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교 모임은?”
“당연히 계속 다니셔야 합니다.”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4회 차부터는 센추리에만 집중하려고 하였는데 또다시 방해받게 생겼다.
그로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반격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충구가 불현듯 그 같은 말을 꺼냈다.
“재벌들에게 반격을 하자고?”
“사장님은 현금 부자이시지 않습니까? 제가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주식을 사서 적대적 인수 합병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흐음.”
사실 호영도 재벌들의 공격을 언제까지 두드려 맞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대가 온다지만 그렇다고 당장의 은원 관계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호구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반격을 가할 필요가 있겠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동정하기보단 어떻게든 괴롭히고 물어뜯는 것이 세상이라는 놈이었다.
재벌들이 무섭다고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허 팀장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 같아?”
“자금을 어느 정도 동원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1천억 이상을 동원할 수 있다면?”
“상대는 대기업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섯이나 되니, 1천억 이상의 자금을 동원해 봤자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 있어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
하기야, 재벌이 괜히 재벌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돈으로 권력자가 된 자들이니 그만큼 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호영도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재력가가 되었지만 재벌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기 마련이었다.
개인으로서 보유한 현금이야 어마어마하였지만 대기업의 자금 동원력은 일개 개인이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초보자의 섬에 있는 부동산을 모두 판매한다면 대기업을 능가하는 재력을 얻게 되겠지만 앞으로 부동산의 가치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금의 재력으로 적대적 인수 합병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니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방법이야 많습니다. 요즘 들어 사회 전체적으로 반재벌 정서가 확산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반재벌 인사들을 끌어들이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 우리에게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재벌들까지 극단적으로 반응할 거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름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반재벌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재벌 전체의 역린을 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였다.
신호 그룹이나 그 외 우호적인 기업들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반재벌 인사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통령과 손잡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대통령과는 어떻게 보면 공동의 적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대선 전부터 재계 개혁을 주장하였고 임기가 시작된 후에도 계속해서 재계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재벌을 적으로 둔 호영으로선 최고의 동맹 상대였다.
“나쁘지는 않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지나칠 정도로 원칙주의자라는 점이야. 시장으로 일할 때에는 집무실에 CCTV를 설치하면서까지 비리나 청탁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던 사람이니까.”
“원칙주의자면 더욱더 우리의 편을 들어 주지 않겠습니까, 재벌들이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의 편을 들기야 하겠지. 대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 거야. 대한 길드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대통령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니.”
호영은 아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충구 말처럼 대통령과 힘을 합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회귀 전의 일을 생각해 보면 대통령과 힘을 합친다고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대통령이지만 그의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올해부터 지지율을 시작으로 정권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충구는 다 좋은데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현실감각이 다소 부족하다는 게 흠이군. 센추리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책사인데 말이야.’
반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조금은 기대하였건만 전부 다 현실성이 없거나 구체성이 부족한 의견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충구 역시도 원재처럼 센추리에만 전념하게 해야 될 것 같았다.
“재벌들에 대한 문제는 일단 나중에 해결하는 걸로 하자. 어설프게 반격했다간 적의 기세만 올려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저도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였지만 호영은 미련을 두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재벌들에게 복수할 기회는 어차피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4회 차에 내가 또다시 권력을 독차지한다면 그것도 나름 복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4회 차를 기다렸다.
이제 4회 차가 시작되기까지 이틀이 채 남지 않았다.
#통과의례
기원력 312년, 겨울.
현리 모처에서 고위 관료들이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전 재무 장관, 이재민 경께서 결국…… 자결하셨습니다.”
“허어.”
“크흑.”
내무 보좌관, 안성희의 말에 회동의 참석자들이 침음을 흘렸다.
고위 관료였던 자가 자결을 하다니!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재민 경의 부인도 마찬가지로 자결하였습니다. 부군을 따라서 말입니다.”
현 국왕은 폭군이었다. 충신의 부녀자를 겁탈하여 결국 충신과 부녀자 모두를 자살로 몰게 할 정도로 말이다.
“참담할 따름입니다.”
“하늘이 노하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렇게 참석자들이 참담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니 안성희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하늘께서는 이미 노하셨습니다. 노하시지 않았다면 이럴 수가 없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천심은 이미 왕에게서 떠났습니다.”
