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황제를 제외하면 신분상으로 가장 위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숨은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황위 경쟁에서는 황자의 죽음도 그리 특별한 게 아니야. 지금의 황제도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사람이잖아? 그러니 황자를 죽였다고 나를 지지하지 않는 일은 없어. 아무튼,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뿐인가?”
“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희를 죽이면 앞으로 누가 투항하겠습니까? 황태자가 되고 싶다면 저희를 살리는 게 나을 겁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기 때문일까?
대보가 의외로 상식적인 말을 하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세 사람을 죽이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적장들은 항복을 꺼리게 될 것이다.
항복해도 어차피 죽는다면 항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나는 오히려 너희를 죽임으로써 다른 황자나 영주들이 저항할 생각을 못하게 만들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들은 일종의 본보기가 되는 셈이지.”
적이 투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즉, 압도적인 공포로 상대를 압박한다면 결사 항전은커녕 아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본보기라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딱히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너는 이제 죽을 테니까.”
“······혀, 형님! 크헉!”
호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마지막 남은 대부를 바라보았다.
“너는 할 말이 있나?”
“사, 살려만 주십시오.”
“이미 늦었다.”
서걱.
세 사람이 죽자, 전장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우와아아아아! 이겼다!”
하지만 곧이어 함성이 울려 퍼졌다.
황자들을 죽인 것은 병사들의 입장에서도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어쨌든 승리는 승리였다.
#내전 종식
전투에서 압승하고 대부, 대국, 대보 삼 형제를 죽인 이후, 일본 전역에서 호영의 명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노부카쓰의 허수아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감이 희박한 일개 황자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자 중 하나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나자 중부는 물론이요, 서부와 동부에서도 사람을 보내거나 서신을 보내왔다.
대부분이 호영과 동맹이나 친선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였다.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자가 되었으니 이제 슬슬 여론을 선동해야겠어. 작금의 대한 제국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이야.’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위기에 빠진 대한 제국.
영주들은 몰라도 황자들 중에서는 사병을 동원해서라도 대한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아직 황제가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내지로 이동한 황자는 없었으나 계기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지원군을 보낼 황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계기라는 것은 황위 계승 후보자가 만들어 줄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지금의 여론만 잘 이용한다면 아무리 대부와 대국 그리고 대보를 죽인 일로 황자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황자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게 가능할 수 있었다.
“오타키 남작의 서신이 왔습니다.”
그때 갑자기 노부카쓰가 나타나며 말을 건넸다.
호영은 상념에서 벗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뭐라 쓰여 있더냐?”
“동맹을······ 정확히는 혼인 동맹을 제안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군.”
“결국엔 바로 이웃에 있는 나가노의 영주까지 혼인 동맹을 제안하였군요. 나가노 지역을 장악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타키 남작의 세력은 어떻지?”
“석고 수는 대략 10만 석에, 병력은 1천이 조금 안 됩니다.”
“그 정도면 혼인을 할 필요까지는 없겠는데.”
“대신 오타키 남작은 주변의 영주들과 혼맥으로 얽혀 있습니다. 만약 그를 얻으신다면 주변의 영주들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가노 지역은 고만고만한 영주들밖에 없었다고 했지?”
“예, 대부분이 오타키 남작과 비슷한 세력을 가진 영주들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타키 남작과 혼인 동맹을 해도 나쁘지 않겠군. 싸우지 않고도 나가노 지역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부카쓰가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오타키 남작의 여식과 혼인을 하면 벌써 열 명째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후대를 생각하면 이 이상 첩을 늘리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주제넘는군. 군사에 관한 일이라면 모를까, 나의 혼인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하다니 말이야.”
“죄송합니다.”
노부카쓰를 지적한 호영이지만 그렇다고 노부카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처첩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나라에 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처첩들이 많으면, 황자들과 외척들이 권력 암투를 벌여 국가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미래의 권력 암투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했던 것처럼 황자들을 전부 일본에다 보내 거기서 황위 경쟁을 시킨다면 권력 암투를 최소화할 수 있다.’
결국 권력 암투가 문제 되는 원인은 황위 경쟁에 있었다.
즉, 누가 황제가 되느냐를 두고 권력 암투를 벌인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황제가 했던 것처럼 황자들을 전부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자격을 일본 일통으로 정한다면 권력 암투는 일본에서만 벌어질 터.
