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13화 (113/345)

# 113

“흥. 저기 하객들 오시는 것 같은데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영의 그 말에 호영은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새로 입장한 하객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뒤에 찾아온 하객들 역시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송호영이!”

“진짜, 얼굴 보기 힘드네. 송 노예 시절보다 만나기가 힘드냐, 어떻게.”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동창들로 호영과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봐서 좋잖아? 일단 가자. 앉아서들 대화 나눠.”

준기 일행을 안내했던 것처럼 네 명의 친구를 자리로 안내해 주는 호영.

“효주 누나가 드디어 결혼을 하는구나.”

“정승호, 너 예전에 효주 누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

“뭐, 뭔 개소리야!”

“새끼, 진짜 좋아했나 보네. 크크, 누나가 예쁘긴 했지.”

호영은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긴, 이놈들은 회귀 직전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들만 봐도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평생 간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호영이는 요즘 뭐 하냐?”

“나? 센추리라고, 가상현실 게임 하고 있다.”

“오오, 진짜?”

“나도 센추리 들어 봤는데. 그거 장난 아니라며? 리얼리티 죽인다는데.”

호영이 센추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요란법석을 떠는 친구들이었다.

그만큼 최근 들어 센추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 친구 모두가 요란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호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승호가 정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 자식, 나와는 사업 하자더니 게임을 하고 있냐. 돈 벌겠다며?”

갑작스러운 승호의 말에 호영은 쓰게 웃었다. 센추리를 하겠다고 승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미안한 감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회귀 전에도 본의 아니게 민폐를 부렸었고 말이다.

하지만 쓴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호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센추리를 하는 거다. 센추리가 돈이 되거든. 그것도 엄청나게.”

“뭐? 진짜?”

돈이 된다는 말에 네 사람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돈에 대한 압박이 없을 수는 없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리고 이곳에 금수저는커녕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축의금 내는 것조차 부담을 느꼈을 정도니 더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온라인 게임들처럼 아이템 팔아서 돈 버는 건가?”

“그런 경우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거대 길드에서 요직에 있거든. 아무것도 안 해도 벌이가 쏠쏠해.”

“와, 개 꿀 빠네.”

호영은 굳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친구들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필요 이상의 설명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 길드를 소개해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친구들을 굳이 본 게임에 불러들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센추리를 시작하게 만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어차피 초보자의 섬에 있는 대한 길드가 그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센추리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나는 또 하객들을 안내하러 가야 되니까.”

“그래, 결혼식 끝나고 한잔하자.”

그렇게 친구들과 짧게 대화를 나눈 호영은 그 후로도 새로 들어오는 하객들을 마중해서 자리로 안내하였다.

대략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사회자가 좌석을 정돈시키고 개식을 선언하였다. 결혼식이 시작된 것이다.

효주의 결혼식은 회귀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이 진행되었다. 신랑 신부의 어머니들이 촛불을 켜고 단상에 나와 하객들에게 인사하였다.

그 뒤로는 신랑이 입장하였다. 누나보다 두 살 어리고 호영과는 동갑인 신랑이었다. 훤칠하고 남자다운 외모의 매형.

하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누나인 효주가 입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천생연분이라며 행복하게 살라며, 여기저기서 떠들어 댔다.

호영은 누나와 매형이 주례 앞에서 혼인 서약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나도 이번 삶에서는 결혼을 할 수 있으려나.’

센추리에서야 수없이 많은 배우자를 만났었다.

지금 그의 아바타인 ‘대왕’도 무려 여섯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안 하고 있었다.

회귀 전까지 포함시킨다면 현실에서 여자를 안 만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상황. 성욕이야 센추리에서 해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호영도 가끔은 외롭거나 공허함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누군가의 결혼식을 지켜볼 때면 그런 기분은 절정에 달했다.

‘웃기는군. 조금 여유가 생겼다고 결혼 생각이라니.’

하지만 호영은 이내 픽,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선 앞만 보고 달려도 시간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연애나 결혼은 확고부동한 기반을 만든 이후에나 관심을 둬야 할 영역.

호영은 ‘쓸데없는’ 생각을 애써 지워 내고는 누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나흘이 지나자 효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이 돈 뭐야?”

다짜고짜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하는 호영의 누나, 송효주. 하지만 호영은 누나의 추궁에도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신혼여행은 잘 갔다 왔어?”

“그보다 내 계좌에 보낸 돈 뭐냐니까?”

“뭐긴 뭐야. 축의금이지.”

