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현리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증대되면서 현리 유저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는데, 호영과 원재로선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저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인재라고 볼 수 있는 일.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유저들을 등용해야겠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으니까.’
호영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파악된 유저만 열다섯이라……. 어쩌면 쉰 명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네.”
“저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유저는 있는 것 같나? 행정이나 농업 같은 것을 담당할 유저들 말이야.”
“저번 주에 말씀드렸던 재현이라는 유저와 경찰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조진웅이라는 유저 외에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둘 다 정보나 감찰에 관련된 유저들이군. 그쪽은 1회 차 때 이미 한 명 있었던 걸로 아는데. 이름이 민이었던가? 아, 맞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했었지?”
“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추적하여 조사했는데 현재 강씨 일족에서 노예 신분으로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자신의 수하였던 이가 지금은 노예 신분으로 있다는 원재의 말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책임감이나 자책감 따위를 느낀 것이 아니라 ‘아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유저는 한 명 한 명이 인재라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전투력이나 현실 감각 같은 것은 AI들에게 뒤질지 몰라도 유저들은 저마다 고등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자들이었다.
글이라는 것을 알고 숫자라는 것도 아는 인재들은 통치자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노예제를 결국엔 없애긴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단 말이야. 유저들도 은근히 노예제를 원하고 있고.’
튜토리얼을 깨면서까지 본 게임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초성을 가졌다는 의미. 폭력을 저지르고 아녀자를 겁탈하며 타인을 노예로 부리고 싶어 하는 유저들은 굉장히 많았다.
원재가 보고하는 인원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성향을 가진 유저들이 적지 않았다. 수십 명의 유저를 조사했으면서도 괜히 인재가 없다고 보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강씨 일족이라면 어차피 한 번쯤 눌러 줄 필요가 있는 일족이네. 민이라는 유저를 풀어 주도록 해. 강씨 일족의 반발은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일족들 중에서는 유저로 보이는 이가 없나? 아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말이야.”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일족들 중에서는 유저로 추측되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별로 없다는 것은 아예 없지는 않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올해 급격하게 바뀐 모습을 보이는 다섯 명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씨 일족의 이현기라는 자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원재의 대답에 호영은 탄성을 내지르며 중얼거렸다.
“이현기라……. 하필 이씨 일족이로군.”
똑똑!
그때였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 밖을 지키는 호위병이 보고하였다.
“이씨 일족의 일원이신 이현기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순간 호영와 원재의 눈이 마주쳤다. 원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반면 호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예사롭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군요. 무슨 목적일까요?”
“글쎄, 하지만 굳이 만남을 피할 필요는 없지. 네가 말했던 대로 그자가 유저라면 더욱더 그래.”
원재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 해라.”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초중반 정도의 외모를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현기라는 사내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씨 일족의 이현기라고 합니다.”
그는 공손하지만 제법 당당한 기색으로 호영과 원재에게 인사하였다. 성격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자신감은 꽤나 대단한 사내 같았다.
호영은 그런 이현기의 인사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로 오셨나?”
“……하하, 유저 맞으시죠?”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일까? 현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호영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는 ‘유저가 맞으시죠?’라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이고는 재차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무슨 일로 왔지?”
“……궁금했습니다, 어떤 분이신지. 혁명을 일으키셨을 때부터 흥미를 가졌었거든요.”
“그뿐인가?”
“음, 같은 유저끼리 초면부터 반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여기 관계가 있다고 해도 말이죠, 하하.”
웃으며 말했지만 말투를 바꾸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호영의 말투가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나 호영은 말투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의 그는 호영이 아니라 센추리의 대왕이었다. 대왕으로서 일개 부족민에게 반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서로가 유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변함없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곳은 센추리다. 이런 말투 쓰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 여기서 나는 추장이고 너는 이씨 일족의 일원이니까.”
“뭐, 그렇다면 저를 유저보다는 이씨 일족의 일원으로 생각한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그렇다.”
