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63화 (163/345)

# 163

만약 일본군을 모두 무찌른 뒤 신라가 입을 싹 닫는다고 해도 뭐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력의 차이가 월등한 만큼 신라가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겠지만 말이다.

“의병장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대한국이 솔선수범하는 것만이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그리고 신라가 나의 의도를 눈치챈다고 해도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어. 이미 경상도의 민심은 신라를 떠난 지 오래니까.”

자신감 넘치는 호영의 말에 충구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큰 틀은 충구가 직접 세웠던 만큼 호영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경산 일대에서 또 한 번의 대회전이 있었다.

동맹군의 병력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2천 정도. 반면에 일본군의 병력은 오히려 증가해서 3천 안팎이었다.

대현 왕국의 군대가 일본군에 합류한 것이었다.

추격에 나섰던 한국 유저들은 일본군의 규모를 보고 크게 당황하였다. 뒤에서 한창 쫓을 때는 패잔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일본군은 기세등등한 정예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는 법.

호영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국 유저들은 악을 쓰며 일본군을 향해 달려갔다.

두 군대가 충돌하기 직전, 일본군 진영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여전히 조합에서 우월한 일본군이었다.

퍼버버버버벅!

그러나 결과는 예전과 달랐다. 김천에서의 대승으로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전리품을 노획한 대한군은 무장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대한국의 거의 모든 병사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화살 공격의 손실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화살 공격을 막아 내자 선봉장, 김성근이 외쳤다.

“돌격하라!”

김성근의 외침에 돌격대원들을 시작으로 전쟁 용병들이 용맹하게 달려 나갔다.

콰콰쾅!

돌격대원들이 마치 중장 기병을 보는 것 같은 파괴적인 돌파력으로 일본군의 선두 대열을 뚫어 버렸다.

뒤이어 전쟁 용병들이 들이닥치니 일본군은 삽시간에 붕괴되었다.

‘친위대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처음 보여 주었던 정예 강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본군답지 않은 오합지졸 군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호영은 오합지졸 군대가 완전히 붕괴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끝났군. 일본군도 한 번 지고 나니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어.”

“아무래도 두 나라 사이에 분열이 생긴 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 일본군이 주도적으로 지휘했다면 저 정도까지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긴, 대현 왕국이 일본군을 오합지졸로 만드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것 같기는 해. 일등 공신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한국 유저들에게 매국노 소리까지 들어 가며 일본군과 동맹을 맺은 대현 왕국이다. 일본군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 대현 왕국은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천 명이나 동원한 대현 왕국은 지금까지 저자세를 취한 게 억울했다는 듯 일본군을 상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 갔고, 그런 대현 왕국의 행동은 하나의 군대를 두 조각으로 분열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현 왕국과 일본군 간의 균열도 균열이지만, 일본군 내에서도 균열이 존재하였다.

쇼니 가문과 신선조 간의 분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군은 내부적으로 이미 사분오열되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항복을 권유하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군. 일본인들도 이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호영이 항복을 권유했음에도 일본군은 퇴각하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다음 날,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의 규모가 3천에서 2천, 다시 2천에서 1천으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사실상 지금의 일본군은 전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항복을 하지 않다니. 비상식적으로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게도 느껴지는 문화야.’

일본에서는 패장지장에게 자비가 없었다. 전쟁에서 패했다면 운이 좋아 봐야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상대방의 신하가 되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은 수급이 되어 장대에 걸리는 신세가 될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웬만해서는 항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 일본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투항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패잔병 신세로 남쪽 끝까지 쫓겨났다. 대현 왕국의 군대는 이미 자신들의 땅으로 도망친 이후였다.

“바다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절망적 현실에서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호영이 조소를 지으며 말하자 충구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치 그들은 일본군이 바다로 도망친 것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비웃는 게 맞았다.

바다.

일본군에게 바다는 지옥이 될 곳이었다.

* * *

멀어지는 육지를 보며 쇼니 스케모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신선조는 수백의 루닌을 잃었고 조선은 수만의 인구를 잃었는데 우리 쇼니 가문은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

대패를 당하여 본토로 도주하고는 있지만 사실 스케모토가 이번 전쟁에서 잃은 것은 없다고 봐야 했다.

병력 피해 같은 경우는 수군을 주로 동원한 쇼니 가문이었기에 별로 크다고 볼 수 없었다. 많아 봐야 오백 명 정도의 피해를 보았을까?

