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다른 간부들은 그래도 권력이나 명예에는 미련을 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관직에서 물러나 무엇을 할 생각이지?”
“무공을 익힐 생각입니다.”
“······실마리를 찾은 건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3회 차의 아바타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3회 차의 아바타라면, 초운?”
“예, 무의 천재라고 불리던 초운이라면 S랭크의 무공을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준기가 말하는 초운은 3회 차 때 준기가 사용하던 아바타였다. 즉, 준기는 자신의 전 회 차 아바타를 찾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초운이 S 랭크의 무공을 만들었으려나.’
무공이란 무척이나 난해한 공부였다. 익히기도 쉽지 않았고 당연히 발전시키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무공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로 유저보다는 NPC들의 몫이었다.
즉, 100년의 시간 동안 NPC들이 무공을 발전시켜 놓는다면 유저들은 그것을 그대로 익히는 식이었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공들 역시 NPC들이 창안하고 개선한 것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무공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NPC들의 조력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1회 차 때 A랭크의 무공을 만들어 낸 호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호영은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더욱 절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4회 차가 될 때 동안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영은 3회 차가 끝나기 직전, 수하들의 아바타 중에 최고의 ‘무재’를 지닌 아바타를 선별하였다. 100년 동안 폐관 수련을 시키기 위함이었는데, 그의 사정상 대창심법이나 대창창법을 세상에 풀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
아무튼, 준기의 아바타 초운은 그 과정에서 선별된 최강의 무인이었다. 이미 준기로 인해 대창창법이나 대창심법의 경지가 A랭크에 다다랐고 기본 스킬이나 스텟도 무척이나 출중하였다.
만약 S랭크를 만들 수 있는 무인을 찾는다면 초인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리라.
“설령 S랭크의 무공을 만들지 못했다고 해도 단서 정도는 남겨 뒀겠군. 그의 재능은 확실히 엄청났으니까.”
“예, 그래서 저는 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알았다. 어차피 우리 둘 중에 한 명은 무공에만 전념할 필요가 있기도 하니······. 대신, 찾아낸다면 나에게 가장 먼저 보고해라.”
“물론입니다.”
준기 같은 인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지만 호영이 말했던 것처럼 둘 중 한 명은 무공에만 전념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대한 길드의 무공 사범들이 열심히 여러 무공들을 시험하고 있었고, 북방군이나 친위대에서도 온갖 무공들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들과 준기의 실력 차이는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
대한 길드든, 북방군이나 친위대든 간에 지금 당장 S랭크를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호영으로선 준기의 뜻을 무작정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사장님.”
준기와의 대화가 끝나자 충구가 기다렸다는 듯 호영을 불렀다.
“왜?”
“만주의 국가들과는 이제 어느 정도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 같은데 열도는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습니까?”
“아직도 일본과의 외교 채널은 대마도밖에 없지?”
“예, 상시적으로 유지되는 채널은 대마도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군주들은 현재 외부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대마도의 소오 가문만이 간간이 교역하면서 외교 채널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 이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저는 뭐, 지금 당장 외교적인 수단을 찾기보다 일단 남진부터 하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남진이라······.”
남진!
그 한마디에 간부들이 술렁거리며 관심을 표했다.
“아직은 남진하기에 시기적으로 이르지 않나? 대규모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내년이 되어야 가능할 텐데?”
현재 대한국의 진출 방향은 남쪽으로 결정된 상태였다.
즉, 만주가 아닌 열도로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대마도나 북해도 정도면 올해에도 진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북해도? 왜 하필 북해도지?”
“대마도와 마찬가지로 점령하는 데 큰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곳입니다. 3만 이하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점령할 수 있을 정도죠.”
그 말에 호영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영이 생각하기에도 대마도든, 북해도든 점령하는 데 많은 병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저항도 그리 강할 것 같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전쟁을 하면 다시 민심이 악화될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던 대한국이었다. 내년이라면 몰라도, 올해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호영의 우려에 충구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제 민심이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신합니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흠.”
자신만만한 충구를 보며 호영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정말 안심해도 될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국의 민심은 최악의 폭발 상태에 있었다. 폭동은 예사로운 일이었고 변경 지역의 백성들은 아예 나라를 등지고 만주로 도망칠 정도였다.
사건 사고 역시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았고 말이다.
하지만 충구의 말처럼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만 해도 호영은 치안대에서 사건 사고가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민심 안정화 작업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확실히, 극단이나 가수 같은 예술가들을 이용한 것이 크나큰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 같단 말이지.’
