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최진수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통하기만 한다면 경상도를 점령하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어.’
만에 하나 최진수가 협상 결렬을 선언한다면?
호영은 곧바로 신라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분만 있다면 신라를 정복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신라를 멸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친위대나 돌격대만 보내도 정복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전쟁이 아닌 신라의 내부 분열을 시도하려는 것은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아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호영이 생각하고 있는 아군이란 의병대를 이끌었던 의병장들과 소수의 영주들이었다. 이들이 대한국에 협력해 준다면 점령지를 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최진수가 명분만 만들어 준다면 이들은 호영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말이다.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어차피 신라를 압박할 생각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협상에 참여할 실무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영은 충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머지않아 진행될 신라와의 협상을 기다렸다.
* * *
“암살자가 말하기를, 센추리에서 죽이는 것에 실패했으니 현실에서 죽이겠다고 합니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며…….”
원재의 보고에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간부들도 헛웃음을 짓거나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 특별한 반응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현실에서라면 달라질 거라 생각하나? 웃기는 놈일세.”
“만약 사장님, 아니 전하를 노린다면 감찰관님이 용서치 않을 텐데 말이야.”
간부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지켜보던 원재가 이어서 말했다.
“근데 암살자가 자신이 야마구치구미 소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야마구치구미?”
“헐, 야쿠자란 말입니까?”
“호들갑 떨게 뭐 있어! 그래 봤자 깡패 새낀데.”
“얌마, 그래도 야쿠자잖아. 우리나라의 조폭들이랑은 스케일이 다르다고. 사시미가 아니라 총부터 뽑는다니까?”
“한국에서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안 될 건 뭐야. 요즘 총기 사고가 한두 건이야? 내가 경찰일 때는 동남아나 조선족조차 총을 가지고 있었다니까?”
암살자의 정체가 야쿠자라는 말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조폭에게 위협을 느낀다 해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간부들이지만 야쿠자는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규모부터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간부들이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당황하거나 경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흘 동안 고문해서 얻어 낸 게 야쿠자 출신이라는 것과 살해 협박뿐인가?”
하지만 호영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야쿠자의 살해 협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원재도 여느 때처럼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놈이었군.”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짓던 호영은 준기에게 명령을 내렸다.
“처리해.”
“알겠습니다.”
“경들은 야쿠자든 암살자든 신경 쓸 거 없다, 어차피 그런 놈들은 감찰관이 막아 줄 것이니. 그렇지 않나, 감찰관?”
호영의 말에 원목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제가 직접 후회하게 만들겠습니다.”
으드득!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는 원목의 모습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굳이 원목이 아니더라도 일개 폭력 조직에 당할 내가 아니다.’
센추리에서 벌어들인 부를 거의 쏟다시피 하면서까지 안전이나 경호에 신경 썼던 호영이다. 회사를 인수할 때 경호 회사인 로열 가드를 가장 먼저 인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의 주거지부터가 외부인은 접근조차 못 하게 철통으로 보안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암살자에 대해서는 감찰관이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신라군은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호영은 원목을 흐뭇한 눈으로 격려해 주고는 고개를 돌려 충구에게 물었다.
“제가 듣기로, 이틀 안에는 동백 성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틀이라……. 축제 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내일쯤이면 다 될 것입니다.”
대한국은 현재 동백 성에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였는데,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꽤나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동백 성에 거주하는 유저들과 백성들까지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돈은 제법 들겠지만 대신 민심을 얻게 될 거야.’
신라와의 전쟁이 예고되는 지금, 군사력보다는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였다.
민심을 얻어야지만 점령지를 관리하는 게 수월해질 것이니 말이다.
* * *
이틀이 지나자 마침내 신라군이 도착했다.
대현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신라군을 보며 동백 성에 거주하는 유저들과 백성들이 환호를 질렀다.
“와아아아!”
“매국노를 처단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이제 전쟁 끝이다!”
신라가 이기고 왔다는 것은 길었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호영은 성 위에 올라가서는 모두에게 고했다.
“오늘부터 축제다. 모두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 한마디에 동백 성은 단번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한국과 신라국, 심지어 동백 성에 거주하던 동백국 출신의 백성들까지 축제를 즐겼다.
오늘은 마시고 죽는 날이었다.
‘NPC건, 유저건 간에 흥 하나는 대단하군.’
흐뭇한 눈으로 광란의 축제를 지켜보던 호영이 최진수에게 말했다.
