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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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갑자기 자신의 족장을 찌른다기에 뭐 하는 녀석인가 했더니, 이것참…….”
원재의 말에 호영은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씨 일족이 포함된 다섯 일족에 대한 숙청이 끝난 지 불과 나흘이 채 지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다섯 일족의 숙청으로 현리 전체가 혼란에 휩싸인 상황.
혁명이 일어났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병사들부터 일반 부족민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동요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가장 큰 혼란에 휩싸인 곳은 다섯 일족들이었다. 현기의 요구대로 일족의 어른들을 중심으로 숙청하였으나 그 여파도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는 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혼란이 줄어들더니 어제가 되자, 새로운 족장이 정해지며 질서가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대씨 일족을 제외한 네 개의 일족에서 정해진 새로운 족장들은 모두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청년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씨 일족의 새로운 족장, 이현기가 있었다.
“유저 출신의 족장이라…….”
“죄송합니다. 제가 반란을 미리 감지하였다면 그와 거래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뭐, 우리에게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어. 내가 껄끄럽게 여겼던 족장들을 모두 숙청할 수 있었으니까.”
이현기와의 거래로 일족들을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있었다. 물론 이현기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찍어 눌렀겠지만 반란이 일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반란이라는 것은 결국 제 살 깎아먹기와 다를 게 없는 것.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동안 현리 전체가 위축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호영은 이현기와의 거래를 통해 반란을 저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다섯 일족들을 숙청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껄끄럽지 않습니까? 유저라는 사실도 그렇고, 정략을 잘하는 유저라는 사실이…….”
당연히 껄끄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AI보다는 유저가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그자가 맞다면 더욱더 위협적이겠지.’
하지만 호영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잘만 하면 이씨 일족을 계속해서 아군으로 둘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것도 정치를 잘하는 아군으로 말이야. 너도 이런 인재를 바라고 있지 않았어?”
“물론 그렇기는 한데, 과연 아군으로 두는 게 가능할까요? 이씨 일족 정도라면 아군보다는 정적이 될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추장님의 태도부터가 조금 적대적이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현기 정도의 행동력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라면 야망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현기 정도의 능력자가 이씨 일족의 족장이 되었다면 호영의 수하로 들어가기보다는 더 큰 것을 노릴 것이었다.
호영처럼 혁명을 일으키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3회 차나 그 이후를 노리려 할 수도 있었다. 아무튼 뭐가 되었건 꿍꿍이를 가질 확률이 높았다.
‘정적이 될 것 같으면 그때 멸족시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호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수틀리면 아예 없애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호영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야. 그러니 정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일단 만나 보고 결정하자고.”
“흠, 추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바로 그자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원재는 그렇게 말한 뒤 이현기를 부르러 집무실을 나갔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집무실을 지키는 호위대 병사가 호영에게 말했다.
“이현기 족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여보내라.”
“예.”
문이 열리자 원재와 함께 이현기가 들어왔다. 현기는 처음 봤을 때처럼 겸손하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인사하였다.
“반갑습니다, 추장님.”
그러자 호영도 나름 격식을 차리며 답하였다. 처음 현기를 대할 때와는 전혀 상반된 태도로 말이다.
“나도 반갑소, 족장.”
“사극 톤이시네요?”
“족장이 되셨으니 말투도 바꿔야지.”
호영의 대답에 현기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만족스럽게 웃고는 당당하게 물었다. 그 역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입니까?”
일전에 호영은 현기에게 족장이 되면 자신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다. 지금 현기가 묻는 것도 바로 그 요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소. 족장은 센추리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으시오?”
“……저는 일단 전면에 나서고 싶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왔는데 관전자가 되고 싶지만은 않았거든요.”
“그래서 권력을 얻은 것이오?”
“뭐, 그런 이유도 있죠. 하지만 그보다는…… 추장님의 곁에서 대업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저기 계시는 우영이라는 분처럼 말입니다.”
현기의 그같은 대답에 호영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그러나 호영에게는 왠지 모르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대답이었다.
‘대업이라……. 나도 될 수 있으면 당신과 대업을 이루고 싶다.’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채 현기에게 말했다.
“우영처럼 되고 싶다니. 그럼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소.”
