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최명헌의 목적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었다. 나영석과 신진호 그리고 대한국까지.
자신에게 방해될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정황을 보아하니 대한국은 몰라도 나영석이나 신진호는 확실히 피해를 본 것 같았다. 도망병이 대부분이라서 병력의 손실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겠지만 명성을 잃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을 터.
완벽하지는 않아도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최명헌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기야 무능한 아군 때문에 우리들까지 희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겠군요. 좋습니다. 지금 바로 퇴각을 준비하죠. 우군에게도 퇴각하라 전해 주십시오. 좌군은 뭐…… 이미 알아서 퇴각하고 있네요.”
그렇게 신속하게 퇴각을 준비하는 최명헌이었지만 그의 대응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왜냐하면 가한국의 군대를 몰살시킨 존재가 어느새 그의 바로 목전까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후미가 공격당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아군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두 나라의 군대는?”
“아무래도 전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허어…….”
김휘겸의 말을 들은 최명헌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1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1시간도 안 되어 전멸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물며 비슷한 군세를 가진 적군을 상대로 말이다.
“의장님, 당황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퇴각 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결사대도 준비시켜 두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아군까지 전멸할 일은 없겠지만 김휘겸의 말처럼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가한국의 군대가 이렇게 빨리 붕괴될 것이라는 사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던가.
“도, 도망쳐! 괴물이야!”
“으아악!”
속도를 높이려던 최명헌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고 기겁하였다. 무슨 기병이 추격하는 것 같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수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신진호의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것이 아니라, 대한국의 병사가 정예였던 것인가? 아니면 나영석의 배신……?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가 없군.’
정보가 제대로 교류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간간이 들어오는 정보도 신뢰할 수 없는 허황된 정보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최명헌은 자신의 뒤를 추격하는 존재가 군대인지, 개인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라는 가한국의 군대를 붕괴시킨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의장님!”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 소리에 발걸음이 조급해질 때쯤,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최명헌을 불러 세웠다.
“경호대장,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제가 결사대와 함께 후방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사내의 말에 최명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 주던 사내가 이곳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방에 위치한 백제의 용사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결사대가 필요하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내라면 결사대의 역할을 충분히 해 줄 것이었다.
“그렇게 하세요. 대신, 죽으면 안 됩니다.”
“충.”
최명헌은 사내의 뒷모습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경호원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세한 이력은 알지 못했지만 사내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단신으로 장정 네다섯 명도 상대할 수 있는 무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덤으로 상당한 지휘 실력을 갖추었다는 사실도 지난 내전에서 입증되었고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서 백제를 부흥시켜 대한국에게 복수하리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최명헌. 그때 김휘겸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살아남아도…….”
“예? 뭐라 하셨습니까, 김 팀장.”
“여기서 살아남아도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서 죽자는 말입니까?”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
최명헌이 주변을 돌아보니 그의 곁에는 패잔병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용맹무쌍한 병사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말이다.
“팔백 명이 넘던 백제의 용사들이 이제 삼백 명도 안 보입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물론 패잔병들을 수습한다면 오백 명 정도는 다시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한국이나 옥주국의 패잔병까지 수습한다면 1천 명도 모을 수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대한국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휘겸이 하는 말에 최명헌은 안색을 굳혔다.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하여 병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0% 이상이 궤멸되었을 줄이야. 이 정도면 전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저희들을 추격하는 존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의용군이라는 이 왕자의 군대? 과연 보병 따위가 이 정도의 속도로 추격전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무방비하게 패주했다고 해도 2천에 가까운 숫자인데?”
“설마 김 팀장도 그 헛소리를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추격하는 것이 이 왕자라는 그 헛소리를?”
바삐 도망치던 와중에 간혹 헛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을 추격하는 존재가 이 왕자라는 그런 헛소리였다.
최명헌으로선 당연히 들어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김휘겸의 생각은 그와 다른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외면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왕자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일개 개인이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에 달하는 군대를 전멸시켰다는 겁니까, 지금?”
