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 호영이었지만 눈앞의 유저들에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이렇게 협박받은 경험이 얼마나 많았던가? 새삼 조폭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험악한 목소리로 조폭들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를 제대로 아는 게 맞나?”
“뭐라고?”
“네가 현실에서 조폭이든 아니든 여기서는 내가 갑이야. 을도 못 되는 자가 갑에게 거스르고 있다니. 센추리, 다시는 하고 싶지 않나 봐?”
“뭐? 갑과 을? 이 새끼가 돌았나!”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 즉 조직 두목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결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센추리에서 왕이 되고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센추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배자를 적대한다?
지금이야 당당할 수 있어도 언제까지 당당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 센추리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될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이지. 새로운 시대의 최고 권력자라는 뜻이야. 이제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나?”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네, 이거?”
두목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호영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센추리라는 가상현실이 세상의 전부로 착각하는 게임 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새끼들아, 뭘 구경만 하고 있어! 이 미친놈의 새끼 당장 족쳐 버려! 언제 그 개새끼들이 쫓아올지 모르니 빨리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그렇게 호영의 협박은 완전히 무시당하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센추리가 시작된 지 고작 2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
아직까지는 센추리 안에서의 실력이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적어도 1~2년은 지나야 조금씩 통용되기 시작할 터.
“너희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양옆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가뿐하게 피해 낸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조폭이라는 자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크게 의미가 없었다.
서걱! 서걱!
내 것이 되지 못한다면 없애는 수밖에!
“커억!”
“이 새끼가! 으윽.”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공격!
혈맹 소속의 전사들을 단순히 기절시킨 것과 다르게 강북제패 부족을 상대할 때는 자비라는 것이 없었다.
조폭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협박받은 것은 분명 기분 나쁜 일이지만 호영은 고작 그런 일로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호영이 지금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이유야 단순했다. 강북제패 부족에게서는 빼먹을 정보가 없었으니까.
혈맹 같은 경우야 내년에 정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강북제패 부족은 이미 정복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현실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유저들이야 고문을 받으면 접속을 안 하면 그만이다. 결국 강북제패 부족에게서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뜻.
호영으로선 손 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었다.
“시발, 이게 말이 돼?”
어느새 단 한 명, 조직의 두목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눈으로 연신 ‘시발’을 중얼거렸다.
호영의 무력을 본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너 이 새끼, 핵 썼지! 더러운 핵쟁이 새끼야!”
“센추리에 핵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아?”
호영이 조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두목은 살기를 띠며 외쳤다.
“니미, 뒈질 준비나 해라. 네 집 어떻게든 찾아내서 꼭 죽이고 만다, 내가.”
서걱!
마지막까지 살벌한 협박을 내뱉는 두목의 목을 단숨에 베어 낸 호영. 그는 조폭 출신 유저들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며 찝찝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누구인지 들킬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 둬야겠어.’
뜻을 이루기 위해 센추리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 하고 있는데 현실에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만큼 할 수 있는 대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굳이 조폭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애써 찝찝함을 털어 낸 호영은 곧바로 오크족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물론 가기 전에 장훈을 불러 기절한 혈맹 소속의 전사들을 인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혈맹에, 조폭에 오크까지. 오늘 하루 참 다사다난하네.’
호영은 걷는 도중에 돌연 실소를 지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하루가 스펙터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나같이 예상치 못했던 전투였다. 혈맹 소속의 정찰병이 강북제패 부족을 정찰하고 있으리라는 사실과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이 전장에서 도망치리라는 사실은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모두 나쁘진 않았다.
어찌 되었건 강북제패 부족을 무사히 정복하였고 혈맹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생겨난 셈이니까.
덤으로 현실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가질 수 있었고 말이다.
‘이제 오크까지 완전히 몰아낸다면 내가 강북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볼 수 있겠네.’
강북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많은 것을 했지만 아직 해야 할 게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오크족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오크!
터무니없이 강력한 힘을 소유한 종족으로 심지어 수인족과는 다르게 번식력까지 왕성한 편이었다.
친위대라 하더라도 오크족을 상대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터.
2회 차가 되면서 수인족 연합과 거인족의 몰락으로 한반도 남부에서는 크게 쇠락하였지만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여전히 가장 강성한 세력을 보유한 것이 오크족이었다.
당연히 호영으로서도 이 강성한 종족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위협이 되지 않지만 100년이라는 공백기 동안 북쪽의 오크가 언제 남하할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이 직접 움직였다. 친위대가 움직이기에는 피해가 상당할 것이라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저기 있군. 역시 오크족은 찾기가 쉽다니까.’