그로써 권력 암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덤으로 황자들의 자질을 시험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나는 일본에서만 최소 스무 명의 영주들과 혼인 동맹을 할 생각이다.”
“······스무 명,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면 일본에는 전하의 외척과 외척이 아닌 자들로 나뉠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호영의 말에 노부카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호영의 말에 노부카쓰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워하였다.
“왜냐하면 외척이 아닌 자들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까.”
“······!”
그의 말은 한 가지를 의미하였다.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영주들은 무조건 배제한다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을 지금보다 강압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의미였다.
“영주들의 불만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전하를 따르는 영주들도 불만을 표할 수 있습니다.”
“경은 어떻지? 경도 불만을 표할 것인가?”
“저는, 저는······.”
노부카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답지 않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복종하느냐, 아니면 저항하느냐의 양자택일을 요구받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노부카쓰의 모습을 보며 호영이 무심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오다.”
“······예.”
“내가 전에 말했지, 일본은 천하가 아니라고. 나와 함께 진짜 천하로 가 보자고.”
“······.”
“나와 같이 대륙으로 가자. 이 좁은 세상에 연연하지 마.”
“그 말씀은······.”
“영지를 버리고 따라오라는 거다.”
“······!”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을 영지를 버리라니!
실로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노부카쓰는 입을 꾹 다물며 고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른 영주였다면 결코 고민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야망이 큰 사내였다.
야망가라는 족속은 안정적인 성공보다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더 큰 성공을 노리는 자들이었다.
그 끝이 설령 낭떠러지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호영은 더 큰 성공, 즉 휘황찬란한 명예와 보화를 약속하였다.
스스로를 일본 제일이라 생각하는 노부카쓰로선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주군.”
“뭐라고?”
“황자 전하는 앞으로 저의 주군이십니다! 부디 저의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전하!”
쿵!
결단을 내린 노부카쓰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결국 호영을 진정한 주군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반반이었는데······ 다행이군.’
방금까지 표정 하나 없던 호영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노부카쓰를 단순한 지지자가 아닌, 최측근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 것이다.
“고맙다. 경의 주군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
호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노부카쓰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노부카쓰가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군······!”
떨리는 목소리로 호영을 부르는 노부카쓰.
지금 그의 얼굴은 로열패밀리의 몇몇 광신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오다, 주군이 된 기념으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예, 전하. 어떤 명령이든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호영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경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서진하라.”
“황자 전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총동원 명령!
만약 노부카쓰가 복종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절대 내리지 않았을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오다 백작령과 오다 백작 가문의 병사들은 노부카쓰의 사병이고 영지였지 호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영은 노부카쓰를 휘하에 두고 있으면서도 소극적인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로열패밀리를 제외하고는 아직 그의 세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노부카쓰가 진심으로 복종을 맹세한 지금은 달랐다.
노부카쓰의 것은 그의 것.
이제 오다 백작 가문의 사병은 그의 사병이나 다를 게 없었다.
* * *
오다 백작이 가문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서부로 진격하고, 호영이 오타키 남작과 혼인 동맹을 맺자 정세가 다시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수십 명도 넘는 남작들 중에서 한 명과 혼인 동맹을 맺었을 뿐이지만 오타키 남작의 영향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나가노 지역에 한해서는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타키 남작을 얻는다는 것은 곧 나가노 지역 전체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그리고 나가노 지역을 얻는다는 것은 호영이 마침내 중부를 넘어 동부나 서부로 진출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전국구’ 세력가가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단 세 명밖에 없는 백작 중 하나인 오다 백작이 따른다는 이유로 유력한 계승 후보로 불리고 있었는데, 이시카와와 도야마에 이어 나가노 지역까지 얻었으니 동부와 서부에서도 그를 따르는 세력이 즐비해졌다.
“황자들까지 간을 보기 시작했군.”
세 명의 황자들, 즉 대부와 대국 그리고 대보를 죽인 이후 황족 사이에서 호영의 악명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자였다. 고귀한 혈통을 가진 황자들을 호영이 직접 죽였으니 악명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악명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저항한다면 황자라 해도 살려 주지 않는다!
신분제가 등장한 이후로 일본에서는 귀족이라면 영지를 빼앗겨도 목숨까지 빼앗기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암묵적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