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직장이나 학업 때문에 조정이 힘들다면 아바타의 행동 설정을 명확하게 해 놓든지, 아니면 접속하기 전에 대화 로그 같은 정보들을 확인했어야 했다.
결국 무책임하게 로그아웃했다가 로그인한 그녀의 잘못이라는 것.
그렇기에 호영은 더 이상 봉영을 상대하지 않고 출정을 준비하였다. 이제 목동이라는 부족은 완전히 버릴 것이기에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은 역시 견인족을 공격하는 게 좋겠지?’
목동의 여전사들, 즉 봉씨 일족의 여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호영은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어느 수인을 먼저 공격할 것인가.
당연하겠지만 수인족 안에도 여러 종족이 있었다. 인간의 편의상 그들 전체를 수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수인들 사이에서는 동족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견인족이면 견인족, 호인족이면 호인족.
수인들은 서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으로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종족을 먼저 정복하느냐에 따라 잡아들일 수 있는 노예의 수가 달라질 테니까.
‘역시 처음에는 견인족을 정복하는 게 좋겠지?’
고블린처럼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는 견인족.
하지만 견인족은 개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강자로 인식한 상대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굳이 동족이 아니더라도 강자라면 일단 따르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견인족의 우두머리를 보면 호인족이거나 오크인 경우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이 나의 말만 잘 따라 준다면 굳이 노예로 잡지 않아도 되겠어.’
호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당신, 제정신이세요? 수인들과 전쟁이라니요!”
그때 봉영이 아바타의 기록을 확인하였는지 호영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이틀 전에 호영에게서 느꼈던 공포는 확실히 지워 버린 것 같았다.
“왜? 뭐가 문제지?”
“정말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아무리 연합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도 수인들은 달라요! 그놈들은 괴물같이 강하다고요!”
당연히 인간보다 수인이 육체적으로 월등하였다. 그녀의 비유처럼 ‘괴물 같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수인 한 명 한 명이 웬만한 운동선수보다 강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실 수인의 가장 두려운 점은 바로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 사냥에 최적화된 후각 또는 시각.
수인들이 2회 차의 센추리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수렵 사회에서 생존하기에 그들만큼 최적화된 종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무공이 없는 약자들이다.’
무공이라는 힘은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크족이건 마족이건 수인족이건 결국 인간들의 무공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까.
물론 이것은 미래의 일이었지만 호영의 힘은 미래에서 비롯되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벌써 잊은 것 같은데, 너는 그냥 나의 말을 따르면 돼. 이유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다.”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었지만 호영은 그렇게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지시를 내리면 너는 그냥 따르면 된다.’
바로 이 상명하복의 질서를 분명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진짜…….”
봉영이 분기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호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결국 눈을 돌린 것은 그녀였다. 하기야 아무리 멀쩡한 척을 해도 이틀 전에 겪었던 공포를 벌써 잊기는 힘들 것이었다.
“하아, 그럼 이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귀찮게 하는군.”
“수인들을 정복해서 어디에 쓰려는 거죠? 전쟁이란 이득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노예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노예로 만들고서 농사에 쓰건 인부로 쓰건 어디에든 쓰겠지.”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하자 봉영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노동력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그녀의 의문이었다.
확실히, 전투에서 발생할 피해를 생각하면 같은 인간을 공략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인간의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호영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차이는 별로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혼자 싸울 것이니 피해가 발생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봉영이라고 했던가?”
“여기서는 그런 이름을 쓰죠. 근데 그걸 왜 묻죠?”
“너의 아바타는 이미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래서요? 설마 아바타가 했으니 저도 충성을 맹세하라는 건가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나의 부하라는 것은 명심해라. 네 아바타가 선택한 일은 결국 네가 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
호영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여전히 자신이 목동 부족의 이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이미 준기를 비롯하여 목동 부족의 전 부족민과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녀의 아바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족민들과 나눈 이야기는 간단하였는데, 영등포구로 향했던 인원과 목동에 남은 인원이 전부 현리에 소속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목동 부족민 전체가 호영을 지도자로 인정했다는 뜻. 당연히 목동에 속해 있었던 그녀 역시 호영의 수하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부하가 된다면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죠?”
“말했을 텐데, 너의 아바타는 이미 나에게 충성했다고.”
