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이 꼴을 보십시오!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습니까! 황자 전하, 소신은 아라오 가문의 수장입니다.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내 손길을 거부하지 말았어야지.”
“황자 전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폭군이 되어 버렸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런데 소신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문을 듣고 나를 두려워하였으면 지금은 두렵지 않은 것인가? 다른 이들은 조용한데 남작만 요란하게 떠드는구나.”
“소신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아라오 가문의 수장으로서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부디 저희 봉신 귀족들을 풀어 주십시오. 저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좋다. 대신 경들이 해 줘야 할 것이 있다.”
“······이 상황에서 요구를 하다니요. 이것은 불합리한 강요입니다.”
“맞아. 경의 말처럼 나는 강요를 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뭐? 원래 약자는 강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고귀한 황자께서 대놓고 협박을 하시는군요.”
“계속 나의 말에 토를 다는데, 경은 목숨을 그리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
“······.”
토키치로가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였다. 아무래도 협박이 통한 것 같았다.
그러자 호영은 피식 웃고는 다른 봉신 귀족들에게 물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떻지? 나의 지시를 따르고 풀려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즉결 처분을 당할 것인가?”
“저는······ 황자 전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소신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소신은 전하의 뜻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두 명의 봉신 귀족이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의 뜻을 밝히자 다른 봉신 귀족들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만약 고결한 신념을 가졌다면 목숨 정도는 초개같이 버릴 수 있겠지만, 봉신 귀족들 중에 고결한 신념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작은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귀족일 뿐이었다.
비록 호영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겠지만 자존심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봉신 귀족들의 분위기는 호영에게 복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협박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황자 전하라 해도 봉신 귀족들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토키치로가 다시 한 번 완강한 반응을 내비쳤다. 호영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경들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소신들을 죽였다가는 황자 전하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경들을 죽이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내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가?”
“오다 백작의 차남이 1만의 군세를 이끌고 오가키성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황자 전하를 견제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 말에 호영의 뒤편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다 백작이 등장한다는 소식에 호영의 수하들이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하였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황자 전하가 제아무리 고귀한 황족이라 하셔도 이곳에서의 영향력은 오다 백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오다 백작이 소신들을 구하기 위해 1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황자 전하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2배 이상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
“말이 없으시군요. 이제 황자 전하께서도 이해하셨나 봅니다. 지금 황자 전하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빈정거리는 토키치로의 얼굴은 승리감으로 도취되어 있었다. 말로서 호영을 이겨 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토키치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서걱!
왜냐하면 그의 목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말만 하는군.”
토키치로의 목이 갈라지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지에서야 기사들을 별거 아닌 존재로 취급받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기사 역시 고귀한 피를 가진 귀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엄청난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봉신 귀족이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죽임을 당하였으니 같은 봉신 귀족들은 물론이요, 내지 출신의 관리 및 장수 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전하.”
박제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호영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호영의 눈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토키치로를 즉결 처분한 것에 대해 직언을 하려고 했던 박제신이지만 호영의 냉랭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자 도저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눈빛으로 박제신을 물리친 호영은 나머지 봉신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이중에도 아라오처럼 오다 백작을 믿고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 있나?”
“······.”
“다행이군. 수하를 베는 것은 나도 조금 지겨웠는데 말이야. 아라오도 처음부터 나를 따라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무덤덤하게 말하는 호영을 보며 모두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호영에 관한 소문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악령에 씌어서 미치광이 폭군이 되어 버렸다는 그 소문 말이다.
하기야 황제가 신임하는 내관을 죽이고 봉신 귀족인 토키치로를 죽였으니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오다 백작의 군세가 다가오는 상황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호영은 결코 미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다 백작의 군세라······. 빨리 왔으면 좋겠군.’
차분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오다 백작의 군세를 기다리는 호영.
그 모습만 봐도 오다 백작에 대한 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 *
토키치로의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호영이 봉신 귀족들에게서 복종 맹세를 받은 날, 서쪽에서부터 1만에 달하는 군세가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토키치로의 말처럼 이 일대를 지배하는 철혈의 통치자, 오다 백작의 군세가 오가키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내일쯤이면 성 앞에 당도할 것입니다.”