사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던 자신의 군대가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날라 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개 개인에게 패퇴했다는 사실은 더욱더 납득할 수 없었다. 일개 개인이 어찌 일국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적군이 기병을 가지고 있어 추격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게 훨씬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이곳은 게임 세상입니다. 무공도, 마법도 존재하는 세상이니 그 정도의 이적을 발휘한다고 이상할 건 없습니다.”
“하, 게임 세상이라…….”
최명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달아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렵게 만든 군대가 허무하게 날아갔는데 게임이라는 이유로 납득해야 하다니.’
실망감을 넘어 회의감까지 들었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센추리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한낱 게임 따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했던 거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말았어. 아버지의 말씀처럼 신사업은 김 팀장에게 맡겼어야 했는데.’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가상현실이라는 미몽에서 말이다.
센추리……. 분명 나쁘지는 않았지만 최명헌의 입장에서는 결국 게임에 불과하였다.
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나 시간 비율이 4배라는 점에 지금껏 현혹되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
게임은 최진수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만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센추리는 이대로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웬만해서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니 도저히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의장님……?”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팀장도 제가 마음만 먹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보다, 저기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정면을 가리키는 김휘겸의 모습을 보며 최명헌은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러다 이내 정면을 보고서 경악하고 말았다.
정체 모를 사내가 정면에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은 놓쳐도 수장만큼은 놓칠 수 없지. 최명헌이라고 했던가? 가려거든 목은 내려놓고 가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피 칠갑을 한 사내가 갑자기 등장해서는 섬뜩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말이다.
‘이곳은 게임에 불과하다. 그런데 나는 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거냐?’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공포를 게임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최명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뭣들 하느냐! 저자를 공격해라!”
“우아아아아!”
김휘겸의 외침에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이 기함을 지르며 피 칠갑을 한 사내에게 달려갔다.
하나같이 엉성한 모습이었으나 대기업의 직원이 되겠다는 계약직들의 투지는 놀라웠다. 이 투지 하나로 그들은 동맹군의 정예라 불렸다.
하지만 피 칠갑의 사내는 냉소를 지은 채 들고 있던 창을 가로로 휘둘렀다.
부우웅!
고작 창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하지만 그 가벼운 창질의 결과는 실로 터무니없었다. 마치 삼류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십 수 명의 병사가 동시에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미친! 센추리에서 무슨 광역기야!”
“괴, 괴물이다!”
“도망치자! 백제는 어차피 망했어!”
사내가 창을 네다섯 번 휘두르자 더 이상 사내에게 덤벼드는 이가 없었다. 이길 가능성이 단 1%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최명헌은 그 모습을 보자 가한국의 군대가 그리고 자신의 군대가 왜 그렇게 순식간에 전멸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괴물이 존재하였으니 군기가 부족한 동맹군의 군대는 순식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장에 최명헌만 해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하, 이걸로 확실히 알겠군.’
저벅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사내를 보며 최명헌은 생각했다.
‘나는 게임 같은 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드려 진수나 지원해 드리라고 해야겠…….’
서걱!
그렇게 머나먼 미래에 한국 제일의 세력가가 되었을 신라의 건국왕이 죽었다.
* * *
소왕국 동맹과 대한국 간의 전쟁은 모든 유저들의 관심사였다. 이 전쟁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세력의 판도가 달라질 터.
대한국이 승리한다면 한강 이남은 대한국의 세상이 될 것이고 소왕국 동맹이 승리한다면 군웅할거처럼 온갖 세력이 난립하게 될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소왕국 동맹이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유저든 야망이 없을 수는 없었고, 그중에서 군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저들은 더더욱 대한국이 고전하기를 바라였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대한국은 지나치게 강맹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최명헌이 잘되는 것보단 대한국이 잘되는 것이 훨씬 낫지!’
하지만 군웅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한국의 승리를 기대하였던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