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명회’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명회는 옴팍한 눈에 왜소한 체구를 가졌는데 현재 호영의 아바타 ‘대진’의 비서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즉, 호영의 최측근이라는 것이었다.
‘최측근이긴 한데, 속을 알 수 없는 자야. 경계할 필요가 있어.’
센추리 시간으로 사흘 동안 지켜본 결과, 눈앞의 사내는 무척이나 의뭉스러운 사내였다. 대진은 그저 유능한 비서라고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호영의 눈에는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꿍꿍이를 담고 있다고나 할까? 충구에게서 ‘군사부’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수상하게 느껴졌다. 대진을 진짜 주군이라 생각한다면 군사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명회를 수상히 여기면서도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적이라면 일단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전하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바마마가?”
“예, 전하께서 왕궁으로 입궐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왕의 호출에 호영은 잠시 당혹해 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바타와 동기화하자마자 왕이 호출하다니.
솔직히 말해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대진’을 완벽히 연기할 자신도 없었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지.’
무려 왕의 호출이었다. 이유도 없이 거절한다면 제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언제까지 가면 되겠느냐?”
“조회를 하고 있을 것이니 지금 바로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호영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지금 바로 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명색에 수도의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자신이 조회에도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호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바타가 지금까지 받았던 대우쯤이야 앞으로 개선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는 대진이 아닌 호영이었으니 말이다.
* * *
대한국의 왕궁은 그다지 호화롭지 않았다. 아니, 호화롭기는커녕 투박한 모습이었다. 2회 차에 있었던 내성의 성벽을 조금 더 높이고는 왕궁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실용적이네. 성벽도 성벽이지만 궁궐 안에 들어와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무기고와 병영이라니.’
건국왕이었던 자신의 유지가 아직 이어진다는 의미일까? 국력이 상승했으면서도 여전히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호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왕궁의 중심부에 있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수도 방위군 대장, 대진 왕자 저하께서 입궐하셨습니다!”
친위대 소속의 근위병이 호영을 보자 그렇게 외쳤다. 호영은 잠깐 어색함을 느꼈지만 이내 당당하게 중앙으로 걸어갔다.
“콜록콜록! 왔느냐?”
힘없고 병약한 목소리. 바로 노왕의 목소리였다.
“예. 소자가 왔습니다, 아바마마!”
호영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전하’가 아닌 ‘아바마마’라 부르며 말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적대적인 시선들이 꽂혀 왔다.
“에잉, 버르장머리 없는 것.”
“아바마마라니. 이 왕자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시선만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흉을 보고 있었다. 예의 없다느니, 불경하다느니 좋지 않은 소리들을 지껄이며 말이다.
누가 들으면 진짜 무엄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생각보다 평이 나쁜 것 같군. 저 정도면 불신하는 수준을 넘어 대놓고 경계하는 수준인데? 그나마 젊은 애들은 좋게 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단순히 예의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느껴서일까. 중년 이상의 왕족들은 하나같이 호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영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서 노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소자를 부르셨습니까?”
“일단 너의 자리에 가 있어라.”
길게 말하는 것도 어려운 것인지 노왕은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왕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저긴가?’
왕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이자 호영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걸어갔다.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 위치를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수도 방위군 대장을 조회에 부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세자야.”
“예, 전하.”
노왕의 부름에 호영의 바로 옆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대향!
이자가 바로 왕과 왕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왕세자 대향이었다.
‘대리청정할 준비를 하고 있다더니 진짜였나 보군.’
조회에서 왕을 대신한다는 것부터가 대리청정이라 할 수 있었다. 호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향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였다.
그때, 대향의 시선이 호영에게로 향했다.
“수도 방위군 대장, 용무가 바쁘실 텐데 갑작스레 불러들여 죄송합니다.”
갑자기 고개를 숙인 채 사과부터 하는 대향의 행동을 보고서 호영은 순간 당황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하였다.
“하하하! 저따위가 여기에 계신 분들보다 바쁘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은 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연스러운, 그러니까 원래의 대진이라면 보여 주었을 반응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으레 하던 방식 그대로를 보여 주었다.
