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센추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이들은 역시 시작부터 범상치 않아. 뭐, 김성근의 경우는 2회 차부터 8회 차까지 계속 현실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고집해서 더 유명해진 경우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 김성근이 나의 친위대에 들어 와주다니. 정말 다음 주가 기대되는군.’
이번 주까지는 유저들을 심층 면접하여 성향을 알아내고 간단한 신병 교육을 하는 시간이었으니, 다음 주부터 진짜 친위대의 훈련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리고 친위대 훈련의 일부 과정은 호영이 직접 감독할 예정이었다. 준기가 없는 이상, 제대로 된 ‘창술’을 가르칠 인물은 호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준기가 만든 창술을 가르치는데 정작 준기가 없다니. 하루빨리 준기를 데려오고 싶은데 말이야.’
호영으로선 준기의 부재가 뼈아프게 느껴졌다. 준기는 본인 스스로의 무력도 상당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능도 호영보다 뛰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쉬워한다고 준기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준기와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추장님, 회의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친위대 훈련부터 준기에 대해서까지 여러 생각을 하던 호영은 원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간부 회의를 열었는데 바로 지금이 그 간부 회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지금쯤 부족의 주요 간부들이 호영의 집무실에 모인 채로 호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
퍼뜩 정신을 차린 호영은 앞으로 친위대를 통솔하게 될 장훈을 불렀다.
“장훈 친위대장.”
“예, 추장님.”
“신병들을 막사로 안내하고서 이현기 족장과 함께 집무실로 오도록.”
“이번에 십장이 된 이현기를 데려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비록 친위대의 일개 십장이기는 하나 그는 이씨 일족의 족장이다. 간부 회의에 참석해도 문제 될 건 없어.”
“알겠습니다. 신병들의 안내가 끝난 뒤 이현기 십장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씨 일족의 족장이자 유저이기도 한 이현기와 친위대의 대장으로서 앞으로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될 장훈은 간부 회의에서 빠져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현기의 경우는 병사로서의 전투력보단 군사나 모사로서의 지략을 더욱 기대하고 있으니만큼 간부 회의에서 뺄 수는 없었다.
장훈에게 병사들의 통제가 끝나면 집무실로 향하라는 명령을 전한 호영은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집무실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것처럼 부족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내가 조금 늦었군.”
“아닙니다!”
상당히 기합이 든 모습들이었다.
하기야 다섯 가문을 숙청한 게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았으니 기합이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부족의 실력가들이라고 해도 절대 권력을 확립한 호영의 앞에서는 일개 수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래서 좋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호영은 가장 먼저 경비대의 대장, 봉성을 불렀다.
“봉성, 정찰의 성과는?”
“지금까지 총 네 개의 위험 요소를 발견하였습니다. 고블린 부락이 두 개와 소머리 괴물 그리고 호랑이입니다.”
경비대는 보통 수비의 역할을 띠기 마련이다. 현리 부족의 경비대 역시 궁극적인 목표는 수비였다.
하지만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 봉성이 경비대 대장이 된 이후의 현리 경비대는 상당히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사방으로 병사들을 보내 정찰시키고 마물이나 맹수 같은 위험 요소가 있을 시 대장이 직접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건 마치 100년 전, 봉선이 경비대장으로 있을 때와 비슷했다. 그녀 역시 최선의 수비가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장부였으니까.
아무튼 현재의 경비대는 무척이나 공격적이었고 또한 정찰에 적극적이었다. 호영이 봉성에게 예백산을 정찰하게 한 것도 바로 그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고블린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군. 그리고 호랑이와 미노타우로스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해야겠어.”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경비대를 동원하여 지금 당장 정리하겠습니다.”
“아니, 예백산을 정리하는 것은 친위대가 할 일이다. 경비대는 지금처럼 정찰하거나 농지 인근에 출몰하는 야생동물들을 제거해.”
“그래도 암염 광산을 하루빨리 확보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봉성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예백산을 정찰하라 명령을 내렸던 것도 암염 광산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소금이 없으면 인구 증가는 불가능한 법.
사실 현리가 1만이라는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예백산에 암염 광산이 있었던 까닭이다.
뭐, 반대로 말하면 암염 광산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기에 1만밖에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경비대가 정찰을 통해 현리 인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야.”
호영의 말처럼 지금 당장은 급할 것이 없었다. 경비대가 암염 광산 인근을 정찰하면서 충분한 양의 소금을 수송해 왔고, 또한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소금도 제법 되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복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내년이었지만, 어차피 다음 달부터 예백산을 정리할 것이니 그것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족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말살시키겠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지금까지는 잘해 왔으니 말이야.”
