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누르하치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나 앞으로의 전략 같은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는 전율에 휩싸인 채 나라를 건 한판 승부만을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떠올렸다.
* * *
“부사령관님! 적의 야습입니다!”
“호오, 도망가기 바쁘던 그놈들이 야습을 시도했다고?”
노부카쓰는 전령의 보고에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패색이 완연했던 청나라군이, 갑자기 어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회전을 피하지도 않았고 꽁지 빠지게 도망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야간이 되니 야습까지 시도하였다.
마치 사기를 되찾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르하치가 왔다는 이유로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뀌었다는 것인가.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자인 것 같군.’
만주를 지배하는 위대한 정복자, 누르하치!
알려진 바로는 유저인 게 분명한데도 군중을 장악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존재 유무만으로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노부카쓰는 누르하치를 생각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천하의 영걸이라 자부하는 노부카쓰다 보니, 만주의 위대한 영웅인 누르하치와 한번 붙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누르하치와 상대하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누르하치라도 자신보다는 호영을 먼저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부사령관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전령의 외침에 노부카쓰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기병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리도록.”
“충!”
다그닥, 다그닥!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기병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노부카쓰는 머지않아 있을 누르하치의 공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청나라의 최고 정예부대, 팔기군.
누르하치는 바로 그 팔기군을 무려 3만이나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3만의 병력은 아마 호영이 담당하고 있는 서부 전선으로 향하게 될 터.
‘과연 전하께서 누르하치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있을지 걱정이군.’
주력이 절반씩 나뉘어 있다면 모를까, 한국군의 주력은 거의 동부 전선에 밀집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데려온 최정예 병력이 전부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2군단장 초성부터 김성근이나 슌지, 타로 형제 등 S랭크부터 A랭크의 고수들이 대부분 동부 전선에 배치된 상태인데 아무리 호영이 대단하다 해도 장수와 병사의 질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누르하치라는 강적을 이겨 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노부카쓰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걱정을 떨쳐 냈다.
‘아니, 전하께서는 결국에 이겨 내실 것이다. 그분은 어떤 위기에서도 반드시 승리하는 위대한 영웅이니까.’
그런 사람이기에 스스로 천하의 영걸이라 자부하는 노부카쓰가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이리라.
* * *
적괴, 누르하치의 등장 이후로 전쟁 흐름이 또다시 바뀌어 버렸다.
북진을 거듭하던 대한 제국의 기세가 주춤하더니 서부 전선, 즉 평안도에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서둘러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호영은 강행군을 지시하여 신속하게 경기도로 이동하였다.
아쉽게도 수송 함대는 구주 지원군을 수송하고 있어 육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직 의주에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참전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충구의 말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겨우 평안도 남부까지 수복하나 했더니, 순식간에 평안도 남부는 물론이요, 황해도 북부까지 잃어버렸다.
단 한 명의 존재로 이렇게 된 것이다.
“3군단이 패배한 이유는?”
“누르하치가 복귀하여 적군의 사기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 아닌가?”
“······화약이 떨어졌답니다.”
“화약의 분배를 어떻게 했기에 화약이 다 소모된 것이지?”
호영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만약 다른 나라로 원정을 나간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식량도 챙기기 어려운 판국에 화약까지 챙기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다른 나라로 원정해서 싸우는 것이 아닌, 아국의 땅에서 싸우는 전쟁이었다.
보급에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적군이 북조선 용병들을 버리는 패로 사용하여 아군의 화약 소모가 극대화되게끔 유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군의 화약이 다 떨어질 때쯤 청나라 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사용했고?”
“예, 그렇습니다.”
“발이 느린 장창 부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겠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3군단이 참패한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테르시오 방진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이 패착이었다.
‘하기야, 테르시오 방진이라고 완벽한 전술인 것은 아니지. 대포에도 약하고 지금처럼 화약이 떨어지면 무용지물이 되니까.’
특히나 한반도 같은 경우는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화약을 사용하는 것에 제한이 따르는 편이었다.
화약뿐만이 아니라 장창 부대도 지형에 따라 제한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고 말이다.
결국 평안도에서 있었던 패배가 아니더라도 테르시오 방진은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는 전술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기병이 필요할 것 같다.”
화약이 없으면 테르시오 방진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적이 알게 된 이상, 다른 전술을 생각해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비가 오는 날을 노린다든가, 아니면 특수부대를 보내 화약을 불태우거나 한다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병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은 같은 기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병은 거의 대부분이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까?”
