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12화 (112/345)

# 112

* * *

오랜만에 현리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방을 전전하며 마을의 행정 체계를 세운 봉영부터 경비대장으로서 현리 외각을 수호하던 봉성까지.

업무 때문에 평소에는 잘 모이지 않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모이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추장의 명령. 즉, 전장에 나가 있던 그들의 지도자가 되돌아온 것이었다.

“모두 오랜만이군.”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아직까지 호영에게 충성 맹세를 하지 않은 봉영 같은 경우는 매우 어색해하였지만 대부분의 간부들은 진심을 다해 호영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호영의 승리란 현리 부족의 영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호영이 싱긋 웃으며 그들의 축하 인사를 받아 주고는 특유의 굵은 저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제 왕국을 건설할 때가 왔다.”

“오오!”

“드디어 왕국을 건설하는 겁니까!”

“기다렸습니다, 추장님.”

호영의 묵직한 한마디에 나름대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간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왕국 건설! 그것은 호영만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간부들 역시 건국이라는 대업을 고대하고 있었다.

유저들이야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며 건국을 희망하였던 것이었고, NPC들은 새로운 통치 제도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며 건국을 기대하였었다.

아마 부족민들 역시 진정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 왕국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현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왕국 건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나를 추장이 아닌 왕이라고 불러라. 호칭은 전하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전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NPC 간부들로선 어색할 수 있었지만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전하라는 단어가 낯설지만은 않았기에 곧바로 호영을 전하라고 불렀다.

호영은 ‘전하’라는 호칭에 잠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왕국의 수도는 이곳, 현리로 정했다.”

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지만 호영은 결국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현리를 수도로 지정하였다.

강북이 수도로 삼기에 적격일 수 있었지만 혈맹과 오크족의 난동으로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수도는 위치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현리, 즉 강서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왕국의 이름은 바로 ‘대한’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몇몇 간부들의 얼굴에서 ‘희열감’이 스쳐 지나갔다. 준기와 원재 그리고 봉영과 은규 같은 유저들이었다.

대한국!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익숙할 수밖에 없는 국명이었다. 이곳에 있는 유저들 모두가 대한민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센추리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였으니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호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 센추리에 한국이라는 국명을 가진 나라는 무척이나 많았지만 끝까지 생존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6회 차부터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국명으로 인식될 정도로 멸망을 거듭하였으니 호영의 입장에서도 뜻깊은 국명이 아닐 수 없었다.

“건국식은 추수가 시작되기 전, 모든 마을의 촌장들과 우호적인 부족의 추장들을 초대하여 진행할 것이다.”

“수인족도 건국식에 참여합니까?”

“당연하다! 수인족도 대한국의 백성이다!”

수인들 역시 개국공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정복 전쟁을 할 때 피를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었을 터.

또한 상인들이 이토록 활발하게 교역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호영으로선 수인들을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대우해 줘야겠지. 견인족 같은 경우는 대다수의 인간들보다 충성심이 강하니까.’

호인족이나 묘인족 같은 경우에도 나름의 쓸모가 있었고 말이다.

어찌 되었건 호영은 그 뒤로도 건국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전부 현기와 미리 상의했던 내용들로 절차나 의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건국식 때 참석할 외부 인사들에 관해 설명한 호영은 그대로 회의를 파하였다.

간부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물러났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았다. 집무실에 남은 사람은 현기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그냥 조금 귀찮았을 뿐인데 수고까지야.”

호영은 수고했다는 현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로 임명할 사람을 모두 정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모든 간부들이 주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바로 기사 작위였다. 그 기사 작위를 누구에게 임명할지를 정했다는 것은 1등 공신이 누구인지 정해졌다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다.

“정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누구에게 하사할지를 저도 알 수 있겠습니까?

불손하다고 볼 수 있는 언사였다. 민감한 문제를 물어봤다는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말을 하는 현기나 그 말을 듣는 호영이나 크게 개의치 않아 하였다.

언젠가부터 호영과 현기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딱딱한 주종 관계가 아닌 신념을 공유하는 동지 같은 관계가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주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군사, 감찰관, 친위대장, 보급관 그리고 행정관. 이 사람들이 기사 작위를 받게 될 거다.”

현기는 자신의 직함이 불렸음에도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였다. 그 역시 자신이 기사 작위를 받게 될 것임을 예상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일부로 3:2로 맞추신 것입니까?”

“뭐가 3:2라는 거지?”

“NPC와 유저 비율 말입니다.”

공식적으로 현기는 NPC로 알려져 있었다. 원재나 준기를 제외하고는 현기가 유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작위 대상자는 유저가 두 명, NPC가 세 명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현기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유저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쓴 것은 오직 공적뿐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훈련대장에게는 결국 기사 작위를 하사하지 않는 겁니까?”