호영의 추적 실력이 상당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크족 자체가 무슨 행동을 하건 흔적을 크게 남기는 종족이었기에 추적술이 없더라도 오크족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취이익!
취익! 취익!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사냥 길에 나서는 오크 무리.
인간이나 수인이었으면 마물들 때문에라도 조용히 움직였을 텐데 확실히 남다른 종족이었다, 오크는.
호영은 잠시 지켜보다가 오크들을 향해 갑자기 달려들었다.
취이익!
오크들의 경악에 찬 외마디를 내뱉었지만 호영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창을 마구 휘두르며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창이란 본래 찌르기에 특화된 병기지만 호영의 손에 들려 있는 창은 달랐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데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타였다.
끄르륵.
커억.
닿지도 않은 오크가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바람. 호영의 창에서 바람이 생성됐다. 스치기 무섭게 피가 튀기고 뼈가 부러지는 아주 강력한 바람! 무협지에서 ‘검풍’이라 불릴 공격들이었다.
마력에 여유가 생긴 호영의 공격은 이렇게도 무서웠다. 내년이 되어 마력이 더욱 많아진다면 이보다 더 무서워질 터.
‘오랜만에 제대로 힘을 써 보니 기분이 썩 괜찮군.’
여덟 구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호영은 흡족하게 웃었다. 친위대에게 실전 경험을 키워 준다는 이유로 언제나 뒤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호영이었다.
실전을 겪지 않은 지도 몇 달이 지난 상황.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은 꽤나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강북에 오자마자 수없이 많은 피를 보고 있었다.
호영으로선 흡족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크까지 포함해서 벌써 이십에 가까운 숫자를 격살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덜 풀린 기분이랄까.
최소 백. 백 단위는 죽여야 몸이 완전히 풀릴 것 같았다.
“다행히도 오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네.”
호영은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띠며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 * *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장훈의 무뚝뚝한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크가 꽤나 많더군.”
“그렇습니까?”
이틀이나 추장 혼자 전쟁을 치르고 왔는데도 궁금한 것이 없는지 질문 하나 던지지 않았다. 오크족과의 전쟁이 어땠는지를 설명해 주려던 호영으로선 허무하게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장훈에게 내가 뭘 기대했던 거냐? 애초에 유치하게 자랑은 무슨.’
아무리 군주로서 권위적이고 근엄한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해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떻게든 자신의 활약을 과시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추장님! 혼자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때마침 김성근이 찾아오자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김성근이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자랑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친위대장에게 들었을 텐데, 북쪽의 오크를 몰아내고 왔다는 사실을?”
“와, 진짜 오크족이랑 싸우고 왔습니까?”
“그래.”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혼자서 오크족이랑 싸우러 가십니까? 저도 데려가시지.”
“친위대는 수인족과 싸웠잖아. 그리고 너는 아직 오크족이랑 싸울 군번이 아니야.”
“에이! 저도 이제 조금은 합니다. 다른 친위대원들과 비교해 보시면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훈련 교관과 비교하면?”
“……크흠! 그, 교관님과 비교하기는 아직 이릅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같은 병사 중에서는 제가 최고입니다!”
김성근도 꽤나 달라졌다. 윗사람에게 경칭을 붙이는 것도 자연스러워졌고 위계질서에도 어느 정도 순응하게 되었으니.
‘준기가 큰 역할을 했지.’
역시 작년에 준기를 데려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친위대의 실력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김성근을 제대로 훈육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크는 얼마나 죽이셨습니까? 이틀이나 걸린 거 보면 꽤나 죽이신 것 같은데.”
“사백.”
“헐, 사백이나 죽였단 말씀이십니까? 진짜 이건, 와…… 역시 추장님은 엄청나십니다.”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로 이것을 원했다. 존경심으로 가득한 저 눈빛!
재미없는 장훈에게선 결코 받을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더군다나 저 눈빛을 보내는 게 그 김성근이라니. 무려 용연후 김성근인데 말이야.’
오랜만에 피를 봤기 때문일까?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별거 아닌 일에 강렬한 충만감까지 느끼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성적으로도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원재나 현기 앞이라면 무게감 있는 모습만 보여 줘야겠지만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무장’이었다.
무장들 앞에서는 어느 정도 소탈하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여 주어도 괜찮았다. 그래야 거리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니 말이다.
‘물론 병사들 앞에서는 또 다르게 행동해야겠지만.’
상황에 따라, 인물에 따라 행동을 다르게 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라는 것이 피곤한 것이었다.
호영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장훈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