호영의 대답에 현기의 표정이 처음 인사했을 때처럼 온화하게 바뀌었다. 그 역시 센추리를 진심으로 즐기려는 사람답게 비슷한 입장의 호영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표정을 고친 현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호영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우리가 서로에게 무언가 부탁할 만한 사이는 아닐 텐데?”
유저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부탁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같은 반응에도 현기는 망설임 없이 말문을 열었다.
“추장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들어 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닐 터.
호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기는 곧장 자신의 부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다섯 개의 일족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빠르면 내일, 늦어도 사흘 안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반란을 주도하는 사람은 이일, 즉 이씨 일족의 족장입니다.”
호영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원재를 바라보았다. 원재는 호영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였다.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호영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와중에도 현기는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노예만 200 이상이 참여할 것이라는 둥, 대씨 일족의 누구도 반란에 동의했다는 둥. 의심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왜? 왜 일족을 배신하는 것이지?’
의심할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왜?’였다.
그리고 호영은 이같은 의심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현기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호영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이같은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냐?”
“어차피 반란이 실패할 것은 분명하니까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일체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호영의 의심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나름 가능성이 있는 일일 텐데? 무엇보다 일족을 배신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예, 분명 있었습니다. 족장을 설득하거나 아예 부족에서 도망치거나. 뭐, 어떻게든 반란을 성공시키는 방법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래서야 제가 얻는 게 없지 않습니까?”
“얻는 게 없다? 그렇다면 족장을 밀고해서 너는 무엇을 얻으려는 거지?”
“족장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같은 대답에 호영은 탄성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정확히는 회귀 전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이씨 가문을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이자일지도 모르겠구나.’
문사 가문으로는 한반도 제일이라고까지 불렸던 이씨 가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같은 가문에 유저가 없을 리는 없었다.
1회 차의 대현자 이사 같은 경우는 명백한 AI였지만 2회 차가 된 지금은 유저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 회귀 전, 이씨 가문이 이름을 처음 떨치게 된 시점도 2회 차 무렵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의 생각이 맞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현기라는 사내는 책사로서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재능을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호영으로선 결코 놓칠 수 없는 인재.
그는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로 이현기를 상대하였다.
“내게 부탁할 것은 무엇인가?”
“피해를 최소한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족의 어른들은 잡아가도 청년들은 잡아가지 말아 주십시오.”
“어른들만 잡아가면 일족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예, 그들만 없다면 제가 족장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다른 일족도 아니고 무려 이씨 일족의 족장이 되는 것을 저리도 쉽게 말하다니.
하지만 결코 만용이나 허세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라면 족장이 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느껴졌다. 오늘 처음 본 사내인데도 말이다.
“알았다. 뭐, 그 정도는 들어주지. 하지만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이냐?”
“……솔직히 제가 밀고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줬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부탁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족하다. 네가 밀고한 것? 그게 나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는 것이지? 그들이 반란을 하든 하지 않든, 나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병사 몇 명이 죽을지 몰라도 나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개의 일족을 완전히 몰락시킬 수 있었겠지. 굳이 누구를 살릴 필요도 없이.”
억지였다. 하지만 강자의 억지는 언제나 진실로 강요받는다. 지금 두 사람 사이의 힘의 우위는 명백하였다.
막말로 호영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현기를 죽이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기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싶으신지요?”
“너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호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네가 족장이 된 이후에 말하겠다. 물론 네가 족장이 되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 되겠지만 말이야.”
아직 현기의 능력은 100퍼센트 파악되지 않았다. 이씨 일족을 어떻게 장악하는지를 보고 그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을 터.
호영은 그때가 되기 전까지 이현기에 대한 판단을 미루어 두기로 하였다.
“제가 거래를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반대인 것 같은데? 그건 내가 해야 할 걱정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할 걱정이야.”
그 말에 현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아마 얼굴만큼이나 자존심도 크게 굳어졌을 터.
하지만 현기는 이내 목소리에 힘을 주고선 말했다.
“……꼭 족장이 돼서 돌아오겠습니다.”
현기는 그렇게 애써 의연한 얼굴을 한 채 집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