“어떤 요구를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 요구는 간단하오. 앞으로 나에게 충성하시오.”
“……예?”
갑작스러운 호영의 말에 당당한 기색이던 현기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기야 당황스러울 법도 하였다. 난데없이 자신에게 충성하라니? 현실에서라면 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소. 나에게 충성을 바치시오. 당신과 당신의 일족 그리고 네 개의 일족이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나의 요구요.”
“충성이라니.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충성이 맞습니까?”
호영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러자 현기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충성하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말했을 텐데, 우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족장의 요구도 철회하는 수밖에 없소.”
“……저를 죽이신다는 말씀입니까?”
“족장뿐만이 아니라 지금 네 일족의 중역이 된 NPC들 전부를 죽일 것이오.”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현기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추장님께 충성하리라는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애초에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추장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호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실되게 말하는 현기.
흔들리지 않은 그의 진심 어린 눈동자를 보고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씨 일족이 지략이나 모략을 잘 쓰긴 했지만 주군을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주인이 되었던 적도 없었고 말이야.’
그렇기에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명신 가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었다. 호영은 결국 현기를 압박하는 것을 여기서 멈추기로 하였다.
아직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맹세했다고 해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센추리 유저가 된 이현기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호영이 바라는 주종 관계는 5회 차 이후에나 가능할 터. 그러니 일단은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이고 천천히 회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배신은 하지 않겠다고 하니, 요구는 받아 준 걸로 하겠소.”
“감사합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시금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현기를 보며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던 원재도 분위기를 맞추어 웃는 얼굴을 하였다.
그러자 무거운 분위기가 사라졌고, 현기 역시 처음 보여 주었던 자신감으로 가득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추장님, 그런데 왜 저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족장이니까. 그리고 족장을 중히 써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소. 이씨 일족을 장악하던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면 이제부터 저를 중히 써 주시는 것입니까?”
“왜, 직책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오?”
“예, 저도 여기 있는 이분처럼, 공직에 나서고 싶습니다.”
원재를 가리키며 하는 그 말에 호영은 눈을 빛냈다. 설마 공직에 나서겠다는 요구를 하다니. 솔직히 예상치 못했던 요구였다.
“일족의 수장은 공직에 나서지 않는 것이 관례요. 내가 중히 쓰겠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족장으로서 나를 조력하라는 말이었소.”
“추장께서도 족장이면서 호위대장이셨지 않습니까? 관례는 관례일 뿐이지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호영이라고 더 이상 반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솔직한 말로 그 역시 현기가 공직에 나서는 게 좋았다. 그는 애초부터 현기를 책사나 모사로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직책을 원하시오?”
“원한다면 어디든 가질 수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 다만 이씨 일족의 수장인 만큼 어느 정도는 배려해 주겠소.”
“친위대, 가능할까요?”
“…….”
호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친위대가 만들어질 것을 어떻게 알았지? 호위대원들에게만 공표한 사실이건만.’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이씨 일족 정도 되는 세력이 이 정도의 정보력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중요한 것은 이현기가 친위대에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왜 들어오려는 것이냐’였다.
자신이 회귀 전에 알고 있던 이현기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문신이었다. 물론 그가 아는 이씨 가문의 가주가 이현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에 보여 주었던 현기의 모습만 봐도 무신보다는 문신에 가까웠다.
문신이 되어야 할 사람이 무신이 된다? 그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호영은 자신의 의문을 숨기지 않고 바로 물었다.
“왜 하필 친위대에 들어오려는 것이오? 족장이라고 친위대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배우고 싶었습니다, 추장님이 가진 강함에 대한 비결을. 왠지 친위대에 들어가면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호영은 납득하였다. 호영처럼 권력을 좋아하는 유저도 있겠지만 ‘무력’을 원하는 유저도 적지 않았다.
준기만 해도 센추리를 할 때 오직 무공만을 수련하지 않았던가. 물론 호영이 기억하는 ‘이씨 일족’과 현기의 외모를 보면 무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친위대에 들어오면서까지 나의 스킬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추장께서는 초보자의 섬에 있는 스킬들보다 훨씬 강력한 스킬들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초보자의 섬에 있는 그 어떤 스킬도 수십 명의 마법사를 동시에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래서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 추장님의 그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비결을.”
“솔직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