쿵!
안성희의 한마디에 좌중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 정적이었다.
“하늘의 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곧 대의라는 뜻입니다!”
무거운 정적 속에 안성희가 다시금 말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신 겁니까? 하늘의 뜻은 이미 정해졌건만,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하실 겁니까, 다들?”
“안 보좌관께서는 그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늘이 정해 주신 분을 바꾼다는 게!”
모두가 쥐 죽은 듯 침묵할 때 30대 초반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이견을 제시하였다.
박영종이라는 사내였다.
“폭군을 하늘이 내렸겠습니까?”
“……!”
“그리고 말입니다, 가능하건 가능하지 않건 그런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왕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것이니까.”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이십니까?”
“왕이 또다시 피의 숙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피의 숙청을 예고하는 안성희의 말에 좌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국왕은 즉위한 이후 두 번의 숙청을 하였다.
제대로 된 명분도 없는 일방적인 숙청이었다.
그 두 번의 숙청으로 족히 수백에 달하는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전하께서 정녕 숙청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감사원장의 조카, 장대화가 한 말입니다. 신빙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숙청이라니. 전하께서는 어찌 그런 짓을…….”
박영종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비탄에 젖은 상태로 입술을 깨물거나 길게 탄식하였다.
폭군의 학정에 치를 떠는 표정들이었다.
“가만히 당하실 것입니까?”
안성희가 그렇게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아니요.”
“그렇다면 하늘의 뜻에 동참하십시오. 저와 함께 폭군을 폐위시키는 겁니다.”
이제는 대놓고 역모를 주장하는 안성희였다.
하지만 좌중의 분위기는 이미 폭군을 폐위시키는 것으로 굳어진 상황이었기에 그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사 날짜는 정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언제입니까?”
“도래의 날! 100년에 한 번 있는 그날이 바로 폭군을 폐위시키는 날입니다.”
한 달 뒤, ‘그날’이 온다.
이계인들이 도래하는 그날이 말이다.
‘모두가 혼란에 빠지는 그날, 폭군을 죽인다!’
* * *
새로운 육체에 동기화를 한 호영은 주먹을 쥐며 탄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육체군.”
신체 능력이 1회 차의 대준에 버금갔다. 순수 육체 능력만으로 웬만한 무인은 찜 쪄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무공 실력도 엄청나단 말이지.’
마력의 수치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려 300에 가까운 마력. 회귀 이후에 처음으로 가져 보는 어마어마한 마력이었다.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스텟이 부족해도 무공 실력이 워낙 독보적이니 누구에게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수련 시간을 줄여도 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더군다나 이 아바타의 신분은 무려 ‘왕’이었다.
처음부터 왕의 신분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2회 차나 3회 차 때 왕이 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왕이라는 어드밴티지는 엄청난 것이다.
“폭군을 잡아라!”
“반역이다! 전하를 지켜라!”
하지만 모든 게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폭군이라느니, 반역이라느니 평화로운 시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궁 안에서 말이다.
아직 4회 차의 세상이 낯설기 그지없는 호영도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반란이라……. 작위를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하였으면 E+ 등급의 왕의 권한을 가지고도 반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침소를 나섰다.
“역도들이 궁성을 넘어섰나 보군. 이제 겨우 사흘짼데 엄청난 속도야.”
“저, 전하!”
갑작스러운 호영의 등장에 근위를 담당하는 친위대원들이 당혹하였다. 최우선적으로 호위해야 할 대상이 위험 장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기에 폭군이 있다!”
마침 누군가가 호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자 반란군이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피하십시오! 위험합니다!”
“어디로 피한다는 말이냐? 이미 궁 전체가 점령당했는데?”
“…….”
친위대원들은 호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안전한 장소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궁성은 반란에 너무 취약한 구조란 말이지. 일본처럼 무지막지한 방어 시설을 설치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처럼 지하 통로 정도는 뚫어 놓는 게 좋겠어.’
어찌 보면 뒤늦은 생각일 수 있었다. 이미 궁궐 전체가 반란군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에게 있어 이까짓 반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벅저벅.
호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방에서 몰려오는 반란군을 향해 걸어갔다.
곁에 있던 친위대원들이 경악하였지만 아무도 호영을 말릴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반란군의 코앞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연왕이다.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