전쟁에서 소모된 군자금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저들이나 낭인들을 모집할 때 군자금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습한 전리품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도 오히려 이득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전리품 중에는 마물과 관련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섬나라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리 마물의 존재가 극도로 희박하였다. 오크나 미노타우로스급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고블린 같은 소형 마물도 극히 드물게만 존재하였다.

그런 이유로 마물의 사체나 마정석은 부르면 값이라고 할 정도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을 부호나 마법사들에게 판다면 쇼니 가문은 아마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될 것이었다.

일본의 마법사는 마치 전국시대의 승려와 비슷하였는데 부유하다는 측면에서 특히 비슷하였다.

분명 마정석이나 마물의 가죽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이었다.

이로써 스케모토가 이번 전쟁에서 잃은 것은 한국에게 대패를 당했다는 오명뿐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변명거리란 다름 아닌, 대한국의 왕이었다.

신선조를 상대로 신화적인 무위를 보여 준 대한국의 왕, 대진!

혼자서 수백, 수천을 감당하던 대진의 무위는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악귀가 아니라면 신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위였다.

그렇기에 스케모토는 변명할 수 있었다. 자신은 한국인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신에게 패배한 것이라고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서는 충분히 통할 법하였다. 본인이 일본인이었기에 스케모토는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도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어. 그 신선조가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말 다 한 셈이지.’

그러니 결국 스케모토는 이번 전쟁에서 잃은 게 없는 셈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선 정벌을 최초로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일본 유저들이 높게 평가해 주지 않을까?

어쩌면 다른 세력에서 조선 정벌을 시도할 때 스케모토가 조선 전문가라면서 고문을 청할지도 모른다.

“흐흐흐.”

패배했지만 얻은 게 많다는 생각에 스케모토의 입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선조의 몰락이 예견된다는 사실도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다, 다이묘! 저기를 보십시오!”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 정면을 바라본 그 순간, 스케모토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미소를 지운 그의 표정은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뭐냐, 저것은!”

“조선의 해군입니다!”

“누가 그것을 물었느냐! 어째서 조선의 해군이 이곳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한국이 해군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추격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순 없어. 본토로 돌아가기만 하면 쇼니 가문의 비상이 시작되거늘!’

스케모토가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쇼니 가문을 비상시켜야만 하였다.

하지만 스케모토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기선, 아타케부네에 다가오고 있는 대한국의 함정들을!

“칙쇼오오오!”

* * *

대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동백 성 한복판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괴인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일본도를 손에 들고 있어 더욱 수상해 보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일본군의 패배로 끝낼 수는 없다.’

복면의 괴인은 살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일종의 왕궁으로서 동백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유저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이었다.

물론 현재는 대한군에게 점령되어 장수들의 막사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조선의 왕을 죽여야 한다.”

암살!

괴인이 노리는 것은 바로 암살이었다. 그것도 무려 대한국의 국왕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을 죽이겠다니. 범인이라면 시도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반도의 패권국으로 알려진 대한국의 국왕을 상대로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괴인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사이토 하지메, 그것이 괴인의 이름이었다.

신선조의 제3번대 조장이자 검술 사범이라는 직책을 가진 검술의 달인. 그러나 하지메의 진짜 정체는 신선조에서 비밀리에 육성하고 있는 암살단의 총책임자였다.

즉, 그는 닌자 또는 킬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호위에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야. 그리고 일본군이 바다에서 몰살당한 지금,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일본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하였다. 부산 앞바다에서 갑작스럽게 출몰한 적군에 인해 모조리 수장당한 것이었다.

조선 정벌군에서 살아남은 일본 유저는 스파이로서 활동하기 위해 한반도에 남아 있던 하지메와 3번대 조원들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대한국의 입장에선 방심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남아 있는 대현 왕국이야 신라가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하지메는 자신 있었다. 현실에서도 청소부로서 활동하였던 하지메의 실력이라면 방심한 상대쯤은 충분히 노려볼 만하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잡아라! 암습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갑자기 동백 성 곳곳에서 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병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메의 주변도 조금씩 밝아졌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방화에 실패한 것인가?”

암살단 소속의 3번대 조원들은 암살에 직접 가담하는 대신 방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맡았었다. 대한군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대한군의 반응을 보니 3번대 조원들이 일으키려던 방화는 실패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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