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그마저도 수백, 수천만 원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것만 봐도 호영이 가진 스킬들의 가치가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심법의 경우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애초에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 무공의 종주국이라 불리게 될 중국에서도 고작해야 열 명 정도 있을까?
물론 그조차도 아주 기초적인 심법에 불과하였다.
심법이라기보다는 그저 호흡법에서 조금 발전한 것에 불과한 수준.
이런 상황이었으니 호영이 가르친다는 심법의 가치는 환산할 수 없는 수준임이 확실하였다.
“그래서 조건이라는 게 뭡니까?”
김성근이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로서는 호영이 먼저 심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주제에 조건을 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가 호영만 아니었다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조건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어. 어떻게 보면 진작부터 했어야 할 일이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심법을 배운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위아래 없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네가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고는 있다. 학교 선배나 동네 친한 형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에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동네 형이라니. 제가 추장님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김성근이 손사래를 치며 당혹해 하였지만 호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둘의 관계는 이제부터 군신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야.”
“예? 군신 관계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말이다.”
“…….”
호영의 그같은 말에 김성근은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었다. 당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당했기 때문이다.
“아니, 설마 저보고 주군이라 부르라는 말입니까? 충성 맹세를 하고서?”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되묻는 김성근이었다.
사실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21세기에 무슨 군신 관계고 무슨 충성 맹세란 말인가?
뭐, 원재나 친위대의 몇몇 정신 나간 유저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 합리적이고 정신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김성근으로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심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와, 이거 참 황당하네. 솔직히 추장님께 실망스럽습니다. 왜, 충성 맹세를 하지 않으면 제가 배신이라도 할 것 같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김성근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호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마치 배신이라는 게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호영은 준기나 원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니, 준기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준기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때도 충성 맹세까지는 아니어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었다.
그리고 애초에 호영은 준기에게 자신의 밑천을 전부 가르쳐 주지도 않았었다. 심법은 예전에 그가 일반 병사일 때 익혔던 심법을 가르쳐 주었고, 창술 같은 것은 개념만 알려 주었다.
물론 준기의 재능이 워낙 출중하여 창술을 만들어 내고 심지어 보법까지 만들어 내어 호영이 오히려 이득을 보았지만, 어쨌든 호영은 자신의 절기들을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준기에게도 그랬는데 김성근은 말할 것도 없지.’
준기야 현실에서도 보고 센추리에서도 몇 년을 함께한 사이였지만 김성근은 고작해야 센추리에서 몇 달 봤을 뿐이다.
사람 보는 눈이 아무리 좋아도 고작 몇 달 만에 그 사람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을까?
호영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하였다. 물론 맹세나 약속 따위가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저 단순 무식한 김성근의 뇌리에 상하 관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진짜 그렇게 봤다면 실망입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나 김성근을 어떻게 보고 배신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실망스럽다는 어조로 그렇게 외치는 김성근을 보고 호영은 무덤덤한 어조로 반문하였다.
“배신도 배신이지만 위계질서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네가 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지금 너 때문에 부족 전체가 어수선해졌잖아?”
“가,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행정관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간부들이 너를 규탄하였다. 친위대의 일개 십장이 부족의 간부들을 너무 막 대한다는 이유에서 말이야. 실제로 너는 친위대장이나 나를 제외하면 대놓고 무시했지?”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김성근으로 하여금 충성을 강요하게 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위계질서의 문란.
김성근은 호방한 성격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변덕이 심하고 위아래가 없었다. 한마디로 조직 생활에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현기 이상으로 간부들과의 마찰이 있었다. 현기야 이제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여 마찰이 줄어들었지만 김성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더군다나 김성근과 마찰이 있었던 상대들은 전부 김성근보다 직급이 높은, 부족의 간부들. 호영으로선 아무리 김성근을 총애한다지만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심법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군신 관계가 되건 사제 관계가 되건 위계질서라는 것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다.
“그거야 그놈들이 기분 나쁘게 행동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제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군사라는 놈은…….”
“군사는 네 상관이다.”
“아, 진짜, 제가 이러는 거 하루 이틀입니까? 솔직히 나보다 나이도 적어 보이는 놈들한테 제가 왜 존대를 해야 합니까? 군사라는 놈은 반오십도 안 되는 보이는데.”