그렇게 봉성을 격려한 호영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봉하를 바라보았다. 봉성과 같은 봉씨 일족인 봉하는 현재 행정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행정관이라는 직책은 부족의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추후 보급관이 생기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주어진 권한만으로는 부족의 이인자에 가까울 정도였다.
“행정관은 요즘 어때? 관리들도 이제는 숫자에 익숙해졌겠지?”
2회 차에서는 인구가 크게 급증하였기에 정책이든 행정이든 1회 차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간단하게 배급만 생각해도 그렇다.
이전까지의 현리는 재고 관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까지 배급할 수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었다.
그나마 지금은 어느 정도 파악되었지만 이전까지는 관리의 허술함으로 비리의 온상이기까지 하였다.
이것 외에도 세금 징수나 인적 관리 등 체계적 분류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호영이 가르친 것이 바로 숫자였다.
사실 숫자는 마법사들도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따라서 현리에 숫자가 전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추장님께서 보내 주신 인재들 덕분에 이제는 익숙해지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나?”
“세 명 모두 너무 불성실하거나 버릇이 없습니다.”
봉하의 그같은 말에 호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친위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한 유저들.
그러나 호영은 단 한 명의 유저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들 중 일부를 모두 관리로 등용하였다.
저마다 아무리 못해도 사칙연산은 알고 있을 것이니 관리로서 큰 소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관리라는 직책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서류 정리만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 시대의 관리들은 발로 뛰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군다나 이해력이 낮은 부족민들을 상대하는 일도 잦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의외로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국 게임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지함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원재나 호영처럼 현실보다 센추리에 치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일단은 그대로 둬. 그러다가 계속 말을 안 들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예. 일단 머리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계속 옆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1회 차 때 자신의 밑에서 지략을 담당하던 이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사가 있었다면 유저들도 어렵지 않게 관리하였을 텐데 말이야. 실제로 몇몇 유저들이 이사에게 존경심을 보이기도 하였고.’
물론 그렇다 해서 봉하가 무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호영이 직접 능력치를 살폈기에 봉하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현자라 불리던 이사와 비교하는 것엔 무리가 있었다. 이사는 호영이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완벽한 최고의 문사였으니 말이다.
똑똑!
“추장님, 친위대장 장훈입니다.”
“친위대 십장 이현기입니다.”
그때였다. 이씨 일족의 족장이자 친위대의 십장인 이현기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씨 일족의 이사를 생각하고 있었던 호영으로선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녀석을 행정관으로 쓰고 싶은데. 이사를 대신하기에 딱이야.’
플레이 시간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 굳이 병사가 되겠다는 이현기의 선택이 오늘따라 아쉽게 느껴졌다.
호영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일깨우고는 지금 막 집무실에 들어온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병사들은 잘 인솔했나?”
“예, 신병들이 숙소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혹시 눈여겨볼 만한 신병이 있는 것 같나?”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김성근이라는 자와 민우라는 수인족이 제법 눈여겨볼 만한 것 같습니다.”
우연히도 두 사람 모두 호영이 아는 자들이었다. 뭐, 김성근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예상했던 인물이었지만 말이다.
“저는 한진영이라는 병사를 눈여겨보았습니다.”
“한진영? 신병인가?”
“예, 스물세 명 중 한 명으로, 외양 자체는 평범하지만 머리가 좋아 장훈 대장을 보좌하거나 전략을 구상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 간부 회의인 만큼 조심스러울 법도 한데 현기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역시 자신감 하나는 대단한 사내였다.
그런데 현기가 내놓은 의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다소 민감하다고 볼 수 있는 발언을 하였다.
“또한 저는 배신웅 같은 마법사들도 친위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법사를 친위대에?”
“예, 마법사의 존재로 더욱 전략적인 움직임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여태까지 누구도 주장한 적이 없었던 의견. 당연하겠지만 간부들의 표정은 좋지 못하였다.
아무리 마법사의 존재로 전략의 폭이 넓어진다 해도 혁명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마법사를 우대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아직은 살아남은 마법사들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지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까.”
원재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배신웅을 비롯하여 혁명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여전히 감금 상태였다.
호영은 마법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감금에서 풀어 주고 싶었지만 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몇 달은 더 감금되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추장님 말씀처럼 추후 적당한 시기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