“저, 저놈이 감히 우리를 비웃다니!”
“무엄한 것!”
“역시 이 왕자는 왕궁으로 불러들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혀를 차며 호영을 비난하는 왕족들. 왕과 왕세자의 앞이라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호영의 귀로는 똑똑하게 들렸다.
‘지금 실컷 욕해 두라고. 내가 권력을 잡는다면 더 이상 그 입을 나불거릴 수 없을 테니까.’
호영은 입가에 호방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싸늘한 눈을 한 채 왕족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대장을 불러들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
“여러분들은 나흘 전부터 왕국 전역에서 이상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대향의 말에 치안대를 책임지고 있는 삼 왕자가 가장 먼저 반응하였다.
“사람들의 인격이 갑자기 변화한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다만 정확히 말해서 인격이 변했다기보다는 다른 세계의 인격이 도래한 것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NPC들이 벌써부터 유저들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사실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유저의 존재를 숨기려 해 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는 충구의 말이 정확했군. 하기야 회귀 전에도 비슷한 일이 많았지.’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었다. 충구의 조언도 있었지만 NPC들의 사고력을 생각하면 숨기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회 차 때도 유저의 존재를 알고 있는 NPC들이 적잖이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흘 만에 왕세자의 입에서 유저의 존재가 거론될 줄이야. 이 정도면 거의 유저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봐야 될 것 같은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유저의 존재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에 호영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10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하.”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들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우리의 세계로 넘어오고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바꾸었지요. 대한국이 건설된 것에도 그들의 영향이 무척이나 컸을 겁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NPC가 아닌 유저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일개 인공지능이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러다 유저들을 배제하거나 적대하겠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겠어. 회귀 전에도 5회 차 때쯤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개연성은 충분해.’
호영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어지는 대향의 말에 흠칫하였다.
“어쩌면 이곳에도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였지만 긴장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향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향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슨 마피아 게임을 하는 기분이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에는 마피아 게임의 경찰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왕의 권한’의 랭크가 상승하면 비슷한 기능이 생기겠지만 말이다.
“저는 그래서 이 일을 가볍게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어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황한 설명을 끝마친 대향은 모두에게 그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무장’이라 할 수 있는 친위대 간부 및 중앙군 간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세계에서 도래한 인격들은 왕국의 치안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색출하여 이계인들이 현존할 수 있는 시간이 다 지날 때까지 구금시켜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치안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질서를 붕괴시킬 존재들입니다.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잡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경하기 그지없는 주장들. 호영은 그 주장들을 들으며 이 자리에 다른 유저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였다.
다른 유저들은 자신처럼 표정 연기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저들을 마치 악귀 취급하고 있군. 뭐, 어떻게 보면 틀린 표현도 아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NPC들의 주장을 듣고만 있었는데 다행히도 ‘문신’이라 할 수 있는 군사부 및 행정부 관리들이 반론을 하였다.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는 왕세자의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우리 대한국을 건설한 것도 사실상 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척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저 역시 그들을 환영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의 신지식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어찌 마다하려는 겁니까? 이것은 기회입니다.”
“애초에 그들을 색출해 낼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로 다른 세계의 영혼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분포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을 색출한다면 우리의 고귀한 왕족까지 조사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의견은 반반이었다.
유저들을 적대해야 한다는 쪽과 오히려 환영해야 한다는 쪽.
그리고 유저들을 환영해야 한다는 쪽에 선 어떤 자는 건국왕의 위대한 영혼을 생각해서라도 유저들을 대우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하는 기세만 보면 여느 종교인 못지않게 신실해 보였다.
‘유저들, 정확히는 나를 찬양하는 자도 존재하는군. 뭐,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 대준과 대왕이 유저라는 사실은 NPC들도 알고 있을 테니까.’
사실 호영은 자신을 종교화할 생각도 하였었다. 종교를 만든다면 지금처럼 NPC들에게 유저의 존재가 발각되었을 때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건국왕의 영혼이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누가 반발을 하겠는가? 곧바로 왕의 권위를 뛰어넘어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