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덕분에 우리의 이미지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지.’
혈맹의 목적을 알 수 없었기에 찝찝함을 느끼는 호영이었다. 대가없는 선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영을 보며 현기는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건, 백 가지 이상의 대응책을 구상해 놓겠습니다.”
호영은 그제야 찝찝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혈맹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기가 있는 한, 호영이 손해 볼 일은 없으리라.
* * *
친위대의 진격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길을 개척해 놓은 덕분이었는데, 정찰병을 보내지 않아도 되어서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다.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적대 부족’의 영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상인들도 진출하지 못한 미지의 땅이었다.
언제 무엇이 등장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하지만 호영은 친위대의 이동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정찰만 몇 명 보낸 채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는 숫자만 삼백이었다. 마물들이 조심했으면 조심했지 친위대가 조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빠른 이동속도를 유지한 채로 2시간쯤 지나자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이 근방을 지배하는 부족의 전사들 같았다.
“평소처럼 항복을 권유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저들은 우리의 적이다.”
장훈이 무뚝뚝한 어조로 사람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면 되겠냐고 묻자 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인들이 이곳을 진출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 근방의 부족들이 모두 외부에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감한 상인 유저 몇몇이 교역을 시도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일방적인 공격뿐이었다. 결국 이 근방의 부족들은 현리와 적대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할 필요가 없었다. 상인을 죽인 수인족의 최후처럼 이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시간을 길게 끌 필요는 없다. 감히 우리와의 교역을 거부하고 상인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였던 자들이다. 관용은 필요 없으니 단숨에 쓸어버려라.”
눈앞의 무리를 향해 호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친위대는 작년에 있었던 전쟁보다 몇 배는 더 과격하게 움직였는데, 근방에서 제법 세력을 떨쳤던 정읍이라는 이름의 부족은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친위대의 진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읍 부족을 이웃으로 둔 근방의 부족들을 단 하루 만에 모조리 점령한 것이었다.
다 합해서 여섯 개의 부족이었다.
‘너무 쉬워. 왜 아무런 방해가 없지?’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호영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였다.
혈맹의 본거지는 현실로 따지면 서울 시청 근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위대가 마지막으로 점령한 곳은 신촌 근처였다.
만약 적들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현리의 진격을 어떻게든 방해했을 것이다. 혈맹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5킬로미터 이내의 거리는 충분히 오갈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섯 개의 부족을 점령하는 동안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 혈맹은 물론 혈맹의 동맹이라 알려진 오크조차 등장한 적이 없었다.
마치 방어를 포기한 것처럼 반응이 없다는 것이었다.
팔짱을 낀 채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호영의 곁으로 현기가 다가왔다. 그는 호영과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이면 혈맹과 마주할 수 있겠네요.”
“지금 같은 이동속도라면 저녁이 되기 전에 그들의 본거지에 도착할 거다.”
“혈맹만 잡는다면 강북을 점령한 것과 다름없으니 내일은 강북을 점령한 날이 되겠군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현기의 말에 호영은 찜찜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였다.
“불안하십니까?”
“너무 반응이 없어. 우리가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세 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하나는 병력들을 우회시켜 마포현을 공격하는 것. 뭐, 일종의 엘리전이라고 볼 수 있죠. 또 하나는 세력을 끌어모아 자신의 본거지 근처에서 대회전을 준비하는 것. 이건 오크들이 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바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명한 방법이죠.”
찜찜해하는 호영을 향해 현기는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현기는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음직하기는 한데, 왠지 이번에는 현기가 틀렸을 것 같네.’
불안감이 여전했다. 호영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 로그아웃 하였다. 피로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혹시 로그아웃을 하는 동안 야간 습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야간에도 잠잠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 호영과 친위대는 지체 없이 진격에 나섰다. 여섯 마을의 부족민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 다음 친위대 스무 명이 경비하기로 하였으니 진군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부터가 혈맹의 세력권인데…….”
매복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니 마침내 혈맹의 세력권이라 알려진 곳에 도착하였다. 어제 여섯 개의 부족을 점령하면서 알게 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혈맹의 세력권에 들어섰음에도 친위대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생동물의 포효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따름이었다.
“우리를 막을 생각이 없는 것인가?”
“……정말 모르겠군요. 혈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안 되겠다. 나 먼저 가 봐야겠어.”
