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도에서 유일하게 시스템의 인정을 받은 왕국이었고, 그 국력 또한 일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하지만 다른 세력의 성장을 보면 그들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 충청도에 위치한 소왕국 동맹.
그들은 하나하나가 일국이라 부르기에 형편없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보다는 영지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정도로 경제력부터 군사력과 생산력까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나라들도 하나로 뭉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충청도에 위치한 소왕국은 무려 24개국.
만약 이들이 하나로 뭉친다면?
언제든 수천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게 된다. 그때면 대한국과 비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었다.
‘무엇보다 소왕국을 지배하는 유저들은 회귀 전에 명성을 떨쳤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2회 차부터 활약한 이들도 적지 않고.’
가한국의 신진호, 옥주국의 나영석, 그리고 백제국의 최명헌 등등.
그들은 모두 호영이 알고 있는 이름들이었다. 2회 차부터 시작해서 8회 차까지 그 이름을 떨쳤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명헌이라는 이는 ‘최후의 승리자’라 할 수 있는 신라의 건국왕이었다. 8회 차에 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경기도 일부를 지배하였던 바로 그 신라 말이다.
이렇다 보니 소왕국 동맹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왕으로 불리는 유저들이 하나같이 쟁쟁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지역의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원도야 수인족이 지배하고 있어 유저들이 힘을 못 쓰고 있었지만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강화도나 제주도 같은 섬 지역은 이미 유저들이 지배자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부족사회를 넘어서지 못했다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지역의 패권자가 된다면 소왕국 동맹과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대국이 세워질 것이었다.
‘이렇게 유저들의 성장이 빠르니 나의 대한국도 하루빨리 외부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
호영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를 한반도 전체에서 경기도 지역으로 축소시켰다. 그러자 대한국의 영토가 보였다.
3회 차가 시작하고서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대한국의 강역. 본래라면 지금쯤 충청도나 강화도 정도는 진출했을 것인데 대한국은 여전히 정체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공세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어. 왕세자든 다른 왕족들이든 아예 나에게 덤빌 생각조차 못 하게끔.”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다짐한 일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의 공격적인 행보에 일부 왕족들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심이 호영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세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론이 호영을 지지하고 있으니 호구 같은 왕세자라면 몰라도 생각이 있는 왕족들은 호영의 행보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왕족들이 호영의 행동 하나하나에 경계하고 있으니 지금은 공세적으로 나가기보단 자중해야 할 때였다.
‘이런 시기이기에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힘으로 압도한다면 찍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니.’
하지만 호영은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애매할 때나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었다. 만약 그의 힘이 압도적이라면 왕족들은 고양이 앞에 선 쥐들처럼 침묵을 지킬 것이었다.
그러니 왕족들을 강제로 침묵시키게끔 조합의 크기를 보다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소왕국 동맹을 응징할 병력도 모집해야 하고 말이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호영이 상념에서 벗어나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조합장님.”
집무실로 들어선 사람은 우환, 즉 원재였다.
“우환.”
“예, 말씀하십시오.”
“여론을 움직여야겠다.”
호영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여론을 움직이라는, 아주 비상식적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원재는 고개를 숙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왕실 정보부를 동원하겠습니다.”
왕실 정보부!
이 나라에서 정보로 제일가는 조직이 바로 왕실 정보부였다. 그런데 원재는 마치 그 정보 조직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정보부의 일개 간부에 불과한 원재가 말이다.
‘로열패밀리를 숨겨 둔 패로 사용한 것은 신의 한 수였지.’
원재가 왕실 정보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단순했다. 왕실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던 로열패밀리들을 이용하여 단숨에 정보부의 지휘부를 장악한 것이었다.
왕실 정보부가 원체 폐쇄적인 조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부도 동원해라. 강경파는 아무래도 군부에 많으니까.”
호영이 바라는 여론이란 다름 아닌 ‘남벌’이었다. 왕실 정보부와 군부를 동원하여 여론이 남벌을 지지하게끔 만들려는 것이었다.
참고로 조합에서는 이미 백성들을 상대로 여론 선동을 하고 있었다. 모험가들은 왕국 전역을 싸돌아다녔기에 민심을 선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여론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다 싶으면 바로 보고해. 그때부터 모집을 시작할 것이니.”
“대략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빨리?”