“규모는?”
“최, 최소 1만이 넘는 것 같습니다.”
정찰병의 말에 제장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설마설마했던 오다 백작의 군세가 기어코 오가키성에서 불과 반나절도 안 되는 곳까지 진격하였다.
오가키성을 노리고 있음이 확실해진 것이다.
“드디어 왔군.”
그러나 호영은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엿보였는데 마치 기다리던 손님이 온 것처럼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무휼 장군, 아군 병력들의 상태는 어떤가?”
“무공은커녕 군기도 잡혀 있지 않은 오합지졸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한국어도 알아듣지 못해 일상적인 명령은 아예 내릴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장수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겁먹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무휼이 절망적인 보고를 하였다.
오다 백작의 군세와 비교했을 때 숫자에서 이미 밀리는 상황인데, 병사들의 질까지 형편없다는 보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그저 무심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의 아바타, 대혼은 정치는 물론이요, 다른 황자들처럼 군사를 키우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황자였다.
더군다나 오가키성의 본래 주인이었던 키노시타 남작이 잘 조직되어 있던 자신의 사병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오가키성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애초에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니 지금 무휼이 통솔하는 병사들의 상태가 오합지졸에 가까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출정 준비는?”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내일 당장 출정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좋아.”
“화, 황자 전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탁이라는 장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호영을 불렀다.
“뭐지?”
“지금 출정 준비를 물으셨는데, 설마 내일 오다 백작을 상대로 반격에 나서실 생각입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군.”
“당연하다는 말씀은?”
“감히 나를 상대로 군사를 동원하였는데 가만히 당해 줄 수만은 없지 않나?”
“······!”
정탁이 크게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장수들의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1만의 군세를 어찌 막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반격까지 준비하고 있다니 장수들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적의 군세는 1만이 넘는데, 그들은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그것은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하, 하지만······.”
내일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작전을 내일 알려 주겠다니?
정탁은 항명이라도 할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호영은 정탁의 표정을 봤으면서도 끝끝내 작전을 알려 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장수들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황제의 사람일 수도, 유저일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지금 그를 노리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제국의 황제부터 시작해서 일본 해방 전선과 일본 영주들 그리고 여전히 야망을 버리지 않은 한국 유저들까지.
특히나 지금의 호영은 일개 황자에다 거느린 병사 수는 5천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의 정체가 발각되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노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무휼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설 때가 된다면 그때 장수들을 한번 믿어 보리라.
다음 날이 되자, 마침내 오다 백작의 군세가 당도했다.
1만이 조금 넘는 대략 1만 2천 정도쯤 되어 보이는 군세였다.
군대를 이끄는 장수는 오다 백작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 알려지기를, 무공이 뛰어나고 인망이 두텁다는 인물이었다.
오다 노부카쓰는 오다 백작에게도 꽤나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는데, 차남인데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백작의 차남이 왔으니, 마중을 가 줘야겠군.”
노부카쓰가 오가키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호영은 장수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외성으로 향하였다.
물론 그 혼자만 당당하였고 장수들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또는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영은 그런 장수들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픽 웃고는 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다 노부카쓰를 바라보았다.
활과 조총의 사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선 노부카쓰는 위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만 보면 백작 가문의 일개 차남이 아닌, 마치 왕이나 황제를 보는 것 같았다.
오가키성의 병사들은 그런 노부카쓰를 보고는 더욱 두려웠는지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움찔거렸다.
호영의 곁에 선 장수들 역시 병사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영지전이 성행하여 전쟁 경험이 많은 일본 본섬의 장수들과 다르게 전쟁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지 출신들이라 그런지, 동요가 극심했다.
만약 노부카쓰가 공격을 명령한다면 당장이라도 항복을 할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겠지.’
안 그래도 호영에게 불만을 품은 장수들이 적지 않은 상황.
호영을 죽이고 투항하는 자들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질 것이 확실해 보이는 전쟁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