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잠시 고민하던 고다 진은 유우에게 물었다.
“영감, 어디로 갈 생각인데?”
-필리핀 아니면 대만.
“필리핀과 대만이라······.”
-어쩌면 두 나라를 동시에 진출해도 괜찮을 거야. 우리 정도라면 두 나라를 동시에 꿰차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듣기만 해도 탐이 났다. 조그만 영지도 아니고 하나의 독립된 나라를 꿰찬다니!
가능성 여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확실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고다 진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영감,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 때문인가?
“뭐,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고, 영감의 말을 듣고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거든.”
-재미난 생각?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 줄게. 아직은 확실한 게 없어서.”
-알았다.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만약에 생각이 바뀐다면 연락하고. 너의 자리 정도는 만들어 둘 테니.
유우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고다 진은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흑막처럼 일본을 뒤에서 조종하던 노인네가 저렇게 퇴물이 되어 버릴 줄이야. 마치 패배주의에 찌든 요즘의 일본인들을 보는 거 같군.’
고다 진은 사라진 유우를 생각하며 조소를 지었다.
한때 그가 꺾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세리자와 유우는 비참한 패배자로 전락하였다. 모두 대혼이라는 유저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대로 간다면 고다 진 또한 비참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기는커녕 대혼에게 끝까지 맞서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만용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비록 저돌적이고 다혈질적이라지만 결코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를 곧잘 쓰는 편이었다.
“일본에서 이길 수 없다면 조선에서 이기면 돼. 어차피 황태자를 결정하는 것은 황제니까.”
사람들은 지금 착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비록 전쟁으로 인해 힘이 약해졌다지만, 황태자를 책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뿐이었다.
즉, 일본에서 아무리 열심히 싸워 세력을 길러 봤자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고다 진은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데리고 내지로 갈 생각을 하였다. 황제에게 직접 황태자 책봉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내지로 돌아오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셈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에게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 * *
교토 왕궁.
호영은 흔히 공왕의 왕궁이라 부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어떠냐? 제국의 황궁 못지않게 운치 있지 않느냐?”
그의 뒤에는 두 명의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호영의 물음에 두 사람은 살짝 긴장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소제가 생각하기에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운치 있고 분위기도 괜찮습니다.”
“이전 공왕이 사치를 즐기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던데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형님.”
두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자였는데, 보름 정도 전에 호영에게 항복하여 며칠 전부터 호영의 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예? 그게 무슨?”
“형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소제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호영은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황위 계승을 다투는 경쟁자로서 언제 서로가 서로를 죽여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다.
실제로 대보, 대국, 대부가 호영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고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형제임에도 두 사람의 태도는 마치 황제를 대하듯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이 호영의 손에 달려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나는 어디까지나 공왕의 작위를 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인데 말이야. 너희들, 설마 나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허억!”
“아닙니다! 소제가 어찌 감히 형님의 자리를 노리겠습니까! 소제는 지금 형님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군.”
호영은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걸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두 사람은 공왕이라는 작위에 흥미가 있나?”
“소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 외모는 전형적인 학자풍으로 다소 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대후가 가장 먼저 답변하였다.
참고로 대후는 황실에 몇 없는 마법사였는데, 약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마법 실력이 아주 출중하였다.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공왕으로 임명한다고 해도 거절할 건가?”
“아닙니다. 소제가 어찌 형님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시켜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지나치게 겸손한 발언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황위 경쟁에서도 대후는 항상 소극적으로만 행동했고 결국에는 호영에게 항복하였으니 말이다.
“대백은? 너도 욕심이 없나?”
“형님! 소제는 형님께서 공왕의 작위를 내려 주신다면 충성을 다해서 형님 전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대후와는 다르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대백이었다.
‘탐욕적이지만 노골적이지 않고 눈치도 빠르단 말이지. 지력 수치도 내가 기억하기론 30이 넘었고 말이야. 아마 대백이 공왕이 된다면 내가 지시하는 일들을 충실하게 이행해 낼 터.’
그 역시 대후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는데, 무공이나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능력은 출중한 편이었다.
지력이 뛰어난 두뇌파였던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대백의 성격이었다.
유약하고 다소 우유부단한 대후와는 다르게 대백은 영악하고 야망이 큰 편에 속하였다.
어쩌면 지금도 호영에게 복종하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둘 중에 누구를 차기 공왕으로 임명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공왕이 되고 싶다면 공을 세우면 된다.”