“이미 여론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군부는 강경파의 수가 적지 않아, 누군가 불씨만 던지기만 해도 남벌론이 대세를 이룰 것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원재의 대답에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남벌론이 대세를 이루면 그때부터 군사를 모집할 수 있다. 물론 반발이 적지 않겠지만 여론을 등에 업는다면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 그리고 적절한 시점이 되면…… 곧바로 남진하여 소왕국 동맹을 징벌한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보니 왕좌를 차지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길어 봐야 세 달 정도 남았을까.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원래 완벽하게 세워졌다고 생각되는 계획이 가장 불완전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왕족들을 감시하는 것도 잊지 마. 분명 누군가는 행동에 나설 것이니까.”
그래서 호영은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움직이라고 지시하였다.
“예, 왕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합장님.”
“뭐지?”
“왕족들이 나설 시간은 없지 않겠습니까?”
원재의 물음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우리가 군사를 모집하면 왕족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왕세자가 호구라고 해도 다른 왕족들까지 호구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기 이전에 소왕국 동맹이 먼저 공격해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면 왕족들도 감히 우리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 없을 것이고 말입니다.”
“너도 충구처럼 소왕국 동맹이 우리를 상대로 선제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약소국에 불과한 그들이?”
왕국을 지칭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 소왕국들의 국력은 친위대는커녕 중앙군조차 감당하지 못하였다.
아마 대한국의 기사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소왕국의 국왕보다도 많지 않을까? 물론 이제는 유저의 등장으로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역량이 부족해도, 아니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체급이 약하니 그들로선 장기전을 피하고 싶겠지. 안 그래도 유저들로 인해 생산력이 뭉텅이로 깎였을 것인데 군사를 오래 동원하면 동원할수록 식량 소모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대한국처럼 국력이 강하다면 수천 명에 달하는 유저들이 조합으로 빠져도 끄떡없겠지만 소왕국들은 3회 차의 대한국이 아니라 2회 차의 대한국과 비교해야 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약소국들이었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도 적었지만 그 적은 병력도 반년 이상 동원하기 어려웠다. 생산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소왕국들은 ‘전시 상황’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전쟁 가능성이 100%로 바뀐다면 그들은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대한국과의 전쟁을 빠르게 끝낼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뿐만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방어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어를 선택한다면 전장이 되는 소왕국의 영토는 완전히 풍비박산하고 말 것이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겠군. 누구도 자신의 영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겠지.”
“그렇기에 왕족들의 반발은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 대한국의 남부가 소왕국 동맹에게 공격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왕국 동맹 덕분에 그의 계획은 더욱 완벽해졌다.
병력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여 세를 과시하고 남부 소왕국들을 응징함으로써 명성을 쌓는다면 그 누가 호영을 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국왕부터가 내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호영을 지지하게 될 것이었다. 어쨌든 호영도 국왕의 자식이었으니 말이다.
* * *
호영은 자신이 세웠던 계획대로 움직였다. 남부의 소왕국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명회를 시켜 조합에 소속된 모험가들을 동원하였다. 모험가는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이들로 소식을 전달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평소 대외적인 일에 관심이 없던 농민이나 도시 시민, 종자 계급까지 왕국 특유의 ‘자존심’을 불태우며 전쟁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로열패밀리를 이용하여 군부나 정부에도 여론을 조성하였는데, 군부 같은 경우는 호영이 여론 조작을 시도하기 이전부터 강경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비둘기 파보다 매 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군부였으니 근래 소왕국들이 벌이고 있는 소란은 군부의 인사들로 하여금 자존심에 금을 가게 만든 일대의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평화기가 길었던 터라 무인들의 입지가 줄어든 상태이기도 했다. 군부의 무인들로선 강경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었으니 왕국의 중추를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는 로열패밀리의 여론 선동은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매일같이 열리는 조회에서 호영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고 남부 소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난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왕세자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당장의 움직임만 봐도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하여 남부의 백성들을 소개시키고 사신을 보낸 게 끝이니까.’
호영에게 쓴맛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평화를 사랑하며 양보를 거듭하는 왕세자. 평시였다면 당대의 국왕처럼 현왕이라 불렸을 인물이지만 지금은 평시가 아니었다.
당장의 군부 여론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부와는 다르게 ‘절대적’까지는 아니어도 왕세자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던 군부가 조금씩 흔들리며 호영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소장 파에게만 지지를 받던 호영이 연령을 가리지 않고 무인들 전체에게 호감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기호지세다. 충구가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 더 몰아붙여 종지부를 찍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