“훈련대장은 공적으로 따지면 6위다.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지.”

“흐음…… 그렇다면 조금 걱정인데요. 훈련대장은 사실상 친위대 병사들의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1회 차 때부터 전하와 함께했던 사이이기도 하고. 훈련대장이 불만을 품기라도 한다면 왕국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 훈련대장은, 준기는 절대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저도 훈련대장의 충성심은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배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아바타는 또 다르지 않습니까?”

“…….”

호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곡을 찌른 것처럼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바타와 유저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비록 유저가 충성한다 해도 그 아바타까지 충성하라는 법은 없었다.

특히 훈련대장, 즉 홍준기의 아바타는 초씨 일족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초씨 일족은 한때 현리의 추장이었으나 마법사들에 의해 부족에서 버림받게 된 일족이었다.

당연히 초씨 일족의 수장이었던 초연도 현리에 대한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거의 다 몰살당한 상황이라 해도 말이다.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기는 하지.’

그렇기에 현기의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왕국에서 두 번째로 무력이 강하고 친위대 병사들이 스승으로 따르는 이의 반란은 왕국 전체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테니까.

하지만 호영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사실 대비책을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회 차 때도 이미 겪어 봤고 회귀 전에는 더욱 많이 겪어 본 일이었다.

그는 경험이 많은 만큼 다른 유저들보다 훨씬 세련되고 효과적인 수단을 알고 있었다.

“훈련대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

“어떤 생각요?”

“1회 차의 유저들을 상대로 이미 했던 방법이다.”

“1회 차 때라면……. 아, 왠지 알 것 같군요.”

현기는 호영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1회 차도 경험해 보지 않은 주제에 천재적인 머리로 호영의 생각을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호영은 그런 현기의 천재성에 살짝 부러움을 느꼈지만 티는 내지 않은 채 말했다.

“알았으면 너도 아바타를 잘 관리해. 솔직히 훈련대장보다 이씨 가문에 군사에 기사 작위까지 가진 네 아바타가 더 위협적이니까.”

“물론입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는데도 그런 사태가 벌어지게 만들 수는 없죠. 앞으로 이씨 일족, 아니 이씨 가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가 변치 않은 충신 가문으로 만들 것이니 말입니다.”

호영은 현기의 다짐에 나름 안심하였다. 회귀 전에서도 이씨 가문은 군주를 향해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물론 중간에 나라가 바뀐 적도 있었고 마지막에는 신라 왕국으로 반쯤 넘어갔지만 적어도 먼저 배신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믿어 봐도 될 것 같았다.

‘이씨 가문만 배신하지 않는다면 내 왕위가 흔들릴 일은 거의 없을 것이야.’

* * *

센추리에서 한창 건국식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현실에서는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물론 호영의 결혼식은 아니었다.

그가 아닌 그의 친누나, 송효주의 결혼식이었다.

‘어색하군.’

호영은 하객들을 안내하던 도중 갑자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금 입고 있는 밝은 색의 정장도 하객을 안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친누나의 결혼식을 무려 두 번째로 겪는 그가 낯설다는 이유로 어색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긴장감으로 가득해야 할 그의 일상에 평온이 찾아온 게 어색할 따름이었다.

‘역시 나에게는 야만의 세계가 익숙하다는 건가.’

그렇게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준기였다.

“어, 왔어?”

“안녕하세요, 호영 오빠.”

“저도 왔습니다, 팀장님.”

원재와 준기 그리고 준기의 동생인 지영까지, 센추리에서 맺어진 인연이 호영을 찾아왔다. 호영은 그들을 보는 순간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온 기분을 느꼈다.

‘역시 나는 진성 폐인이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만이 가득하였다.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세 사람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양복이 잘 어울리십니다, 형님.”

“너는 왠지 어색한데?”

“하하하, 저는 사실 양복을 이번에 처음 입어 봤습니다.”

“내가 좋은 경험을 시켜 줬네. 그나저나 지영이도 올 줄은 몰랐다.”

“왜, 제가 오니까 싫으세요?”

지영이 새치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호영은 피식 웃었다.

“싫다기보다는 신기해서. 준기보다 더한 폐인이잖아? 오늘도 집구석에 박혀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거든요! 저도 나름 외부 활동을 하는 사람인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적어도 오빠들처럼 센추리를 직장 취급하지는 않거든요.”

호영뿐만이 아니라 원재와 준기까지 싸잡아 공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빠들’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폐인끼리 서로를 나무라는 상황이 우스웠던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가 더 폐인이다.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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