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너 좀 맞아야겠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무튼 충성이라는 것에 너무 고정관념이 심하신 거 아니에요? 그래 봤자 현실이 아니잖아요.”
“센추리는 거의 현실과 다를 바 없잖아. 나는 거기서도 내 이름을 쓴다고.”
“그렇다 해도 형이 추장님의 수하인 건 달라지지 않아요. 추장님이 싫었다면 친위대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중간에 떠나셨어야죠. 실제로 뇌전칠창을 가르치기 전에 추장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들은 이걸 배우는 순간부터 나에게 빚지는 것이라고. 그러니 배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이에요. 우린 사실 그때 이미 추장님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과 다름없어요.”
“…….”
이미 충성한 것과 다름없다는 건우의 말에 김성근은 충격을 먹었는지 멍청한 얼굴을 하였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친위대에서 그는 몇 번이고 추장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이라 맹세하였었다.
물론 군대에 있을 때 육군 복무신조를 외치는 것처럼 본심은 1퍼센트도 없었지만 말이다.
“정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간단하게, 연기한다고 생각하세요.”
“배우가 아닌데 연기는 무슨…….”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건우의 거듭된 조언에 김성근도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모두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되었던 건가?’
조금씩 생겨나는 의심.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었다.
* * *
최명헌은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했다.
“요즘 수상한 일을 하고 다니던데, 정확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갑자기 웬 참견이야? 내가 뭘 하고 다니건 형이 무슨 상관인데.”
형의 물음에 최진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재벌가가 그러하듯 최진수와 최명헌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아니, 좋지 않음을 넘어 적대 관계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진수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형을 누르고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상관은 없지. 네놈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찌그러져 산다면 말이야. 하지만 지금 네놈은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고 있어.”
동생에게 심기가 거슬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척 이질적일 수도 있었지만, 정작 말을 내뱉는 최명헌이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최진수나 모두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최명헌이 최진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 같은 새끼. 지금은 네가 내 위에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물론 최진수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주 겪었다고 해도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었다.
으드득! 형의 태도에 모멸감과 자괴감을 느낀 최진수지만 평소처럼 분노를 토해 내지는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최명헌이라는 사내는 차기 후계자로 벌써부터 이름을 높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형제라지만 서열이라는 것이 명백히 존재하는데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며 나중을 기약하기로 한 최진수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연기한 채 말문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은퇴한 프로 게이머들을 모아서 게임을 하고 있어. 형은 모르겠지만 요즘 게임들이 장난 아니게 재미있거든.”
“게임이라고? 그렇다면 기자들은 왜 만나고 다니는 거지? 이 기사는 또 뭐고?”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 주는 최명헌.
그의 휴대폰에는 가상현실 게임, 센추리에 관한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대충 센추리라는 가상현실 게임의 위험성과 가상현실을 규제해야 될 필요성을 설명한 기사였다.
참고로 이 기사가 나오게 된 배경에 최진수가 있었다. 센추리가 한창 화제가 되기 시작하자 유저의 유입을 줄이기 위해 이같은 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무척 수상한 게임이라 그랬어. 미국에서 만들어진 가상현실 게임인데 회장이 누구인지 개발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 그래서 언론사 다니는 대학 동기들한테 알려 준 거야. 나는 그래도 미국에서 왔으니까 조금 더 잘 알잖아.”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한 최진수지만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놓은 자식까지는 아니어도 후계 서열에서 한참은 떨어져 있어 지분 쪼가리 얼마라도 받으면 감사해야 할 처지인 것이 지금의 최진수였다.
그가 권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세상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 것이라 예상되는 센추리에서 크게 활약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다른 재벌들이나 눈앞에 있는 그의 형이나 센추리가 일개 게임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현실과 다르지 않고 시간비율이 무려 네 배나 되는 가상현실 게임을 다른 게임과 똑같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머지않아 진실을 알게 될 것이었다, 센추리의 주인이 되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그렇기에 최진수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찾아온 셈이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위험한 게임을 왜 몸소 하고 있다는 말이냐? 뇌사에 빠질 우려도 있고 정신적 충격에 쇼크사할 수도 있다면서?”
“재미있으니까. 약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거든. 형도 한번 해 봐. 단번에 중독될걸.”
‘약’과 ‘중독’이라는 말에 최명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경멸의 눈빛을 하며 최진수에게 물었다.
“설마, 아직도 마약하는 것은 아니겠지?”
“안 한다니까. 그때는 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잖아. 그리고 지금은 솔직히 약 하는 것보다 게임하는 게 더 재미있어.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감 넘치거든.”
