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08화 (108/345)

# 108

호영이 흡족해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중반까지만 관여하고 최근 들어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경쟁자들을 이겨내고 당당히 최고가 되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창술을 보유한 친위대 출신의 유저들과 어마어마한 코인의 투자가 있었다고 해도 상상 이상의 성과였다.

‘이제 현실에서만 자리를 잡으면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야.’

무시 못 하는 것뿐인가? 웬만한 재벌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될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고 말이다.

“추장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와.”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원재의 수하 한 명이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재현으로, 커뮤니티를 담당하는 유저였다.

재현은 살짝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그가 보고할 내용이 낭보보다는 비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보고할 게 뭐지?”

“혈맹에 관한 내용입니다.”

“혈맹?”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맹은 올해 있을 정복 전쟁에서 강북을 점령할 때 가장 경계되는 세력 중 1순위로 손꼽혔다.

부족 규모도 대단하였고 유저 수가 의외로 적지 않은 데다 전쟁으로 단련된 전사가 많은 세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혈맹에 대해 보고할 것이 있던가?’

그렇게 의아함을 드러낼 때 재현이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뮤니티에서 갑자기 게시물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게시물들의 내용은 혈맹이 오크와 손잡고 주변 부족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혈맹이 오크와 손잡았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혈맹이 오크족의 길잡이가 되어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인간들을 학살하였다 합니다.”

재현의 보고에 호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호영뿐만이 아니라 원재와 준기까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순간적으로 재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영은 두 사람보다 빠르게 이성을 추스르고는 물었다.

“주변 부족이라는 게 몇 개의 부족을 말하는 거지?”

“게시물에 올라온 것만 파악하자면 어제부터 오늘까지 네 부족입니다.”

“거의 하루에 하나의 부족을 공격한 셈이군.”

“센추리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복이 아니라 학살이라는 것이 확실하나?”

“예, 유저들 모두가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항복을 해도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답니다. 그리고 몇몇 유저는 혈맹 소속의 전사들이 식인 하는 모습을 봤다고도…….”

“……!”

“시, 식인?”

준기가 식겁한 얼굴을 하였다. 원재 역시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드러냈다. 오직 호영만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였다.

‘사이코패스라더니. 진짜 가지가지하는구나.’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의 속내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를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혈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한다는 것이네. 아니, 학살과 식인이 목적인 건가?”

그 말에 원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들의 목적보단 오크들과 동맹했다는 사실을 가장 주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크라……. 그것도 그렇군. 대화도 안 통할 텐데 어떻게 동맹이 가능했을까?”

그건 호영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크족이 인간과 동맹을 하다니. 회귀 전에도 한국에서 오크족과 동맹을 맺은 사례는 없었었다.

아인종에게 관대한 외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의문은 들었지만 결국 호영이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였다. 혈맹의 행사를 막아 내는 것!

“신속하게 출정을 준비해야겠다. 안 그래도 왕국을 세울 인구가 부족한데 혈맹이 인간을 학살하게 나둘 수는 없어.”

영웅심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강북, 아니 서울 전역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그의 부족민이라 할 수 있는 법. 지금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자신의 부족민이 될 인간들이었다.

결국 자신의 부족민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혈맹의 행사를 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정보 팀을 풀가동하여 혈맹에 관한 모든 것을 찾아내겠습니다.”

“저 역시 친위대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이런 호영의 뜻에 원재와 준기도 동참하였다.

그렇게 올해의 정복 전쟁은 처음 계획했던 날짜보다 2개월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 * *

이틀이 지나자 호영은 작년 겨울에 모집한 친위대를 이끌고 강북에 상륙하였다. 혈맹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곁에는 현기도 함께하고 있었다.

“역시 숫자가 많으니 좋군요.”

돌연 현기가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유저들 말입니다. 숫자가 늘어나니, 센추리의 여론이 우리에게 유리해지지 않았습니까? 작년에 정복 전쟁을 했을 때는 유저들의 시기와 질투심으로 온갖 비난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2분기에 있었던 정복 전쟁에서 현리는 무려 서른 곳이 넘는 부족을 정복하였다. 인구로 따지면 8천에 가까운 숫자였다.

서른 곳이 넘는 부족을 점령했으니 현리의 정복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피해를 봤다고 볼 수 있었다. 부족 하나당 유저가 최소 한두 명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유저들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현리를 대상으로 악의적인 선동을 하였다.