뭔가 찜찜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간파한 호영은 결국 혼자서 행동하기로 결심하였다.
“혈맹의 본거지를 혼자 쳐들어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왠지 불안하거든.”
“하지만 함정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함정이었으면 좋겠군.”
그는 차라리 함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최악의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라면 힘으로 깨부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만약 혈맹의 목적이 내가 아닌 다른 것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포라 부를 수 있는 무력을 지녔으니 자신이 직접 나서서 불안감을 해소할 생각이었다.
“갔다 온다.”
“추장님의 목숨에 현리 전체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언제나 명심하고 있으니 걱정 마라.”
호영은 그 말을 하고선 곧바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목표는 동쪽, 혈맹의 본거지라 알려진 곳이었다.
“이 냄새는 설마……?”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호영은 거대한 목책을 발견하였다. 최소 1천 명 이상의 인구가 상주하고 있을 거대한 목책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목책 안에 들어서자 인상을 찡그렸다. 함정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체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살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냄새가 날 정도라니. 시체를 수습하지 않은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부락에 시체를 그대로 방치할 수가 있지?’
저벅저벅.
냄새가 고약하였지만 호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그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적이 보이지 않았다. 부락의 중심부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현기의 예상대로 부락을 버리고 도망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골치 아프겠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는 이상 호영의 기동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고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건 호영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도망친 것이 아닌데도 인적이 없고 시체 썩은 내만 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미친.”
호영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설마 설마 했더니 호영의 예상이 적중하였다. 부락의 중심부. 그곳에 엄청난 양의 시체가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다.
적어도 천구는 넘어 보이는 시체였다.
“미쳤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내 얘기를 하는 거야?”
혼잣말을 하던 호영은 조그만 집에서 갑자기 등장한 사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무척이나 흉측한 외모의 사내였다.
나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얼굴 곳곳에 반점 같은 것이 있었고 눈썹은 다 빠져 있었다. 입가에 혈흔 자국이 있는 것이 토혈도 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죽기 직전의 환자였다. 하지만 호영은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꺼림칙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네놈은?”
“크크, 웃기는 놈이네. 손님이 주인에게 누군지를 묻는 거야? 너야말로 누군데? 아! 알 것 같다. 너, 현리 추장이지?”
“…….”
사내는 혼자 물어보고 혼자 대답하더니 이내 환희를 지으며 말했다.
“맞나 보네! 크크크! 잘 왔어. 내가 너 오기만을 기다렸었거든.”
“……나를 기다렸다고?”
“그냥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었어. 내가 다음 회 차에 죽일 놈이니까. 크크크!”
섬뜩하게 살인을 거론하며 미친 듯이 웃는 사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그 사이코패스인 건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혈맹의 맹주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호영은 상대가 혈맹의 수장이라는 가정하에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짓을 한 것이지? 너의 부족민이 아닌가?”
“빼앗길 바에야 없애는 게 낫잖아. 당연한 걸 물어, 왜?”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너를 따르는 부족민을 학살한 것인가? 부족민을 나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미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부족민을 학살하다니. 복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부족을 대피시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호영에게나 그에게나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였다.
“크크, 고작이라고? 애초에 네가 나의 세계를 빼앗으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게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다!”
“…….”
갑작스럽게 분노를 토해 내는 사내를 보며 호영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호영은 그저 멍하니 사내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래, 너의 잘못은 아니지. 힘이 있으니까! 잘못은 힘이 없던 나에게 있어! 맞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내 것을 주고 싶지 않았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너무 짜증 나니까. 그래서 내 것을 죽였지. 아무도 못 갖게끔! 이렇게 해야 네가 가장 짜증 날 것 같았거든. 맞지? 내가 부족민들을 죽이니 너도 짜증 나지?”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했다가, 환희에 찬 얼굴을 했다가 이제는 자문자답을 하며 오락가락하게 떠들어 대는 사내.
호영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사내의 말처럼 천 명이 넘는 인구가 학살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호영으로선 뼈아프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인구가 부족한 시대였다. 강서 지역은 그래도 현리가 있어 인간의 숫자가 적지 않았지만 서울의 다른 지역은 인구가 무척이나 적었다.
마포현을 제외하고 강북에 남아 있는 인구를 다 합해 봐야 1만 정도일까? 물론 수인들까지 포함한다면 2만이 넘을 수 있겠지만 솔직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