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자유분방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의용군이지만 이곳에서도 상명하복의 질서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하였다. 특히 지휘부에 속해 있는 인사들은 호영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였기에 명을 거역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일단 명령이 내려지면 어떤 명령이건 간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잘 설명해 줘야겠지. 이들은 나의 부하인 동시에 동료들이니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호영은 뒷짐을 진 채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그가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군중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지휘부를 지키고 있어야 할 양반이 전방이라 할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호영의 여유로운 발걸음을 보았기 때문인지 큰 혼란은 없었다. 하지만 호영이 선두에 위치한 대열을 지나 적군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군중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사령관이 별다른 호위도 없이 적지로 향하다니!
NPC건 유저들이건 상상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황한 것은 아군뿐만이 아니었다. 호영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소왕국 동맹군의 진영에서도 큰 소란이 일어났다.
누가 보더라도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전장 한복판에 등장하니 소왕국 동맹군으로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한국의 이 왕자, 대진이다!”
그리고 이같은 소란은 호영의 한마디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의용군의 사령관이자 대한국의 왕자인 대진!
소왕국 동맹에서 그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아니, 모르기는커녕 소왕국 동맹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국에서 제일가는 무인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한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대한국의 주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의용군의 우두머리였기에 소왕국 동맹으로선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경계하는 대상이 눈앞에 떡하니 등장하니 당황스럽겠지.’
아마 적군의 지휘부는 지금쯤 큰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었다. 호영의 목적이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용군의 수장으로서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동맹군의 수장은 이곳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
호영은 적군이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면서도 적군의 지휘자에게 자신과 대면하자는 요구를 하였다.
왕자로서 몸소 나섰으니 너희들도 나서라고 말이다.
그러자 유저들로 보이는 적군의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대한국의 왕자가 위험을 무릅썼는데 자신들의 수장은 설마 가만히 있을 거냐며 소란을 피웠다.
본 게임에 참여한 유저들은 대체로 마초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많아 ‘겁쟁이’ 같은 행동을 극도로 경멸하였다.
만약 호영과의 만남을 피한다면 병사들에게 ‘겁쟁이’라는 오명을 받게 될 터. 적군의 수장은 호영과의 대면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예상했던 대로 지위가 대단히 높아 보이는 사내 몇몇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호영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왕으로 보였고 나머지는 왕이 부리는 심복들처럼 보였다.
‘최명헌은 안 오는군.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하는 것인가? 조심성이 많은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따로 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가공스러운 무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적의 수장을 부른 다음 그 자리에서 제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하지만 호영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쟁이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명성을 얻을 생각만 하고 있지, 잃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직접 만나려는 것은 이 거대한 전장을 주도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모든 유저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인 것치고 지극히 단순한 이유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을 넘어 전쟁 그 자체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마냥 단순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위험부담이 전혀 없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다.
“이름들이 어떻게 되지?”
“가한국을 통치하는 신진호라 하오.”
“옥주국의 왕, 나영석입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두 사람을 보며 호영은 눈을 빛냈다.
우연인지, 두 사람 모두 호영과 인연이 깊은 자들이었다. 아바타, 그것도 호영과 전혀 상관이 없는 3회 차의 이름인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신진호라……. 아마 내가 아는 그자가 맞겠지. 광명국의 건국왕.’
광명국.
실제 광명시와 비슷한 위치에 근거지를 둔 나라였는데, 강서구와 양천구 그리고 영등포구에 근거지를 둔 나라에 주로 속했던 호영과 무수히 부딪쳤었다.
한마디로 호영에게 있어 신진호는 숙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회귀 전의 이야기고 광명국의 왕이었던 신진호는 호영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나영석이라는 인물도 호영과는 무척이나 인연이 깊었다. 사실 신진호와 비교하자면 인연의 깊이가 차원이 달랐다.
신진호의 경우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가졌음에도 호영과 통성명 한번 나눈 적이 없었지만 나영석의 경우는 통성명을 넘어 깊은 관계를 가졌었으니까.
