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89화 (189/345)

# 189

백성들이 나와 왕의 귀환을 환영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만 봐도 호영의 귀환을 환영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삼도 백성들은 나를 보고도 무기력해하더니 수도의 백성들은 거의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눈빛 같네.’

미움과 원망,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시선으로 호영을 노려보는 백성들.

만약 주변에 병사들만 없었으면 호영에게 달려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눈빛들이었다.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회귀 전에도 없었던 한반도 유일 국가를 만들었건만, 폭군에 의해 나라가 이따위로 개판이 되다니.’

엄청난 발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소 현상 유지 정도는 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대한국에게 우환거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의 침략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조합이나 여러 제도를 통해 신분제도 완화되었으며, 3회 차에 다다를 수 있는 문명의 한계까지 기술을 발전시켜 놓았다.

여기에 학교까지 만들어 100년 대계를 준비했던 것을 생각하면 4회 차는 더욱 발전했으면 발전했지, 정체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런데 막상 4회 차가 되니, 대마도와 일기도는 일본에 빼앗겼고 군사력은 쇠퇴하였으며 정치는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구야 늘어났다지만 정치가 최악으로 흘러가니 오히려 그 늘어난 인구가 부담이 될 정도였다.

하삼도를 순행했을 때도 온갖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진압한 폭동만 수십 건이었다.

“휴우, 일단 궁부터 가 보자.”

호영은 대한국의 현실을 떠올리다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그렇게 말했다.

궁에 도착하니 궁녀들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환영해 주었다.

연왕이 어찌나 흥청망청 잘 놀았는지, 궁녀들의 미모가 아주 빼어났다. 팔도의 미녀란 미녀는 전부 모은 것 같았다.

“이야, 심미안은 이제 우리 유저들과 비슷해진 것 같은데요? 궁녀들 전부 다 연예인 시켜도 될 것 같습니다.”

“연예인은 무슨.”

“아하, 전부 전하의 여인이죠? 이거 참, 부럽습니다.”

충구가 능글맞게 웃으며 그리 말하니 호영도 그제야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 다시 정색하는 얼굴이 된 호영은 내관을 불렀다.

“내관.”

“예, 전하.”

“두 숙용은 어찌 지내고 있느냐?”

“······.”

“왜 아무 말도 없지?”

호영이 독촉하니 내관은 몸을 덜덜 떨고는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용 전씨께서는 새로운 친위대원들의 지시를 어기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사옵니다.”

“적어도 사고 치지는 않았다는 것이군.”

“그, 그렇사옵니다.”

“하면 다른 숙용은?”

“전하께서 우려하실 수준은 아니오나······ 숙용 장씨께서 아주 약간의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사옵니다.”

“어떤 소란이었지?”

“······친위 대원에게 따귀를 때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식의 정말 별거 아닌 소란이었사옵니다.”

“여의 명령을 어겼는데 별거 아니라는 것이냐?”

그는 연왕이 총애하던 두 숙용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물론 명령만 내린 것은 아니고 두 숙용의 위세에 굴복할 리 없는, 로열패밀리의 2군을 시켜 숙용들의 처소에 구금하였다.

두 숙용의 권력이 막강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하지만 두 숙용 중 장희연이라는 여인은 그의 명령을 무시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악녀라 불리는 두 후궁이 마음에 들지 않았건만 명령까지 어긴 것으로 보여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라······.”

“되었다. 어서 숙용 장씨에게 안내하여라.”

내관은 고개를 숙인 채 앞장섰다. 후궁의 처소로 향하는 것이다.

왕궁의 크기가 커졌기에 후궁의 처소에 도착하는 것은 10분이 지난 이후였다.

“가관이구나.”

후궁, 장희연의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영어, 즉 죄를 지어 감금되어 있던 장희연이 친위대를 상대로 강짜를 부리는 광경이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너는 극형에 처할 것이고 너의 삼족은 멸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한다고?”

마침내 삼족을 멸한다는 헛소리까지 들려오자 호영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하!”

그녀가 자신을 부르며 안겨 들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미모는 빼어나. 하지만······.’

미모 하나로 왕의 총애를 등에 업었다는 여인답게 확실히 대단한 미녀였다.

작고 새하얀 얼굴에 눈꼬리가 살짝 처진 사슴 같은 눈망울, 도톰한 입술 그리고 오똑한 코까지,

걸 그룹으로 단련된 충구조차도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악녀’였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른, 악녀라는 것이다.

“죄인이 낯짝도 두껍구나.”

호영은 거칠게 그녀를 밀어내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순해 보이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깜빡였다.

악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예? 전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소리조차 아름답게 느껴졌다. 냉철한 호영의 가슴에 파문을 일게 할 정도로 말이다.

호영은 내공을 일으켜 자신의 정신을 일깨웠다. 저도 모르게 ‘음심’에 사로잡힐 뻔하였다.

‘그야말로 양귀비가 따로 없군.’

