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49화 (249/345)

# 249

하지만 이틀 전, 오가키성에서 난데없이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난 이후부터 봉신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 우려의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황자가 자신의 측근들만 숙청하면 상관없겠지만, 극단적으로 변해 버린 성향을 생각하면 봉신 귀족들도 마냥 안심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지금 그들이 비밀스럽게 모임을 가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대처 방안을 마련하려고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러다가 우리들도 숙청하려 들 수 있습니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제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이곳에서는 굴러온 돌에 불과한데.”

“오만한 황족이잖아요.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숙청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불편해질 것은 확실하겠네요.”

“하아, 정말 곤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대책을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저 불만만 토로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자를 상대로 일개 봉신 귀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불만을 토로하는 봉신 귀족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토키치로는 이번에도 특유의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봉신 귀족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어떤 방법입니까?”

“백작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오다 백작의 힘을 빌리자는 말입니까?”

“예.”

오다 백작을 불러들이자는 토키치로의 주장에 봉신 귀족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라오 경, 백작의 힘을 빌려서 득 될 것이 뭐가 있겠소? 오히려 황자와의 관계만 더 안 좋아질 텐데.”

“백작의 힘으로 황자를 압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작이 지원해 준다면 제아무리 황자라 해도 우리를 명분 없이 숙청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늑대를 쫓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꼴이 되지 않겠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반대로 황자를 이용해 백작을 압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다 백작도 황실을 두려워하니 황자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둘 사이를 적절하게 이용하자는 것이군요,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방향으로.”

“예, 어떤 것 같습니까?”

토키치로의 물음에 봉신 귀족들 대부분이 긍정의 뜻을 표했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확실히 백작의 힘을 빌린다면 황자가 우리를 숙청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숙청은커녕 우리가 오히려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겠는데요? 황자도 백작의 간섭을 두려워할 것이니 말이죠.”

물론 모두가 긍정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자칫하다간 황자와 백작 모두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오다 백작이나 황자는 모두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약자는 우리들이니, 조금 더 신중히 행동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같은 우려에 토키치로가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중히 행동하려다가 시간이 지체된다면 이한용처럼 명분도 없이 목이 뎅강 잘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황자가 오가키성에서 하고 있는 행동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야말로 미치광이가 따로 없지 않습니까? 폭주하고 있는 황자의 손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도는 백작의 힘을 빌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

토키치로의 말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뱉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황자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다간 황자를 따라온 한국인들처럼 숙청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오다 백작의 힘을 빌리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선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들도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봉신 귀족들이 이내 결정을 내렸다.

“아라오 경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오다 백작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일본인이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미치광이로 변해 버린 황자의 마수에서 살아남으려면 외부의 조력자를 구할 수밖에 없소. 그리고 외부의 조력자는 오다 백작뿐이지.”

사람들의 대답을 들으며 토키치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크. 좋아! 계획했던 대로 돌아가는구나! 이제 곧 있으면 오다 가문과 황자 간에 싸움이 일어나겠어.’

봉신 귀족들은 선동하여 은연중에 오다 백작을 불러들인다는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었던 아라오 토키치로.

그는 사실 봉신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봉신 귀족들의 몰락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두 세력이 싸우는 사이, 우리 일본 해방 전선은 봉신 귀족들의 영지를 먹는다. 그리고 다음에는 기후 지역 전체를 노리는 거야!’

일본 해방 전선.

토키치로가 소속된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된 일본 해방 전선은 오다 백작과 황자 대혼 사이를 이간하여 어부지리를 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기후 지역, 아니 일본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첫걸음을 바로 이곳, 오가키성에서 시작하려는 것이다.

#오다 백작 가문

한국 출신과 일본 출신으로 혼재되어 있는 수하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호영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이한용을 두려워했으면 두려워했지 그 누구도 황자 대혼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주일 전에 있었던 피의 숙청으로 수하들은 물론이요, 병사들과 일반 영지민들까지 호영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모두에게 주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드디어 권위를 되찾았다.’

