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77화 (277/345)

# 277

세 사람의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그만 포기해라. 나는 상처 없이 황자 전하의 앞으로 끌고 가고 싶거든.”

“맞아. 네놈도 고다 가문의 주인인데 명예를 생각해야지.”

이죽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고다 진은 분함을 숨기지 못하고 외쳤다.

“시끄럽다, 이 더러운 배신자 놈들아!”

“우리가 왜 배신자야?”

“그러게. 아니 애초에 배신이 일상이었던 낭인 출신이 배신자보고 뭐라 하는 것은 웃기는 일 아니야?”

고다 진은 두 사람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말처럼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하지만 고다 진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내 목숨이 아까웠다면 나는 애초에 한국으로 오지도 않았을 거다!’

다시 검을 든 고다 진은 슌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슌지가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둘렀는데 고다 진은 그 검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더 가까이 다가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간격에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 미친놈이!”

가슴을 꿰뚫린 고다 진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하지만 고다 진을 공격한 슌지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배에 긴 검상을 입은 것이다.

“괜찮아?”

“빌어먹을 동귀어진이라니.”

“너무 방심했어.”

“아니. 방심하지 않아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으면 내 몸이 두 동강 났을 거야.”

슌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혀를 찼다.

고다 진.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내였다.

황제조차 대혼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판국에 끝까지 항전하다니.

“아군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아쉬움을 느끼는 슌지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하였다.

고다 진 같은 인재가 아군이 되었다면 쌍둥이 형제가 공을 세울 기회도 줄어들었을 것이니 말이다.

* * *

호영이 수도로 금의환향한 이후, 유일하게 호영의 권위에 도전하던 고다 진이 황궁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 호영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내지 제국민은 물론이요, 외지 제국민의 지지까지 받고 있는 호영이었다.

휘하에 거느리는 군사 수만 20만이 넘었고 외지의 귀족들을 비롯하여 내지의 고관대작까지 호영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영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황제라고 해도 말이다.

‘더 이상 미루어야 될 이유는 없다. 올해가 가기 전에 황태자 책봉을 받고 곧바로 대리청정을 하여 이 나라를 내가 직접 다스린다!’

지금까지야 명분이 없고, 전쟁을 치러야 돼서 계속 뒤로 미루었지만 삼국 동맹이 결성된 지금은 더 이상 미루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황위를 노려도 되는 시점이 된 것이다.

하여 그는 자신의 친위 군단을 대동한 채 황궁으로 향하였다.

아무도, 심지어 황문을 수호하는 근위병조차 그를 막아 세우지 못하였고 그는 무장한 상태 그대로 황제의 앞에 설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이제 후계 문제를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

“소자를 황태자로 책봉해 주시옵소서, 폐하!”

그가 그리 외치자, 대소 신료들이 하나 된 목소리로 외쳤다. 황자, 대혼을 황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말이다.

“아, 알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황태자 책봉식을 거행하겠다.”

황태자 책봉식은 그야말로 번갯불 구워 먹듯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본래라면 복잡한 절차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겠지만 대혼이라는 사실상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황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선 아무래도 평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황제가 반대했다면 시간이 꽤나 걸렸을 것인데, 의외로 반대가 없었습니다.”

황궁에서 황제를 압박한 지 사흘이 지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회의하던 도중에 참모 한 명이 그리 말했다.

“뭐 황제가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요.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니,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황자 전하의 뜻에 반대할 수는 없겠지요.”

“쯧쯧. 보면 볼수록 황제가 한심하게만 보입니다. 조선 시대의 선조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황제는 어쩌면 5회 차가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5회 차가 끝나는 순간요? 하하, 어차피 황제는 그 전에 죽을 텐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황자 전하?”

부관의 물음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인데 이렇게 무시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로선 씁쓸하게 느껴졌다.

어찌 되었건 황제는 그의 후손이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부관과 참모 들에게 말했다.

“부관의 말처럼 황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길어야 3년, 빠르면 1년 안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것이니 말이야.”

그 말에 참모들이 반색하였다.

“역시 철두철미하십니다.”

“고다 진을 죽인 것도 그렇고, 황자 전하는 실로 완벽한 군주이십니다.”

황제를 독살하겠다는 말을 했는데도 오히려 칭찬을 받고 있는 기이한 상황.

호영은 다시 쓰게 웃고는 화제를 전환하였다.