“하지 않으면 심법은 못 배운다.”
“진짜 이러깁니까? 지금 추장님이 하는 행동은 돈으로 충성심을 사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충성하라고 해서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살라는 말이 아니야. 충성을 바치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거다. 그 정도의 연기도 못 하나?”
“…….”
“만약 못 한다면 나도 더 이상 너를 지켜 줄 수 없어. 안 그래도 간부들이 너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연기조차 못 하는 너를 내가 왜 지켜 줘야 하지?”
냉담하기 그지없는 말에 김성근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자존심이 상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이 있는 자라면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센추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센추리에선 호영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김성근처럼 현대인의 사고를 유지하는 게 훨씬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더 이상 나에게서 어떤 것도 얻어 갈 수 없을 것이다.’
* * *
염창역 인근의 술집.
센추리에서 나름 친해졌다고 볼 수 있는 김성근과 민건우는 현실에서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마침 집도 5분 거리였고 현실과의 연계를 꺼리는 성격들이 아니었기에 둘의 만남은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왜 이틀이나 안 들어오셨어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거든.”
“조폭 간에 항쟁이라도 있었나 보죠?”
김성근의 외형은 처음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근육질 체구에 험상궂은 얼굴, 얼굴에 상처만 있으면 영화에 나올 법한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건우는 김성근을 조폭이나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얼굴에 상처까지 있다 보니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여기서 조폭이 왜 나와? 아직도 내가 조폭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었어요? 솔직히 누가 봐도 조폭인데.”
“진짜 죽으려고.”
현실에서 만나게 된 것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센추리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서로 농담하는 것도 마치 십년지기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진짜 왜 접속하지 않았어요?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풀 접속했잖아요.”
“말했잖아,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었다고.”
“센추리에서요?”
“어. 짜증 나서 들어가기 싫더라.”
“무슨 일인데요? 감찰관이 또 뭐라 했어요? 그런 거라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 완전 중세 사람이잖아요. NPC들보다 더한 것 같던데.”
김성근은 추장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우원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아니, 우원재뿐만이 아니라 건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워낙 드센 성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보다 약한 놈 따위는 신경도 안 써.”
“그렇다면 누구랑 마찰이 있었는데요?”
“그보다 너, 1회 차도 경험했었지? 추장에 대해 좀 잘 알겠네? 네가 보기에 추장은 어떤 사람인 것 같냐?”
“추장님요? 그야 대단한 분이죠. 센추리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성격이나 현실에서 무슨 일 하는지, 뭐 그런 사적인 거 있잖아.”
“음, 솔직히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제가 1회 차 때부터 추장님과 함께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비밀이 많으신 분이라. 애초에 저는 홍보밖에 한 것이 없어서.”
“역시 너는 쓸모없네.”
“쓸모없다니 말이 좀 심하시네. 뭐, 쓸모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추장님에 대한 것은 왜 물어요?”
“추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예? 갑자기 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장님을 동경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동경했어! 그냥 창 좀 잘 다뤄서 존경…… 아니, 존경까지는 아니고 그 뭐시냐. 그래, 감탄한 거지. 감탄한 거.”
“아, 그러세요?”
“뭐냐, 그 반응은! 진짜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싫어졌는데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꼬치꼬치 캐묻는 건우의 태도에 김성근은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추장을 좋게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추장은 나를 좋게 보는 것 같지가 않아. 도구처럼 생각한다고나 할까.”
“추장님이 조금 차갑기는 하죠. 하지만 도구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요? 추장님도 은근 인간미 있어요.”
“네가 그때 없어서 그래. 추장이 그때 나한테 그랬다니까. 심법 줄 테니 충성 바치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예? 심법요? 그건 갑자기 또 뭐예요? 좀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건우를 보며 김성근은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짜 무공인 거잖아요! 나였으면 무릎 꿇어서라도 받았겠다!”
김성근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건우가 외친 한마디였다.
“남자가 무릎을 왜 꿇어? 그리고 부족의 간부들까지 들먹였다니까? 내가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부족에 남을 수도 없다면서.”
“형이 좀 개차반이긴 했잖아요. 추장님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거겠죠. 솔직히 추장님의 성격으로 지금까지 봐준 게 이상한 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