“……듣기로 현리 부족은 투항한 사람에게 관대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 아바타가 항복한다고 했을 때도 분명 어떠한 약속을 했을 텐데요.”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호영은 이미 봉영의 아바타가 원하는 보상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보상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너의 아바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친위대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너뿐만이 아니라 실력이 되는 여전사들까지 모두가.”
“친위대요?”
“현리 부족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부대다. 내년에 있을 정복 전쟁의 주역이 될 부대이기도 하지. 참고로 네가 센추리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친위대에 있으면 웬만한 것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힘이든, 권력이든, 재산이든.”
그 말에 봉영이 눈을 빛냈다. 힘과 권력, 재력 중 하나에 꽂힌 것이리라.
호영은 그런 봉영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가지 중 무언가를 얻으려면 호영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여 나라를 세웠던 유저의 충성이라……. 비록 5회 차 이전에 몰락한 왕국이라지만 어쨌건 여왕을 부하로 둔 셈인가?’
호영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흐뭇한 얼굴을 하였다.
* * *
행동력이 남다른 호영은 곧바로 출정에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목동 부족 인근에 있는 견인족의 부락이었다.
“경계병이 많은데 괜찮은 거 맞겠죠?”
“사냥을 하지 않으니까 경계병이 많을 수밖에.”
수인들에게 있어 겨울은 발정기이자 산란기였다. 사냥이나 채집 활동을 모두 멈추고 오직 본능에만 충실해지는 계절.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은 채 교미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이성을 가진 종족답게 역할을 분담하여 경계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겨울은 부락 간의 약탈이 빈번해지는 시기였다. 수렵 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우두머리가 무능하거나 사냥에 실패한 부락은 식량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식량이 부족한 수인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아주 간단한 수단을 사용한다. 그게 바로 약탈이었다.
워낙 약탈이 빈번하다 보니 그만큼 경계에도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는 여기에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지, 진짜 정신 나갔어요? 어떻게 저걸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 말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는 내 부하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시끄럽고. 고작해야 스무 마리 정도밖에 안 될 텐데 뭐가 걱정이야?”
“견인족이잖아요!”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호영의 답변에 봉영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호영이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호영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해도 수십 명을 혼자서 상대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만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직도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군.’
그는 결코 방심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무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견인족 스무 마리? 맨주먹으로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호영이 경계심을 가져야 할 상대는 그와 같은 인간이었지 결코 수인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나중에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금방 끝날 거니까, 뒷정리할 준비나 해라.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고.”
봉영에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혼자서 견인족의 부락을 향해 걸어갔다.
빠르지도 은밀하지도 않은 평이한 발걸음.
그 모습만 보면 봉영의 속마음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당당한 것일 뿐이었다.
“누구냐, 네놈은!”
당연하겠지만 호영의 모습은 순식간에 발각되었다. 경계를 담당하는 전사만 네 마리였고 호영은 딱히 모습을 감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지?”
“이, 인간? 미친! 인간 따위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내가 물었을 텐데, 우두머리는 어디 있냐고?”
“흥! 인간 따위가 그런 것을 알아서 뭘 하려고!”
한 명이 조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견인 전사들도 비웃는 얼굴을 하였다.
1회 차처럼 가축 신분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은 여전히 약자 중의 약자였다. 적어도 1~2년이 지나야 유저들에 의해 조금씩 인간을 위한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물론 호영이 있음으로 그 시간은 조금 더 빨라지겠지만 말이다.
“우두머리를 죽여야 너희들이 나를 따를 것이 아닌가?”
“뭐? 우두머리를 죽여? 크하하하하!”
“웃기는 인간이다. 너무 웃겨서 죽이기 아까울 정도다! 푸하하하하!”
세상에서 가장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배를 부여잡고 폭소를 터뜨리는 견인 전사들.
그런 견인 전사들을 보며 호영도 마주 웃어 주었다.
‘미친개는 일단 먼지 날 정도로 때려 줘야 말이 통한다지?’
미소를 지우고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호영은 견인 전사들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견인 전사들은 과장스럽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크하하하! 인간, 아주 웃겼다.”
“맞다. 웃겼다. 만약 도망쳤으면 쫓아가지 않았을 정도다. 뭐, 이 자리에 남아서 결국 죽일 수밖에 없지만.”
견인 전사들이 여전히 웃고 떠들며 방심하는 그 순간, 호영이 돌연 지면을 박찼다.
퍽!
“뭐, 뭐야! 쿠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