“우리도 즐깁시다.”
그러자 최진수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하하하하! 이럴 줄 알고 우리 왕국에서도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갑자기 야시시한 복장을 입은 여자들이 등장하였다. 센추리에서는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뭡니까, 이분들은?”
“무희들입니다.”
“허, 무희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군사 부문에 재정을 집중해도 부족할 판국에, 단순 유희를 위해 헛돈을 쓴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아직 전시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황당하였다.
하지만 호영은 이내 피식 웃었다.
신라가 어디에다 돈을 쓰든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호영에게 좋았다.
결국 적이 될 상대였기 때문이다.
“좋군요. 어떻게 무희들을 키워 낼 생각을 하셨습니까?”
“흐흐, 수하들의 사기를 위해 고안해 낸 것입니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결국 게임은 즐기려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술을 주고니 받거니 하며 호영은 최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저들이 직접 빚어 낸 술을 마시니 더욱 운치 있다느니, 센추리의 음식 문화도 제법 발전했다느니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가끔씩 최진수가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는데 호영의 직업이나 가정환경 따위를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바로 송호영이다. 네가 그토록 무시하던 송호영!’
그럴 때면 호영은 최진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까스로 이겨 냈다.
아직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더라도 내일 있을 협상 자리에서 밝히는 게 폭력조직, 술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내일도 즐겨 봅시다. 우리!”
그렇게 최진수와 1시간가량 술자리를 함께한 호영은 내일 보자는 말을 하며 자리를 옮겼다.
“영웅들이 왜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계십니까?”
“저, 전하.”
“일단 한잔들 합시다.”
그가 옮긴 자리에는 의병장들이 저들끼리 조용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흥겨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축 처진 분위기로 말이다.
호영이 초대하여 자리에 끼기는 하였는데 신라 쪽에서 찬밥 대우를 하여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남아 있는데도 의병들을 팽할 생각부터 하고 있다니.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나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야.’
찬밥 대우를 받을수록 신라에 대한 악감정이 쌓여 갈 터.
이대로 계속 악감정이 쌓인다면 신라의 위기가 발생해도 다시는 의병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대한국의 편이 되어 신라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 호영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고 말이다.
“우리 대한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였던 한국의 유저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호영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의병장들의 마음을 얻는 것에 집중하였다.
* * *
흥겹고 신나는 분위기는 어제로 끝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다음 날이 되자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경상도 북부는 대한국이 가져가십시오. 대신 저희는 남부를 갖겠습니다.”
“허.”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 이유는 단순했다. 신라의 협상단 측에서 허무맹랑한 요구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경상도 북부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거 먹고 떨어지라는 겁니까?”
“남부라고 멀쩡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역이지 않습니까?”
“동백 왕국의 수도와 대현 왕국의 수도가 있는 곳인데 멀쩡하지 않으면 뭐 어떻습니까? 인구수부터가 10배 이상 차이 나는데.”
“어차피 대한국은 전라도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점령지를 수습하기에는 벅차지 않습니까? 그러니 대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인구가 적은 게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합니다. 그런 황당한 이유로 영토를 분할한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실무 협상은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어이가 없군. 저자세를 취해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야. 왕이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외교를 책임지는 자까지 강짜를 부리려는 건가?’
도발을 하려던 것은 호영인데 오히려 도발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선의를 베푼 것이 호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준 것 같았다.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짓다가 협상단에게 신호를 주었다. 강하게 나가라는 신호였다.
“대한국의 요구는 전쟁 이전에 신라의 영토로 구분되던 모든 땅과 대현 왕국의 영토 절반입니다. 즉, 경상도 북부 전체와 경상도 남부의 절반을 갖겠다는 겁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세운 공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 무슨……!”
기함을 내지르는 것은 이제 대한국 쪽이 아닌 신라 쪽이었다.
국토 전체를 바치라니! 제아무리 동백 왕국의 국토와 대현 왕국의 국토 절반을 인정해 준다고 하지만 그동안 지배해 왔던 국토 전체를 대한국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은 신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참 나, 여기에 또 뭐가 있다는 겁니까?”
“신라는 대한국의 속국이 되어야겠습니다.”
“뭐요? 속국?”
“예, 공물은 세금의 1할 정도면 될 것 같고, 앞으로의 신라 국왕들은 대한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만 할 수 있는 걸로…….”
쾅!
“지금 우리 신라를 우롱하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