비록 공포에서 비롯된 권위였지만 어쨌든 권위는 권위. 호영은 수하들의 표정을 보고 만족해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마음이었고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잡았느냐?”

“예, 전하.”

박제신이라는 문관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자 호영이 다시금 물었다.

“배후는?”

“나흘에 걸쳐 심문한 결과, 일본 해방 전선이 배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해방 전선이라······.”

이제는 정겹게까지 느껴지는 그 이름에 호영은 작게 웃었다.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일본 해방 전선의 목적은 이름 그대로 일본을 해방시키는 것.

호영은 대한 제국의 황자이자 일본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니 언젠가 일본 해방 전선을 만나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충구의 작업으로 일본 해방 전선의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슨 목적인지는 파악했느냐?”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그저 황자 전하의 악명을 퍼뜨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밖에는······.”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알아내라.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고작 나의 악명을 퍼뜨리는 게 목적은 아닐 테니까.”

“황자 전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자신의 악명을 퍼뜨리는지, 신경 쓰이기는 하였지만 100년 전과 달리 세력이 많이 악화된 일본 해방 전선이었기에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본 해방 전선에서 공작을 가해 봤자 호영을 위협할 수단이 없기도 하였고 말이다.

그래서 호영은 일본 해방 전선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봉신 귀족들이 간담회에 불참한다고 했지?”

“예, 한 명도 빠짐없이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작위라고는 기껏해 봐야 기사에 불과한 것들이 나의 초대를 거부하다니. 일본인들은 아직도 나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구나.”

“그보다는 소문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내가 자기들을 죽일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한용을 비롯한 친황제 세력을 한꺼번에 정리함으로써 권력을 확립하였으니 더 이상 피를 볼 생각이 없었다.

물론 봉신 귀족들이 그의 통제에 따라 주지 않는다면 숙청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피를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일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봉신 귀족들이건 영주들이건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일본 해방 전선이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그의 이미지는 안 좋아졌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군.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해 주는 수밖에. 무휼.”

“부르셨습니까, 황자 전하!”

“지금 바로 병사들을 동원하여 봉신 귀족들을 잡아 와라. 만약 저항한다면 즉결 처분하여도 상관없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일체의 주저 없이 명을 받드는 무휼을 보며 다른 이들은 그저 질린 얼굴을 하였다.

봉신 귀족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호영이나 그런 명령을 당연하게 받드는 무휼이나, 그들에게는 두렵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작위가 기껏해 봐야 기사에 불과한 봉신 귀족들이라 해도 그들은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이나 다를 게 없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사병도 가지고 있었고 100년 동안 쌓아 놓은 재력도 결코 작지 않았다.

제아무리 황자라 해도 봉신 귀족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에겐 시간이 없다.’

그러나 호영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봉신 귀족을 상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려면 하루빨리 내지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지로 돌아가려면 황제의 견제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하였다.

이곳에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영지전을 통해 다른 영주, 다른 황자의 힘을 흡수하는 것.

그렇기에 영주나 황자를 상대하는 데 시간을 썼으면 썼지, 봉신 귀족들을 상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황자 전하의 명령을 완수하였습니다!”

불과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무휼이 임무를 완수하고 호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홉 명의 봉신 귀족들을 모조리 잡아 온 것이다.

“수고했다.”

“소장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혹시 저항하는 이들은 없었더냐?”

“몇몇이 완강하게 버티려고 하였지만 소장이 강제로 끌고 왔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무휼을 보며 호영은 피식 웃었다.

2천의 병력으로 하루 만에 봉신 귀족 전체를 잡아 온 것은 분명 자랑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무휼이 말하니 왠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충성도도 충성도지만 역시 장수로서의 능력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황자 전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때 무휼이 잡아 온 귀족 하나가 살벌한 얼굴을 하고서 외쳤다. 끌려온 상황임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사, 아라오라고 했던가?”

“예! 소신이 바로 이 나라의 당당한 귀족, 아라오입니다.”

“당당한 귀족이라······. 그래서 나에게 소리를 지른 것인가?”

호영의 말에 잠시 움찔한 토키치로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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