“또다시 그룹의 이미지에 흠집을 낸다면 떡고물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니 처신 잘해라.”
“…….”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건데, 더 이상 내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마. 센추리를 하든 가상현실을 하든 찌그러져서 조용히 살란 말이다. 또다시 헛된 짓거리를 하여 내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면 네놈은 떡고물을 못 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잃게 될 거야.”
차가운 어조로 으름장을 내뱉으며 물러나는 최명헌의 뒷모습을 보고 최진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자존심은 그 누구보다 강한 그였기에 살기 어린 눈으로 최명헌의 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명헌이 완전히 물러나자 최진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눈치채지는 못한 모양이군. 흥! 네놈이 그렇지. 게임이나 오락 같은 것은 곁눈질도 하지 않는 고고한 놈이니까. 하지만 그 고고함이 지금까지는 유능함으로 비쳤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실수가 될 거야!’
최명헌의 말투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어쨌든 최명헌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니까.
그 방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약간의 시간만 벌어도 그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생긴다. 왜냐하면 센추리와의 시간 비율이 무려 일 대 사이기 때문이다. 최명헌보다 4배는 더 많은 시간을 가졌으니 그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 내면 될 터.
‘문제는 그놈들이다. 그 연놈들 때문에 부족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어.’
센추리에 자리 잡는 것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프로 게이머들의 활약 덕분에 고작해야 수십 명밖에 안 되던 부족에서 거대한 부족 연합으로 확장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족을 위협하는 수인과 마물들을 완전히 정리하였고, 대략 영등포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일부를 확보하였다.
시간이 조금만 주어진다면 한국 최강의 부족으로 알려진 현리 부족만큼은 아니어도 그 다음가는 부족이 될 수 있었을 터.
그리고 최초의 계획대로 서쪽에 있는 부족을 점령하여 양천구와 강서구로 진출했다면 현리와 자웅을 겨루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하였고, 오히려 서쪽에 있는 ‘초연’이라는 자가 이끄는 부족에 의해 그의 군대는 참패를 겪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부족’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는 초연의 부족에게 패배한 것이 아닌 초연과 그의 아내에 의해 패배한 것이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연놈들은 어떻게 그리 강한 거지? 여자는 몰라도 남자는 유저인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제기랄.”
초연과 그의 아내를 생각하자 최진수의 기분은 급격하게 다운되었다. 무려 서른 명을 동원한 전쟁이 고작 두 명에 의해 좌초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실패해서는 안 된다. 최명헌이 언제 센추리에 관심을 보일지 알 수 없어! 이번에는 무조건 그 연놈들을 끝장내야 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최진수는 곧바로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하아.”
센추리에 접속한 최진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센추리 세상은 공기부터가 다른 것 같았다. 청량하다고나 해야 할까.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들이 전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회장님! 기침하셨습니까?”
회장! 현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차기 후계자가 되더라도 최소 수십 년은 지나야 회장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센추리에서는 달랐다. 연합 부족의 회장, 최진수. 그는 센추리에서만큼은 천여 명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연합 부족의 회장이었던 것이다.
‘권력이라…….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짜릿하고 늘 새로워.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이야.’
이러니 마약 같은 것이 더 이상 끌리지 않는 것이었다.
최진수는 잠시 희열에 찬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연합 간부들은?”
“전부 회의장에 모여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회장보다 늦게 출근할 간 큰 사원은 없을 테니까.
사내의 말에 최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연합 부족의 회의장으로 쓰는 거대한 나무집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최진수에게 인사하였다.
그룹의 사장들이나 회장이 받을 법한 의전이었다.
최진수는 그런 의전을 무표정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받고는 상전에 착석하였다.
“앉지.”
“감사합니다!”
간부들은 최진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 채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신들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 간부들의 모습을 잠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최진수는 이내 정색한 채 말했다.
“출정 준비는 끝냈겠지?”
“회장님이 출정을 명령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출정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얼마나 되지?”
“노예 전사가 마흔 명에, 일반 전사가 열 명입니다.”
최측근, 마재광의 대답에 최진수는 고개를 돌려 우측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임재황.”
“예!”
“이번에는 완벽할 테지?”
“출정 인원만 쉰 명입니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쟁입니다.”
“지난번에는 서른 명이어서 진 거야? 두 명에게 깨진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벽할 겁니다.”
“똑바로 해. 고작 두 명을 어쩌지 못해서 대연합이 이러고 있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