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93화 (93/345)

# 93

그러나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호영이야 워낙 강하고 또 혼자니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일반 부족민이 현리까지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마족들이니 수인들이니 온갖 것들이 습격을 가해 올 것인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중간에 도주하는 이들도 최소 수백은 될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이들을 버리고 간다면 최진수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 터.

호영으로선 최진수에게 득 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준기였다. 준기는 이미 추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니 새로운 부족을 통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

물론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준기의 무력도 호영보다 못할 뿐이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거기에 연합의 전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최진수를 따라간 상황이었기에 반란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었다.

“나와 같이 돌아가는 것은 그 봉영이었던가? 아무튼 그 여자와 수인들뿐이야. 너는 내가 병사를 보낼 때까지 이곳을 지켜. 이곳을 맡길 사람은 너뿐이다.”

“허어, 봉영 씨는 또 왜요?”

“이미 독립하려고 했던 여자야. 여기에 놔두었다간 언제고 반란을 일으킬걸. 뭐, 반란이야 네가 어련히 진압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손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잖아.”

“…….”

그 말에 준기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봉영의 예상치 못한 배신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병사들을 빨리 보내 주세요. 저도 현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원한다면 이 마을의 일부를 봉지로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아니요. 저는 형님 곁에서 무공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준기의 그같은 대답에 호영은 씩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준기의 모습이 그를 흐뭇하게 하였다.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나 없이도 무공이 많이 발전했던데? 내가 너에게 배워야 할 정도로. 특히 보법은 뭐야? 그새 새로 만들었어?”

“아, 풍운보요? 이전에 쓰던 보법이 너무 단순한 것 같아서 새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지난 전투에서 이 보법이 큰 역할을 했어요. 방향 선회도 빠르고 변칙적이라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전사들이 반응도 하지 못하더라고요.”

“오, 그래?”

호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에는 질린 기색이 완연해 보였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이건 좀 심하네. 나는 8년 동안 보법은커녕 창술의 초식 몇 개를 만든 게 전부인데 2년도 안 되어 두 개의 보법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불공평한 게임이다. 천재들을 위한 게임이랄까.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 봐야 A급은커녕 B급이 되기도 힘들었다.

아니, 재능이 아예 없는 경우 D급에서 성장이 멈출 수도 있었다. 노력만으로 닿을 수 있는 한계선이 D급인 셈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준기의 스킬을 공짜로 배울 수 있다는 거지. 뭐, 애초에 준기에게 무공을 가르친 이유도 준기의 재능 덕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괴감을 털어 냈다.

* * *

센추리에서 봉영이라는 이름의 아바타를 사용하는 박경선은 눈앞의 샌드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샌드백이 크게 출렁거렸다. 여인의 주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파워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먹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스러운 얼굴로 샌드백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또 내질렀다.

‘도대체 왜! 왜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거야!’

너무나 분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불한당 같은 자에게 패배를, 그것도 일방적인 패배를 겪은 것은 분명 치욕적인 일었다. 하지만 그보다 분한 것은 활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저항을 포기한 것이었다.

활을 빼앗겼다면 주먹을 쓰든 발을 쓰든 어떻게 반격을 했어야 했다. 주먹과 발이 먹히지 않는다면 이나 손톱을 썼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기만 하였다. 정말 자신이 한심스럽고 분하게만 느껴졌다.

쾅쾅!

지금 그녀가 샌드백을 향해 주먹질을 날리고 있는 것도 바로 참을 수 없는 분함 때문이었다.

“밤중에 웬 소란이냐?”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그녀의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경선은 주먹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중년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빠…….”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녀의 부친인 박선후였다.

“양궁 그만두고 게임 같은 것에 빠져 살더니 밤중에 도장에는 왜 온 것이냐?”

“별일 아니야.”

선후, 즉 부친의 물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경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억지로 숨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친은 그런 경선을 무뚝뚝한 시선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10분이든 20분이든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았다.

부친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것일까? 경선은 갑자기 부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는…… 10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을 수 있어?”

“중국 영화는 싫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10미터라면 피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역시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잖아.”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부친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묻자 경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당했던 일을 부친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무뚝뚝하기는 해도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는 부친이었다. 만약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자신을 대신해 그 대왕이라는 사내에게 복수를 해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잖아. 복수를 하더라도 내가 직접 해!’