현리는 제국주의자에 독재자며 악의 축이라는 선동이었다.

물론 이같은 선동에 가담한 무리 안에는 현리의 확장을 두려워 한 강남, 강북 지역의 실력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초보자의 섬에서 활동하는 유저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한때는 센추리 유저 전체가 나를 욕하는 기분이었었지. 실제로 부족 내부에서 나를 욕했던 유저도 있었었고.’

현리 내부에서 유저들이 반란 모의까지 하였던 것은 바로 그같은 여론이 있어서였다. 그때의 현리는 정말 악의 축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올해의 정복 전쟁은 달랐다. 현리 부족이 또다시 정복 전쟁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저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몇몇 유저는 현리가 아예 한국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응까지 보였다. 작년과는 정반대의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유저들보다는 절대 악의 출현 때문에 여론이 좋아진 것이 아닐까? 혈맹이 혐오스러운 짓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호영은 아군이 늘어났다는 이유로 여론이 좋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군 덕분이라기보다는 혈맹이라는 세력의 악랄함에 득을 본 경우라고 생각했다.

“뭐, 어쩌다 보니 악당을 물리치는 히어로 역할을 맡기는 했죠. 하지만 그보다는 초보자의 섬에 있는 대한 길드의 힘이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한 길드에 소속된 길드원만 천 명이 넘으니까요. 물론, 이런 것을 따지는 것도 크게 의미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자 호영도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혈맹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뿐이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장님께서는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혈맹을 흡수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묻는 것인가?”

“예, 추장님이 직접 나서는 전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까지 나섰고요. 흠흠! 물론 지금의 상황에서 제가 나서는 것이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어쨌든, 총력전이니 너무 오래 걸리면 손해가 큽니다.”

아무래도 부족에서 할 일이 많은 현기다 보니 이번 정복 전쟁에서 소요되는 시간이 아까운 것 같았다.

“이동속도가 곧 정복 속도라고 보면 된다.”

그런 현기를 향해 호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즉시 정복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오만함에 가까울 정도의 자신감이었지만 현기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호영의 무력이라면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리라.

“저는 그럼 정복 이후에 해야 할 것들을 지금부터 생각해 둬야겠군요. 이를 테면 왕국의 수도라든가.”

“왕국의 수도?”

“예, 물론 3회 차가 되면 서울이 수도가 되겠지만 아직은 부족의 규모가 작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수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요.”

“현리가 아닌 다른 곳에다 수도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크게 이점이 없는 위치이지 않습니까? 서울 시청은 강북에 있고 유저 수가 많은 곳은 강남입니다. 그에 비해 강서는 유저 수도 적고 지형적인 이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서에 살고 있지. 현실에서도 센추리에서도. 그리고 부족의 기반 시설들이 강서에 밀집되어 있어.”

사실 그 역시 강서보다는 강북이나 강남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유저 수는 그쪽이 더 많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2회 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것이고 100년의 공백기 동안 수도는 서울 전체로 확장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굳이 멀쩡한 수도를 옮겨 행정적인 소모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흠, 하긴 그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이기는 하겠네요. 그러나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반대로?”

“기반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토착 세력의 힘이 강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요.”

“수도를 옮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군.”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가까스로 회생하고 있는 일족들을 다시 몰아붙이겠다는 건가? 자신도 이씨 일족이면서 참으로 냉정하군.’

현기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보다는 일족을 위했고, 일족보다는 부족을 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수도를 옮긴다면 현리에 기반을 둔 이씨 일족은 기득권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재력에서 나오기도 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현기는 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일족의 입장에서는 손해겠지만 부족 전체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어서였다.

호영으로선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하는 현기의 행동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수도는 정복 전쟁을 끝난 이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 강남이나 강북의 상황이 정확히 어떤지를 아직 모르니 말이야.”

“추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수도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제가 할 일이 없어지겠는데요?”

“군사잖아? 전략이나 작전을 생각해야지.”

“하지만 친위대의 전투에 작전은 크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혈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추측해 봐. 나는 솔직히 말해서 도저히 모르겠거든.”

현실 시간으로 사흘 전부터 혈맹은 주변 부족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있었다. 어떠한 명분도, 이득도 없는 무의미한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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