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그놈이 죽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것을.’
배그라는 배틀 로열 게임의 프로 게이머 출신 수하를 생각하며 고항은 혀를 찼다.
마법은 쓸 줄 몰라도 마법 스킬을 가지고 있던 유저였다.
거기에 머리도 나쁘지 않아 고항을 보좌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초연이라는 사내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였다.
초보자의 섬에서 마법이나 연구하고 있는 사람을 더 이상 떠올리는 것은 무의미하였다. 고항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고항의 눈에 김영태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엄청난 소식을 알아냈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봤자 전사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정보일 텐데 말이다.
“대장님! 대장님! 그 부족에 도착할 때까지는 대략…… 크헉.”
김영태를 바라보던 고항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정체 모를 검은 인영이 풀숲에서 튀어나와 김영태의 가슴을 창으로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누, 누구냐!”
고항이 기겁한 얼굴로 검은 인영에게 외쳤다.
“…….”
하지만 검은 인영은 고항의 외침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귀신처럼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뒤늦게 전사들이 달려와서는 김영태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김영태는 여전히 전사들의 추장이었던 것이다.
“추장님! 추장님!”
“누가 추장님을 죽였다!”
“어떤 놈이야!”
전사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의 추장을 죽인 자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고항은 전사들처럼 분노를 느끼는 대신 불안감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마치 호랑이나 날렵한 몬스터를 보는 것 같았어. 관성과 중력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건가.’
사실 부족 연합의 근거지인 영등포구 서부에는 맹수나 마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영등포구는 본래 수인들의 땅이었고 수인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생물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부족 연합은 수인족을 무찌름으로서 인간을 위협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수인들의 성세가 도움이 된 경우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부족 연합은 마물이나 맹수를 대응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수인들 같은 경우야 마법사들의 마법과 임재황의 전략으로 손쉽게 상대하였었다.
브레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니 수인들의 행동 양식을 철저하게 파악한 뒤 그에 맞는 대응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소수의 강력한 마물을 상대할 때였다. 아무리 정보를 모으고 약점을 파악해도 한계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라면 어떨까?
실제로 그런 마물들로 인해 부족 연합은 영등포구 동부로 진출하거나 남부로 진출할 때 크나큰 실패를 겪었다. 맹수 한 마리나 거대 마물에 의해 원정군이 몰살당한 것이다.
부족 연합이 수인들의 땅으로 진출을 고집하는 것도 상성으로 볼 때 수인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마법사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 수인들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고항은 김영태를 죽인 사내를 상대하는 것이 ‘소수의 강력한 마물’을 상대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사내를 본 시간 자체는 무척이나 짧았지만 그만큼 고항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이같은 고항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서걱!
“으아악!”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전사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비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헉!”
“사, 살려 줘! 크윽!”
뒤에서, 그리고 앞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무언가가 전사들을 옥죄고 있었다.
사방은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시야도 제한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명이 들리고 난 이후에 달려가면 항상 늦었다. 전사들은 동료의 죽음을 수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이길 수 없어. 저렇게 사라지는데 어떻게 쫓아?”
“괴물이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를 표출하던 전사들이었다. 저마다 김영태의 복수를 해 주겠다며 복수심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지금 전사들의 모습은 거대 호랑이를 목격했을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잔병처럼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휘익!
두려움에 휩싸인 전사들을 향해 이번에는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화살은 정확하게 전사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이마에 명중시킨 것이다.
그걸 보고 더 이상 복수심을 불태우는 전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살 거야!”
“도망쳐! 도망쳐야 살 수 있어!”
서른 명의 전사들 중 무려 열 명이 죽임을 당하자 전사들은 어느덧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정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된 것이다.
그리고 원정 부대가 와해되었다는 것은 고항의 실패를 의미하였다. 그는 부족 연합으로 돌아가는 즉시 최진수에게 징계를 받게 될 터.
적어도 2회 차에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누구이기에 우리 부족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냐!”
이제껏 평정을 유지하던 고항이지만 원정 부대가 와해된 지금 이 순간까지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원정 부대를 와해시킨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 이름은 초연이다.”
“초연? 네가 그렇다면……!”