“책봉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서 곤란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예. 처음에는 준비 기간이 짧아서 걱정거리가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황자 전하를 향한 백성들의 지지가 상당하여 책봉식 자체는 성대하게 열릴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뭐지?”

“태자비가 계시지 않는 게 아무래도······.”

“흐음, 생각해 보니 그렇군. 첩은 많은데 태자비가 없었어.”

첩의 숫자만 무려 서른 명이 넘는 상황이었지만 우습게도 본처라 할 수 있는 여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자비 자리를 내줘야 할 만큼 가문의 힘이 강한 여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힘이 비등한데 누구 한 명을 태자비로 만들면 안 그래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궁중 암투에 불을 지피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자비를 두지 않을 수는 없다. 외국 사신들도 오게 될 것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지은을 태자비로 만들까? 지은은 가문이랄 게 따로 없어서 오히려 반발이 적을 것 같은데.’

호영은 얼마 전에 만났던 여인을 떠올려 보았다.

지은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신분도 평범하고 외모도 평범하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병약하여 병치레를 자주 앓는 여인이었다.

참고로 호영이 그녀를 알게 된 배경은 과거에 있었다.

과거, 즉 회귀 전에 꽤나 각별한 관계였다.

정확히 말해서 호영에게 있어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연인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니. 굳이 잘 살고 있는 그녀에게 이 구중궁궐로 데려올 필요는 없다. 내가 끝까지 지켜 줄 것이 아닌 이상에 말이야. 무엇보다 경선과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제아무리 게임이라 하나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도 않다.’

만약 그가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다시금 그녀와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황자의 신분이었고 곧 있으면 황태자가 될 이였다.

정치도 모르고 암투도 모르는 여인이 황태자의 아내가 된다고 행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그래서 호영은 옛 인연, 지은을 놓아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몰래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 병도 낫게 해 주고 먹고 살게도 만들어 주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태자비가 되실 분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때 충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말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봉숙, 아니 경선 사모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크흠.”

음흉하게 웃으며 말하는 충구를 보며 호영은 헛기침을 하였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기에 그답지 않게 당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충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게임은 게임이라지만 최소한 본처의 자리는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녀, 즉 경선은 머지않아 호영의 아내가 될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것 보니 결혼식도 이제 머지않았네.’

호영은 결혼식을 생각하다가 경선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원체 센추리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경선과 함께할 때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이제 곧 결혼할 사이인데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니었는지 미안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자비의 자리인데 이왕이면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분으로 선택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최민환.

3회 차부터 4회 차까지 외무 장관 자리를 역임하였던 그는 원칙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호영의 아내가 될 경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에게는 호영의 아내가 될 경선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옳고 그름이 더 중요하였던 것이다.

“모르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박 사모님이 태자비가 된다면 전하의 정권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박 사모님의 아버님이 엄청난 고수이십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기로 박 사모님의 아버지는 모험가 조합에 속한 조합원이라고 들었는데요? 무공을 모르는 조합원 말입니다.”

“이곳의 아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아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

호영은 충구의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예비 장인이 센추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역시 들어 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젠가 센추리에서도 대련을 하자고 하시더니, 혼자 실력을 키우고 계셨나 보군.’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무술에 대한 열의가 엄청난 분 같았다. 아마 열의뿐만이 아니라 실력도 상당할 터.

호영은 살짝 기대하는 얼굴로 충구에게 말했다.

“장인께서 엄청난 고수라고? 하긴, 무술 실력이 뛰어나기는 하셨어. 그래, 그렇다면 경지가 어느 정도시지?”

“S랭크이십니다.”

“S랭크라······. 음? S랭크라고?”

그뿐만 아니라 충구의 말을 들은 모두가 크게 경악하였다.

S랭크!

한국에서는 오직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게 바로 S랭크란 경지였다.

그만큼 엄청난 경지였는데, S랭크는 마치 현대의 핵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호영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몽골에 S랭크의 무인이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호영의 예비 장인, 즉 박선후가 S랭크의 무인이라는 말에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도 억제할 수 있는 전략 병기가 느닷없이 출현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자질이 상당하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물론, 경선에게 거의 하루 종일 센추리에 빠져 산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었다.

하지만 겨우 1, 2년 빠져 살았다고 S랭크의 무인이 되다니.

박선후란 사람은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 같았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 박 사모님을 태자비로 만들어야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