“공이라면?”
“나를 황태자로 만들 때나, 아니면 이후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 때 공을 세우라는 말이다.”
호영의 말에 대백이 눈을 빛냈다.
공을 세워 공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이다.
“참고로, 대후는 이미 큰 공을 세웠으니 가능성이 제법 높을 거야.”
“소, 소제가 무슨 공을?”
“나의 군세에 저항하지 않고 투항하였으니 그게 공이지 뭐 다른 게 공이겠느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소제가 어찌 형님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황자들은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지. 그래서 대부, 대보, 대국은 죽었고 나머지 황자들 역시 유배형을 당하게 될 거고 말이야.”
대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대후와 다르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오다 노부카쓰에게 패배한 이후에야 호영에게 투항하였다.
그나마 병력이 제법 남아 있을 때 투항하였고 또 이후의 전투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여 다른 황자들처럼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호영의 수하가 된 지금으로썬 과거가 찝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공을 세워라. 아직 나는 너를 어찌할지 판단을 내리지 않았으니까.’
호영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너희가 각자 맡고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하면 나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내려 줄 거다. 공왕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맡고 있는 임무는 단순했다.
바로 황자들과 영주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두 사람의 활약으로 많은 이들이 호영의 세력에 투항한 상태였다.
대후 같은 경우는 인덕이 많아 따르는 황자들이 많았고, 대백 같은 경우는 발이 넓어 일본 영주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호영의 지시를 어렵지 않게 이행할 수 있었는데 둘의 인맥이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경쟁을 유발하기 좋았다.
즉, 대후가 동부를 맡았고 대백이 서부를 맡았으니 누가 더 많은 이들을 포섭하였는지 경쟁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남아 있는 황자들이나 영주들이 언제쯤 항복할 것 같으냐? 다 합하면 스무 명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말이야.”
어느덧 5회 차가 시작된 지도 4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대한 제국이 청나라의 침입을 받기 시작한 지는 어언 3개월째였다.
호영으로선 꽤나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왜냐하면 대한 제국이 언제 패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소제가 생각하기로 동부는 보름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초씨 가문에서 본격적으로 나섰고, 동북부에서도 우리 측에 전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다 가문은?”
동부에서 초씨 가문 다음으로 세력이 큰 것이 바로 고다 가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대 파벌의 수장 격이라고 볼 수 있는 가문이었는데, 그들은 명분까지 가지고 있었다.
황자, 대방이 고다 가문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조금 이상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최근에 올라온 보고까지, 그들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파악 못 한 것인가?”
“······예. 송구합니다.”
호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후에게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고다 가문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을 뿐.
“혹시 다른 나라로 간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대백이 끼어들며 그런 말을 하였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오늘 들어온 소식인데 서부의 세리자와 자작이 남쪽 나라로 도피했다고 합니다.”
“세리자와 자작이 도피를 했다고? 그게 사실이냐?”
“예, 사병과 재물을 가지고 이미 배를 타고 떠났답니다.”
“······.”
대백의 말에 호영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신선조의 국장이었던 자가 일본을 떠난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하지만 만약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호영으로선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할 일이었다.
용병 연합의 수장이었던 미치이 히사유키는 항복했다지만 4회 차까지 낭인 조직의 수장이었던 그들은 여전히 호영에게 거슬리는 존재들이었다.
유저들에 대한 영향력도 상당하였고 처세술도 뛰어나며 심지어 거느리고 있는 세력까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대백의 말대로 고다 가문이 다른 나라로 떠났다면 동부도 얼마 걸리지 않겠구나. 물론 세리자와 가문이 사라진 서부보다는 늦겠지만 말이야.”
“예, 서부는 길어 봐야 일주일 정도 걸릴 것입니다.”
“일주일이라······. 동부는?”
“동부는······ 열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물론 고다 가문이 남쪽으로 간 게 맞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고다 가문의 경우는 아무래도 자세하게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일주일과 열흘이라면 나쁘지 않군.”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중부는 이미 예전에 장악하였고 남은 것은 서부와 동부였다.
그리고 그 서부와 동부도 곧 그의 것이 될 터.
일본을 그의 세력으로 만드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제 슬슬 강 사령관에게 말해 수송 함대를 불러와야겠어.’
서부와 동부를 장악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