일부가 독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도 대왕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란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왕의 무력을 보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강해 봤자 개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법사도 무척이나 강해 보였지만 막상 혁명을 일으키니 별거 아니었지 않습니까? 대왕의 무력도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렇게 강했다면 진즉에 혼자서 마법사를 몰살시켰을 것입니다.”
“…….”
“이백. 딱 이백 명의 노예만 모으면 됩니다. 치안대나 경비대가 움직이기 전에 호위대가 지키는 내성을 단숨에 함락시키면 추장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한번 성공시킨 적이 있지 않습니까?”
꿀꺽.
긴장한 것인지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기야 반란 이야기를 하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그렇지만 그들의 긴장감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반란을 주장하고 나선 이는 현자라 불릴 정도로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이일이 이 정도로 주장하고 나섰다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할 터.
대적을 시작으로 야망을 가진 몇몇 사내들의 얼굴에서 ‘희열’이 차올랐다. 표정만 보면 벌써 반란에 성공하여 부족의 지도자가 된 것 같았다.
‘자신감 넘치기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유저이면서 동시에 이일의 조카이기도 한 이현기.
나름 기대감을 갖고 회의에 참석하였던 그는 이일의 주장에 피식 조소를 지었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설에서도 이런 캐릭터들이 꼭 한둘씩 나오지. 주인공을 위기 상황으로 만들어 소설에 긴장감을 부여하다가 결국엔 주인공한테 파멸을 맞이하는 악당 캐릭터. 뭐, 이번 경우에는 별로 긴장감을 줄 수 없겠는데.’
그가 본 소설에서는 이일 같은 인물이 자주 등장하였다. 고귀한 혈통에 머리 좋고 야심까지 갖춘 캐릭터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대적했을 때의 결과는 단 한 가지였다.
파멸!
그리고 지금, 이현기는 이일의 파멸을 예언하였다.
사실 예언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할 것도 없었다. 혁명 때 보여 주었던 대왕의 무력은 인간의 것을 확연하게 넘어섰다.
4미터 높이의 성벽을 단 한 번의 점프로 뛰어넘고서 단숨에 수십 명을 베어 결국엔 전투를 종결지은 대왕.
군사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노예들이 대왕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족장들이 헛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뒤, 이현기는 다섯 개의 일족들 중에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십 수 명의 사내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20대 나이로, 하나같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었다.
“설마 반란을 주장했다는 거야?”
“맞아. 오늘 모임에서 이일이 그러더라. 노예 이백만 모아도 추장을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현기가 아닌, 이일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이일, 그자는 정말 바보 같군. 어떻게 대왕님한테 대항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혁명 때 대왕님의 힘을 보지 못했나?”
“못 봤겠지. 늙은이들은 죄다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잖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족의 어른들을 향해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급격히 변해 가고 있었다.
혁명에 참여하였던 청년들은 더 이상 일족의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새로 존경하게 된, 아니 추종하게 된 존재는 부족의 최고 지도자인 대왕이라는 사내였다.
터무니없는 무력에 아주 강한 지도력까지 갖춘 대왕. 혈기 넘치는 그들로선 대왕을 추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이현기였다. 그는 조직을 만들어 청년들이 조직적으로 대왕을 추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일을 비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이일의 행동을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희들도 알고 있지?”
그는 그렇게 첫 마디를 떼고는 이일의 반란을 저지해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오늘 회의를 보니까 내일이나 이틀 뒤에 반란을 시작할 것 같아. 노예들만 동원할 것이니 굳이 오래 끌 필요는 없거든. 그리고 너희들도 알다시피 반란이 시작되면 우리 다섯 일족은 모두 끝이야.”
“그렇게 빨리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했잖아, 노예들만 동원하면 되니 오래 끌 필요가 없을 거라고. 내일 족장들끼리 다시 모이기로 약속했는데 그때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올 거야.”
청년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하였다. 설마 반란이 이틀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
이미 대왕의 무력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이번 반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그들의 일족은 모두 몰락하게 될 것이었다. 한마디로 반란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미친. 막지 않으면 우리 다 죽는 거잖아?”
“죽는 것뿐이겠어! 일족 전체가 사라질 거야. 이일 그 미친놈 때문에 우리 일족이 사라지게 될 거라고!”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청년들. 그런 청년들을 보며 현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현기로서는 마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책사나 모사가 된 기분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어? 네가 이일의 조카라 해도 이일은 너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텐데?”
“이일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렇기에 우리는 추장을 설득해야 해.”
“……설마?”
“그래. 나는 추장에게 밀고할 거야, 이일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자신의 족장을 밀고하겠다는 그 말에 청년들은 크게 놀랐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족장이 일족의 최고 어른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연하겠지만 일족의 최고 어른을 고발하는 것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내부 고발자의 최후는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한데…… 그렇게 했다간 너는 일족에게서나 부족에게서나 비난받게 될 거야. 어쩌면…… 배신자라는 오명을 받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밀고하려고?”
“일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발언에 청년들은 크게 감격한 얼굴을 하였다. 아무리 일족을 위해서라지만 희생은 희생이었다. 그러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족이나 부족이 나를 꺼려도 추장만큼은 결코 나를 꺼리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대왕과 같은 유저거든.’
청년들의 뜨거운 눈빛을 보며 현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희생? 언젠가 영웅적인 희생을 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꿈을 위해 과감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일 뿐이었다.
* * *
“유저들은 어느 정도 파악되었지?”
“서른 명 정도가 유저로 추측되는데, 이 중에 열다섯 명은 확실한 유저입니다.”
추장 집무실에는 여느 때처럼 호영과 원재가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던 독대였다.
오늘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센추리 홈페이지에서는 현리에 대한 이야기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유저가 현리의 추장이 되었다는 소식 이후로 생겨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