정말 치명적인 미모였다. 왜 왕이 그녀에게 푹 빠져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위험했다.

“네가 왜 여기에 감금되어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저, 전하?”

“희대의 악녀인 줄 알았더니 그냥 멍청한 여자구나.”

호영이 그리 말하니 장희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애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소첩이 무슨 벌이든 받겠나이다! 그러니 부디 용서를······!”

“쯧.”

심금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호영은 혀를 찼다.

역시 위험한 여인이었다.

‘후궁이니 처형을 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야겠어. 어쩌면 유저들이 그녀를 보고 흑심을 먹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후궁의 처소를 나서며 호영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 * *

연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패악을 저지르던 두 숙용은 아쉽게도 후궁이라는 이유로 당장 숙청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내관 김정원부터, 장희연에게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관료들까지.

호영은 마치 하삼도에서 했던 것처럼 단호하게 숙청을 거듭하였다. 그야말로 피의 숙청의 연속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치국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호영은 오늘도 국청에서 죄인을 문초했다.

“왜 역모에 가담하였지?”

오늘, 그가 치국하는 죄인은 임승택이라는 전 수도 방위군 대장이었다.

“······.”

“여가 물었다, 수도 방위군 대장이었던 네놈이 어찌하여 역모를 꾸몄냐고.”

“소신은 그저 대의를 따랐을 뿐입니다.”

“뭐라?”

호영은 노여움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였다.

“전하, 폭군의 최후는 비참한 법입니다.”

“네놈이 정녕!”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걷지 마시옵소서, 전하! 간신을 물리치고 충신을 등용해 인정과 덕을 베푸십시오!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얻지 못하신다면 전하의 치세는 얼마 가지 못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말에 호영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호영의 눈빛은 분노가 아닌 안타까움과 연민을 담고 있었다.

‘이자가 진정한 충신이거늘.’

마음 같아서는 사형 집행을 취소하고 싶었다.

역모를 꾀하였다고는 하나, 승택이 폐위시키려 했던 것은 호영이 아닌, 연왕이었다.

그리고 연왕의 경우는 호영이 생각하기에도 폭군이 맞았다. 군사를 모으고 역모를 꾀한 것이 결코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반란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나의 대씨 일족을 위해서.’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창을 들고서 외쳤다.

“오냐! 여가 직접 네놈의 목숨을 끊어 주마!”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호영은 창을 내질렀다.

푸욱!

승택의 가슴에 창이 박혔다. 호영의 창이었다.

“전하, 부디 이전의 전하로 다시 돌아······.”

호영은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호영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역모를 저지른 죄인 주제에 말이다.

‘너의 말대로 해 주겠다. 그러니 지켜봐라.’

충신의 마지막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호영은 평소의 싸늘한 얼굴로 국청을 벗어났다.

“내무 장관.”

“예, 전하.”

“역적, 임승택의 식솔들은 그대에게 하사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본래 100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국에는 노비 제도가 없었지만 유저들이 떠나고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노비 제도가 생겨났다.

노비가 생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빚을 갚지 못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중죄를 저질러서’였다.

참고로 대한국 같은 경우는 연좌제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역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노비가 되기도 했다.

임승택의 가족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역적의 가족이었으니 노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호의 노비가 된다면 그럭저럭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무 장관, 신용우.

그는 2회 차부터 줄곧 행정을 담당하였던 유저, 안지호였다.

호영의 심중을 알고 있는 지호였기에 승택의 가족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노비로 대하겠지만 말이다.

“치국이 끝났으니 대전으로 가자꾸나.”

“예, 전하.”

* * *

신하 정확히는 로열패밀리 소속의 간부들과 함께 대전에 도착하니 호영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국청에서 느꼈던 심정을 토로하였다.

“충신을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한다는 게 참으로 씁쓸하더군.”

“관례대로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임승택도 아마 고통은 짧았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충구의 위로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죽는 것은 똑같은데 무슨 차이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을 느꼈다.

만약 관례대로 처리하였으면 임승택은 살아 있는 채로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자식들 역시 모조리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말이다.

결국 호영은 임승택에게 최대한의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그래 봤자 위선이겠지만.’

최대한의 자비가 처형이라고? 웃기는 소리였다.

이 나라에서 무소불위한 권력을 가진 게 바로 그였다.

만약 임승택을 살리고자 했다면 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터.

단지 그가 임승택을 살리지 않은 것은 ‘전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역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례’를 말이다.

그렇다 해도 고작해야 전례를 만들기 싫다는 이유로 충신을 살해하다니, 실로 역겹고 위선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하?”

“음.”

“괜찮으십니까?”

불편한 심기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충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호영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간부들 역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고작해야 사람 한 명 죽인 것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다니.

독기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새삼 경각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결코 여유를 부려도 좋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러네.’

형편이 좋아져도 너무 좋아지긴 했다.

회귀 전까지만 해도 하루 사는 것조차 막막할 정도로 경제적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은 재벌급의 자산가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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