충구가 추진하였던 문화진흥 정책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시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얼굴에 활기가 생겼다는 것부터가 가시적이었으며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연극들로 인해 호영에 대한 지지율 또한 급격하게 변해 갔다.
단순히 민심을 잡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애국심이나 자부심 그리고 왕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까지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도 민심이 불안하신다면 명분을 만들면 그만입니다.”
“명분이라고?”
“백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든다면 민심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일본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여론을 선동하는 겁니다.”
여론을 조작하자는 말이었다.
“그게 통할까? 100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본의 침략은 10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어.”
“제가 선동하자고 말하는 주체는 NPC들이 아닙니다. 유저들입니다. 유저들은 불과 몇 개월 전에 일본군의 침공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유저들이 민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끼칠 수 있습니다. 아니, 끼칠 것입니다. 유저들의 숫자만 10만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험가나 용병, 상인과 여행가 등등 하나같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수도 인근이라면 모를까, 지방이라면 유저들에게 소식을 의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호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저들이 민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말이다.
“북해도 침공이라······.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겠어.”
하지만 호영은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전쟁이란 무척이나 중차대한 일이었으니 조금 더 고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 *
전쟁을 잠시 미룬 호영은 현실에서 휴식기를 가졌다.
휴식기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사흘에 불과하였는데, 그는 사흘 중 무려 이틀을 한 사람과 함께하였다.
“오랜만에 영화 보니까 좋은데요? 우리 앞으로도 자주 영화 보고 다녀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박경선이었다.
“시간 나면 그러자.”
“대한국의 왕이면서 시간은 무슨. 가끔 보면 왕이 제일 바쁜 것 같다니까.”
경선의 말에 호영은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 뭐 하면 센추리 안에서 만나자. 센추리에서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황송하오나, 소녀의 신분은 일개 조합장에 지나지 않은데 어찌 전하와 자주 만날 수 있겠나이까.”
“하하하.”
호영은 크게 웃었다.
센추리 안에서는 제대로 예의를 안 차리는 경선이 현실에서 사극 톤으로 말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궁 안으로 들어오면 돼. 나는 언제든 궁 안에 있으니까.”
“지금 프러포즈하시는 거예요?”
“응? 아니, 이게 왜 프러포즈야.”
“궁으로 들어오시라면서요. 궁녀가 될 게 아니라면 후궁밖에 더 있어요?”
“······.”
호영이 황당한 얼굴을 하자 이번에는 경선이 웃었다.
언제나 무표정하기 그지없던 호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드니 우스웠던 모양이다.
“흠흠, 꼭 후궁이 아니더라도 궁으로 들어올 방법은 많아. 관직을 받거나 작위를 받거나 그도 아니라면 조합장들을 조회에 끼게 할 수도 있고.”
“됐어요.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답니다.”
“굳이 너를 편애하려는 것은 아니야. 네가 지금까지 세운 공들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지. 전장에서 세운 공을 제외하고도 많은 공을 세웠잖아?”
그의 말처럼 경선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공을 세웠다.
2회 차에 지방관이 되어 지방을 안정시킨 것도 그렇지만 3회 차 때 전장에서 세운 공이나 조합장으로서 세운 공은 결코 폄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경선과 그녀의 아바타가 탐험하고 개척한 던전들만 해도 열 군데가 넘었으니 대한국의 마법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작위 한번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아바타의 신분조차 평민에 불과하였다.
그러니만큼 그녀를 조금 대우해 준다고 해서 뒷말이 나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온다 해도 딱히 의미는 없지만.’
현실에서도 센추리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소문 따위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저는 지금처럼 모험도 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더 좋아요. 조합장이라는 이유로 가끔씩 궁으로 가야 되는 것도 귀찮을 정도라니까요.”
“네가 그렇다면야······.”
호영은 아쉬운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경선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되세요?”
“음, 글쎄.”
시간 있냐는 경선의 물음에 호영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경선과의 만남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모처럼 행복감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껴 본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현재 중차대한 시국에 놓여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단 하루도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의 하루는 센추리에선 무려 나흘이었기 때문이다.
“정 시간이 없다면 어쩔 수 없고요. 저도 사장님 사정 어떤지 아는데 억지 부릴 생각은 없어요. 다만 조금 아쉽네요.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었는데.”
“소개시켜 줄 사람? 누군데?”
“제 아버지요.”
“어? 아버지라니?”
“제 아버지가 사장님 보고 싶다하네요.”
그 말에 호영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선과 사귄 지 불과 한 달도 안되었건만 벌써부터 상대의 부모님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 상견례 같은 건 아니고요. 말 그대로 당신이라는 사람이 궁금한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