“우리 부족을 침공하려 했으니 당연히 방해해야지. 안 그래?”
“말도 안 돼! 너는 나와 같은 유저일 텐데? 유저가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냐. 이건 밸런스 붕괴다!”
“마법사의 존재를 알면서도 스킬의 필요성을 외면하니 그렇게 나약한 것이다.”
초연이라 이름을 밝힌 사내가 조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고항은 눈을 크게 떴다.
“스킬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니 고항은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 센추리라는 가상현실 게임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어떤 것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별로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수월하게 스킬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김영태처럼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이 없는데도 추장으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면에서 불평등한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밸런스 붕괴처럼 보이는 초연의 무력도 나름 합당한 근거가 있을지 모른다.
아바타의 스텟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든가, 아니면 유저의 재능이 월등하게 뛰어나다든가!
‘어찌 되었건 스킬 숙련도를 올리다 보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스킬을 키우다 보면 저자처럼……?’
하지만 고항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화살. 그 화살이 고항의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고항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부족 연합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위계질서
“휴우, 계속해서 생각하는 거지만 보급관만큼은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친위대가 암염 광산을 확보한 지도 센추리의 시간으로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이 말은 현기가 ‘군사’라는 직책을 맡게 된 지도 한 달이 지났음을 의미하였다.
한 달 동안 현기는 호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혼심을 다해 노력했다. 호영이 시키는 일이면 직책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슨 일’이란 하나같이 머리를 쓰는 일들을 말한다. 군사 일이나 비서 일, 심지어 행정 업무와 재판 사무까지 관여하였다.
당연하겠지만 현기가 담당하는 업무량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었다. 현기도 친위대에서 쌓아 놨던 체력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현기도 한계가 찾아왔다. ‘보급관을 뽑아라.’라고 호영에게 말하고 있는 이유도 그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보급관을 왜? 네가 있잖아.”
하지만 호영은 그런 현기의 신호를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미 그는 현기라는 만능인에게 완전히 매료된 상태였다. 현기라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실제로도 그의 업무 절반 이상을 대신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인재 수집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아니, 인재 수집에 대한 욕구는 여전해도 문사 쪽보다는 무인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문사 쪽은 현기 혼자면 아직까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장님, 저는 군사입니다! 군사! 아니, 애초에 군사가 행정 업무를 보는 것도 웃긴 일인데 보급까지 담당하라는 것은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무엇보다 보급관이라는 것은 본진에서 보급과 생산을 담당하는 일입니다! 군대의 행보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현기의 모습에 호영은 식은땀을 흘렸다. 워낙 기대치가 높았던 인재였기에 업무를 지나치게 몰아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금도 친위대의 군사이면서 부족 전체의 행정을 담당하고 심지어 군사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중이었다. 1인 3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피로에 쓰러질 정도로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급까지 담당하라니. 이것은 과로사하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호영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흠흠, 그런데 지금 당장 보급관이 필요할까? 어차피 부족에는 원재와 봉하가 있잖아. 유저들을 관리로 등용시켜서 행정 체계도 나름 정비되었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원래라면 괜찮았겠습니다만, 이제 곧 추수가 끝나지 않습니까? 내년 정복 전쟁에 식량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집계해야 하고 식량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지도 계산해 놔야 합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가 흥분하는 바람에 그의 말이 공격적으로 느껴졌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터.
원래라면 겨울이 와도 식량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겠지만, 문제는 현리 부족이 내년부터 정복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도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더욱더 식량을 비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인재를 어디서 구해 와?’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현기가 원하는 인재란 삼국지의 제갈량이나 초한지의 소하 같은 인물일 것이다. 똑똑하면서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진 보급의 대가 말이다.
그러나 인재란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제갈량 같은 인물은 더욱더 구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현기처럼 원대한 목표가 있지 않고서는 누가 행정이나 보급 같은 것을 담당한다는 말인가?
유저들은 대개 인내심이 없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했다. 처음 친위대에 도전했던 유저가 스물세 명이었는데 지금은 고작 열두 명밖에 남지 않은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을 그대로 말해 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호영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였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어. 친위대의 민우라는 유저를 시켜 커뮤니티에 홍보하기도 하였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네가 바라는 인재가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