“축의금이라고? 아니, 축의금이 무슨 1억이나 해? 돈은 어디서 났는데?”

“주식으로.”

“…….”

“별거 아니야. 그냥 축의금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마음 쓰지는 마.”

“1억이 별거 아니라니. 나 참, 이거 진짜 받아도 되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여유가 있으니까 축의금을 줬겠지.”

“……그래?”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부족하면 언제든 말해. 나, 여유 있으니까.”

“……고맙다.”

눈물을 참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효주.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호영의 귓가로 효주의 흐느끼는 음성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통화를 끊은 호영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더 고맙지, 누나에게는.”

부모님들의 부부 싸움으로 가족에게 환멸을 느꼈을 때 효주만은 호영의 곁에서 가족애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었다.

회귀 직전에도 마찬가지. 그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발 벗고 도와주었었다. 사람이라면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싶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어차피 누나의 성격으로 볼 때 1억을 다 쓰기까지 한참 걸릴 것이니 말이야.’

호영은 효주의 성격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짠순이에 구두쇠인 효주였다. 돈을 더 주고 싶어도 그녀의 알뜰함을 생각하면 더 주어 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이번 삶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사치를 부려도 될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사람의 성격이 그리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 * *

추수 직전이 되자 예정대로 건국식이 진행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부족들이 왕국의 수도, 현리로 모여들었고 부천이나 인천, 광명 쪽에 위치한 부족들도 공물을 든 채 현리를 찾았다.

스물아홉 개의 마을에서도 촌장들이 상경하여 건국식을 빛내주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원이 집결한 건국식이었다. 하지만 성대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즉위식과 건국식, 그리고 봉토 수여식 및 작위 수여식 같은 거창한 행사가 줄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검소하게 진행되었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대한국의 군주, 호영이 효율을 극도로 강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의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리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호영은 자신의 국가가 의전보다는 내실에 충실한 나라가 되었으면 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사치도 부리고 싶고 백성들이 자부심 느낄 수 있도록 화려한 행사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국력이었다.

국력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사치를 부리는 것은 나를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먼 훗날, 제국이 되어 만방에 위엄을 떨칠 때가 아닌 이상 호영은 내실에만 충실할 생각이었다.

“대왕 전하, 이제 전하께서 개국 선언을 하실 시간입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호영은 현기의 말에 정신을 일깨웠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단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3년 전만 해도 곧 무너질 것 같은 목책이 세워져 있던 장소. 지금은 변화를 거듭하여 거대한 광장이 되어 있었다.

호영은 가슴속에서 묘한 감회가 샘솟는 것을 느끼며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1회 차 때부터 자신을 따라 주었던 원재나 준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고 그 뒤로 현기나 은규, 김성근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소속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수많은 얼굴들도 호영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 호영을 따르거나 대한국의 비호를 받는 부족의 추장들이었다. 그 뒤로도 수백 수천 명의 백성들이 보였다.

‘내가 진짜 왕이 되었구나. 이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지지하는 왕이 되었어.’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격동에 차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보면 이 순간만을 위해 그렇게 달려온 것일 지도 모른다. 만인에게 인정받는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달려왔다는 것이다.

고대하고 또 고대하였던 목적을 이루었다는 생각에서인지 호영은 잠시 동안 격동에 휩싸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개국을 선언하는 중요한 시간에 언제까지 멍하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그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어 ‘자랑스러운’으로 시작되는 개국 선언문을 읊어 댔다.

개국 선언문에는 호영 그 자신이 세운 위업과 앞으로는 종족과 관계없이 진정한 통합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다섯 명의 기사가 세운 업적에 대한 설명도 있었고 고조선의 팔조법처럼 선대에서부터 내려져 오는 법규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하지만 호영은 자신이 개국 선언문을 읽었으면서도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그가 고작 연설하는 것에 극도로 긴장하였던 것이었다.

‘한심하군. 이런 일에 긴장하다니.’

선언이 끝나자 호영은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

그때 개국식에 참여했던 귀빈들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를 질렀다. 어떤 이는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호영의 연설에 감명받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돌연 뼈창을 번쩍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창에 ‘마나’를 가득 담았다.

우우웅!

예고되지 않은 그 행동에 귀빈들과 경비를 맡은 친위대원들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이내 경악하였다.

광채! 호영의 뼈창에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나 사용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신비롭고 눈부신 광채였다.

“저, 저게 뭐지?”

“검강인가? 와! 무협지네, 진짜.”

“세상에! 하늘이시여! 대한의 왕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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