‘허영만……. 한때 나의 주군이었던 자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그렇다. 나영석은 허영만이라는 본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회귀 전 호영이 따랐던 인물이었다. 즉, 군신 관계였다는 것이다.
‘원래라면 지금쯤 영등포에서 한창 세력을 키우고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 충청도까지 내려왔군. 그래도 역시 범인은 아니라는 건가? 내가 바꾸어 놓은 역사에서도 당당하게 왕으로서 군림하고 있어. 정말 대단한 양반이야.’
호영이 잠시 감회 어린 표정을 지을 때, 신진호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고 이 요란을 피운 것이오?”
“그동안 왕세자와만 외교를 했었지, 나와는 아무런 외교를 한 적이 없지 않나?”
“이미 적인데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적이기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이를테면 무조건적인 항복이라든가.”
“……!”
그 말에 신진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영석도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항복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소!”
“다른 전장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너희들도 알고 있을 텐데? 길고 짧은 것을 굳이 대 봐야 아나?”
다시금 말문이 막힌 신진호 대신 나영석이 앞으로 나섰다.
“1군이나 2군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승리한다면 역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나영석의 반박에 호영이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해 없이 항복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해. 지금 항복하면 너희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 즉,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때?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전쟁에서 이 정도면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 아닌가?”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게 느껴지는 그 제안에 두 사람의 표정이 급변하였다.
100%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패배의 가능성이 더 커진 이상 그들도 투항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조건만 좋다면 언제든지 투항을 선택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호영이 말도 안 될 정도의 조건을 가지고 투항을 제안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 투항을 선택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관대한 제안이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왕자인 내가 허언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관대한 항복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호영은 신중하게 행동하는 나영석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회귀 전에는 존경스럽고 대단하게만 느껴지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조심성이 많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관대하다고 해도 한 사람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왕국의 명예가 달려 있는 일이니까.”
“한 사람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명헌이라고 했던가? 이 무도한 전쟁을 주도했고 두 개의 소왕국을 멸망시킨 동맹군의 수장. 그자만큼은 투항을 선택할 수 없다. 한마디로 이곳에서는 너희 두 사람만 투항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같은 동맹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니까.
애초에 대한국이라는 ‘절대악’만 없었다면 그들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매일같이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그만큼 하잘것없었다.
‘더군다나 신진호와 최명헌의 관계는 최악이라고 했었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통할 확률은 반반이다.’
사실 통해도 좋고 통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적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게 아니라 항복을 받아 내려고 노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쉽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회귀 전에 인연이 깊었던 두 사람을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이는 경험도 해 보고 싶었고 말이다.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해야겠습니다.”
“하! 동료를 배신하라니, 들어줄 가치도 없지.”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사람은 호영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것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말이다.
‘역시 신진호, 역시 나영석이라는 건가. 나름 생각해 볼 만한 제안이었을 텐데 가차 없이 거절하는군.’
호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두 사람에게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데, 정말 괜찮겠나? 이길 가능성이 없는 전쟁인데?”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법!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오!”
“협상은 결렬인가?”
“흥! 협상은 무슨.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그 오만한 콧대를 눌러 줄 테니.”
신진호가 등을 돌리며 외치는 말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만한 콧대라…….
다른 누구도 아닌 신진호에게 저같은 말을 들으니 격세지감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자만을 부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신진호인데 말이다.
“사령관님,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장의 한복판까지 호영을 따라온 세 명의 간부들, 그중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호영에게 말했다. 적군이 움직이고 있다며 말이다.
다른 간부도 호영을 보챘다.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러다 적군과 부딪치고 말 것입니다.”
“너희들은 돌아가 있거라. 나는 아군이 오기 전까지 이곳을 지킬 것이다.”
조금씩 다가오는 적군을 보며 호영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간부들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다 보니 호영에 대한 불경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사령관께서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령관님,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사령관님이라 해도 저 숫자는 무리입니다!”
“부디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십시오! 사령관님에게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절박하게 외치는 간부들의 모습에 호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더욱 나서야 되는 것이다.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심복들조차 나의 무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