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45화 (145/345)

# 145

“지금까지는 유저들이 항복하면 용서해 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준기가 그답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대원들도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항복도 받아 주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응징하여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대원들의 모습에 준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북쪽을 노려보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호영만큼, 아니 어쩌면 호영보다 강할 수도 있는 그의 선언이었다.

#왕의 귀환

‘다행이군.’

충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던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충구로서도 제법 당황하였었다.

왕세자와 주요 왕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반란을 대비하였지만 설마 북쪽에서, 그것도 유저들이 반란을 일으킬 줄은 생각지 못했었던 것이다.

만약에 반란을 일으킨 유저들이 왕족들과 힘을 합치기라도 하였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을 터.

어쩌면 나라가 두 개로 분열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수도의 경우는 원재와 충구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유저들이 왕세자나 주요 왕족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두 세력이 손잡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본국에 홍준기가 있다는 사실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호영을 신뢰하는 만큼 준기의 무력도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준기는 충구가 기대했던 대로 반란군 토벌에 성공하였다. 고작 백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천 명이 넘는 반란군을 진압한 것이었다.

‘이로써 위기는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어.’

잔당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소수의 잔당이 대세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울 터.

그렇다면 위기는 모두 해소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원래의 계획대로 호영이 몇 개 안 남은 소왕국들을 마저 점령하고서 ‘왕의 귀환’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왕세자는 왜 지금 시점에 나를 부른 것이지? 또다시 나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함인가?’

모든 게 잘 풀리는 상황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마지막 위기라고 할 수 있는 반란군 진압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더 이상 호영과 호영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국왕이 건강을 회복한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었으면서도 충구는 왕세자를 향한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다.

비록 호구 같은 성격 때문에 호영에게 뒤처지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 나라의 왕세자로서 호영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서 왕세자를 대할 때 평소와 똑같이 공손한 말투를 사용하였다.

마지막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마음가짐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 군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세자 역시 여느 때처럼 정중하게 그를 대하였다. 신하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상대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단 말이지. 그의 친화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니까.’

충구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왕세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현진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이현진은 군사부의 수장이기 이전에 가문의 어른이었으니 왕세자 앞이라도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랭하군. 내가 유저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뜻으로 봐야 될까? 하긴, 그렇게 많은 일들을 했는데 모를 수는 없겠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현진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충구를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본래 충구를 귀하게 여기던 이현진이었기에 더욱 티가 났다.

“그런데 저하, 무슨 일로 소신을 부르셨는지?”

“반란군의 진압이 끝났다더군요.”

“예, 초씨 가문에서 진압했다고 들었습니다.”

“친위대가 많이 황당해하였어요. 출정할 준비를 하던 찰나에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반란군 진압을 거의 완료하였다고 하니 말이죠.”

“그렇습니까?”

왕세자의 말에 충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였다.

당연히 왕세자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경악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준기를 알고 있는 충구로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태연한 표정을 짓던 충구도 이어지는 왕세자의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번 일을 보며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대진의 것이라는 사실을.”

“…….”

“저하!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호영의 우세가 확실시된 상황이라 해도 왕세자의 입에서 대한국이 호영의 것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왕세자의 발언은 천재라 자부하는 충구조차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저, 저하!”

“장인어른,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

초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왕세자의 말에 이현진은 분한 얼굴로 충구를 쏘아보다가 이내 자책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충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충구는 그런 이현진의 모습을 잠시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왕세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보다 이 군사,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것을 말입니까?”

“제 사람들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태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는 왕세자를 보며 충구는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평정을 되찾으려던 노력이 단숨에 수포로 돌아갔다. 만약 의도한 것이라면 너무도 훌륭한 연속 공격이라고 평할 수 있으리라.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충구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제가 어려운 것을 물었나요?”

“이해할 수가 없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아우, 이 왕자에게서 제 사람들을 살리려면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그것을 왜 묻는 것입니까?”

“굳이 답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지 않나요?”

“…….”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충구가 호영의 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것.

즉, 왕세자는 충구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였다는 것이었다.

‘대군사도 아는 일인데 왕세자라고 모를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밝힐 줄은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오늘따라 예상이 계속 빗나간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충구는 왕세자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렇군요. 하기야, 더 이상 속일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말입니다.”

“역시 네가……!”

이현진이 분개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려 할 때 왕세자가 나섰다.

“장인어른, 됐습니다. 이 군사 말대로 지금에 와서 따져 봐야 의미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는 우리가 아는 이 군사가 아닐 수도 있고요.”

그의 말에 이현진은 다시 말문을 닫았다.

왕세자가 말한 것처럼 이제 와서 따져 봐야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였으니까.

“이 군사, 제가 했던 질문에 답해 주세요. 이 왕자에게서 저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방법이야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이 왕자 저하에게 굴복하십시오.”

“굴복이라……. 과연 그 방법으로 이 왕자가 하게 될 피의 숙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충구는 ‘피의 숙청’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피의 숙청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제가 생각하는 이 왕자는 선왕이신 패왕과 비슷한 성정을 가졌어요. 그리고 패왕께서는 자신에게 반하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았지요.”

“……이 왕자 저하는 다를 겁니다.”

“오히려 더 심할 가능성이 높지요.”

“…….”

왕세자의 확언에 충구는 부정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피의 숙청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는 피의 숙청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지금 대한국에서 왕족의 힘은 지나치게 강했다.

나라의 권력을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는데 충구가 보기에 왕족들은 사회악이었다. 이 나라를 좀먹는 폐단 중의 폐단이랄까.

대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숙청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로열패밀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로열패밀리, 즉 호영의 수하들이 이 나라의 지도층이 되려면 기존의 지도층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란 결국 누군가의 피 위에 서는 것이니까.

“아마 왕세자 저하의 짐작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피의 숙청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로군요.”

“필요한 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죽는다 해도 말인가요?”

“……예?”

“패왕께서도 수많은 형제들을 죽이셨지요. 부담스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죠. 아마, 이 왕자에게도 저의 존재가 부담스럽겠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니 제가 죽어 주겠다는 거예요, 이 왕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대신 이 군사는 저의 사람들을 살려 주세요. 부족한 저를 지금껏 따라 준 자들이니 억울한 죽음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쿵!

충구는 앞서 받았던 충격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왕세자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이제까지는 그저 순진하고 착하게만 보였던 얼굴인데 지금은 뭔가 세상을 초월한 성인의 본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정말 호구를 넘어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것인가?’

호영을 상대로도 경이로움을 느낀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전율을, 그것도 전신이 짜릿할 정도의 전율을 느끼게 하다니.

살신성인!

왕의 적장자라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났으면서 이같은 희생정신을 가졌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던 충구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세자 저하께서 희생하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어째서죠?”

“우리는 후환거리를 남길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충구의 단호한 대답에 왕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스님이 참선하는 것처럼 경건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왕세자의 눈이 부릅떠진 순간,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뭐지? 왜 갑자기 저런 눈을……?’

성군처럼 자애롭고 현자처럼 슬기롭게 느껴지던 왕세자의 눈이 괴이하게 변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설마…….’

충구가 의문을 표하는 그 순간, 왕세자가 버럭 외쳤다.

“꺼져!”

“예?”

“꺼지라고!”

언제나 겸손하기 그지없었던 왕세자였다. 신분이 낮건, 자신의 정적이건 간에 왕세자는 언제나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험한 말을 입에 담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왕세자의 됨됨이는 착한 수준을 넘어 ‘호구’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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