경선은 어릴 때부터 웬만한 남자들보다 자존심이 강했다. 무술 하는 아버지를 두어서인지 여러 가지 무술을 곧잘 하였고 남자들과 싸워서 지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하였다.

그녀가 무술을 중간에 그만두었던 것도 사실 자존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육체가 약하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 그 현실을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양궁을 시작한 것도 자존심에서 비롯되었다. 적어도 양궁은 신체 능력보단 집중력이나 평정심 같은 정신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였으니까.

이렇게 자존심이 강한 경선이었기에 센추리라는 가상현실에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지만 현실 같은 세계. 현실 같지만 게임인 세계.

센추리에서라면 그녀도 남자처럼 강해질 수 있었다. 마치 게임처럼 한계 없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센추리에서 무수한 남자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였다.

부족의 남자도, 연합에서 쳐들어오는 남자들도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부족의 추장이자 엄청난 무술 실력을 가진 초연이라는 사내를 이겨 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왕이라는 사내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왕! 이름처럼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녀의 전의와 투지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린 것이었다.

‘그런 괴물 같은 놈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복수를 다짐하던 경선은 대왕의 무력을 생각하자 다시 침울해졌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차이보다 훨씬 큰 간격이 대왕과 그녀 사이에 존재하였다.

그 차이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절망스러울 정도였다.

“영문을 알 수 없구나, 뜬금없는 말들만 하고. 게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앞으로 적당히 하거라.”

경선이 입을 다물자 부친이 답답했는지 그런 말을 하였다. 그러자 경선도 굳이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응, 적당히 할게.”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라.”

부친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씻고서 잠자리에 누우니 자연스럽게 센추리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오늘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그녀는 머릿속에서 ‘대왕’이라는 사내를 지워 내기 위해 애써 다른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쉰 명 정도 쳐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놈이 이겨 냈을까?’

다른 생각 역시 센추리에 관한 생각이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센추리 중독이라고밖에 볼 수 없으리라.

결국 그녀는 1시간이 지나서야 잠에 빠져들었다.

자기 관리를 병적으로 철저히 하던 작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상한 시간은 평소와 똑같았다.

* * *

아침 7시.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잠깐 화장실에 들러 급한 볼일만 해결하고는 곧바로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센추리 중독자답게 아침부터 센추리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갑자기 멍청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이제 막 로그인을 했나 보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 그녀는 한참을 어버버거리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선 상대에게 물었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

괴물 같은 사내, 대왕의 말에 그녀는 경악 어린 얼굴을 하였다.

#귀환하다

“그래도 꽤나 정신력이 강한가 봐, 이렇게 빨리 되돌아오다니? 아주 공포에 질린 기색이라서 후유증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농담이 아니라 호영은 봉영이라는 유저가 센추리 시간으로 최소 열흘 정도는 접속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워낙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여인이었기에 충격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남자도 그 정도의 충격을 받았으면 최소 이틀은 접속을 피했을 터.

그러나 봉영은 현실 시간으로 반나절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이것만 봐도 웬만한 남자들보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언제 공포에 질렸다는 거죠? 왜곡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반말하지 않고 존댓말하는 것도 특이하네.”

격렬하게 반발하는 그녀의 모습에 호영은 그저 웃기만 하였다. 이틀 전에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쓸데없이 야망만 큰 여자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야망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여자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보다 슬슬 준비하지.”

“뭘 준비하라는 거죠?”

“설명을 또 하기는 귀찮은데. 그냥 출정해야 한다는 것만 알아 둬.”

“출정이라니요? 전쟁에서 이겼다면서요.”

“연합과의 전쟁이야 끝났지. 하지만 나는 연합으로 만족하지 못하거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그건 네 부하들에게 물어봐. 이미 다 상의된 이야기니까. 참고로 네 아바타와도 상의했으니 번복하는 일은 없도록 해.”

“…….”

봉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과 관련된 일인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게 진행되었다니 어이없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봉영의 사정이었다. 센추리 유저라면 플레이 시간 정도는 알아서 잘 조정해야 하는 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