호영 휘하의 군단 중에 가장 많은 기병을 가지고 있는 군단은 2군단이었다.
동부의 영주들은 100년 전부터 군마를 기르기 시작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대규모 기병을 운용하는 세력들이 되었다.
2군단 역시 동부의 영주들이 주로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병의 비율이 다른 군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2군단은 지금 동부 전선, 즉 함경도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병 부대들 역시 동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서부 전선을 지휘하는 호영으로선 기병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호영이 이끄는 5만의 병력 중에서 기병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다 가문의 기병도 있고 황제가 지원해 준 기병도 있으니까.
그러나 황제가 지원해준 2만의 병력 중에 기병은 불과 1천에 불과하였고 제1 군단에 소속되어 있는 오다 가문의 병력도 기병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오다 가문은 다양한 병종의 조합을 중시하는 가문이라, 동부 영주들처럼 무식할 정도로 기병에 올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호영의 휘하에 있는 기병의 숫자는 7천 정도에 불과하였다.
청나라가 서부 전선에 동원한 기병의 수가 5만이 넘는 상황에서 말이다.
“동부 전선은 부사령관이 잘 막고 있으니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1만 정도는 괜찮을 거야.”
현재 동부 전선은 부사령관, 오다 노부카쓰가 총괄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 10만이 넘는 군대도 어렵지 않게 통솔하였던 그의 능력을 믿고 동부 전선을 맡긴 것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잘해 주고 있었다.
청나라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는데도 밀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김성근이나 준기 같은 일급 장수들의 역할이 컸겠지만.
“그렇군요. 하지만 1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의병들이 있잖아.”
“유저들 말씀이십니까?”
“청나라 기병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이제 말을 탈 줄 아는 유저들이 적지 않아. 군마가 없는 것도 아니니 그들을 기병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하지만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정규군에게 군마를 줘도 괜찮겠습니까?”
“나에게는 오히려 비정규군이 편해. 정규군은 결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잖아? 반면 의병들은 나의 말을 따르는 자들이고.”
호영은 아직 대한 제국의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다.
정확히는 장악하려다가 실패하였는데,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의병 부대는 거의 완벽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의병 부대의 지휘관 대부분이 로열패밀리 멤버들이었기에 전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10만이 넘는 의병들은 그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호영은 의병 부대를 기병으로 만드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황제였다면 반란을 걱정했겠지만 그로선 의병들의 반란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성이 보입니다.”
충구와 대화를 나누던 호영은 부관의 보고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수도, 현리가 보였다.
“현리가 이렇게 바뀌다니······.”
“참혹하군요.”
호영과 충구는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지 못한 현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은 아니지만 도시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고 사람의 수는 지나칠 정도로 적어 보였다.
제국의 수도가 지방의 여느 도시보다 못한 도시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몇 명이 죽었지?”
“민간인의 경우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센추리의 청나라는 그리 야만적인 나라가 아니니까요. 다만 엄청난 양의 식량과 재물이 약탈당했고 현리에서만 10만이 넘는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이 무려 5개월이 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재산이나 식량 피해만 클 뿐, 민간인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청나라가 기마민족답지 않게 살생을 최소화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포로로 잡힌 민간인이 많았다.
주변국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편에 속한 청나라다 보니 대한 제국의 인적자원을 빼앗는 것에 주력한 것이다.
“끌려간 백성들은 거의 기술자들이겠지?”
“예, 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기술자와 기술자의 가족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끌려갔습니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군.”
호영은 이를 악물었다.
대한 제국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공격하여 이 같은 피해를 입힌 청나라가 새삼스레 원망스러웠다.
그 역시 상대의 약점이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당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내로남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던가.
“내일이 되면 복수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충구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내일이면 그의 군대도 서부 전선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군과 부딪치게 될 터.
복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청나라군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숫자도 한국군보다 많았고, 그 질도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기병 같은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따져도 순위권 안에 들 만한 나라였고 말이다.
그래서 호영은 내일이 되더라도 무리하게 움직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승리가 확실히 보일 때 승부를 보리라.
* * *
서부 전선의 전투는 대부분 공성전이었다.
호영이 기병 전력을 동부 전선에 집중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지금 그가 향하는 곳도 공성전이 한창 벌어지는 평주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