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86화 (286/345)

# 286

당연히 반란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황위 경쟁의 대상이나 룰 같은 것도 미리 정해 둬야겠지? 자칫하다간 대씨 일족이 아닌 자가 황제가 되거나 일본 영주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휘둘리는 자가 황제가 될 수도 있으니.”

* * *

“기미 상궁이 어제 정신을 잃고 쓰러졌사온대, 의원들의 말로는 독에 중독된 것 같다고 하옵니다.”

내관의 보고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다.

황제가 먹는 음식을 먼저 먹어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주는 존재가 바로 기미 상궁이었다.

그런 기미 상궁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황제 또한 독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누군가가 황제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황제의 얼굴은 무덤덤한 것이 아니었다. 무덤덤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무기력한 것이다.

“지금 바로 의원들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되었다.”

“하오나 폐하! 기미 상궁이 당했으면 폐하께서도······!”

“이번에도 의원들은 내가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몸이 아픈 것이라 말하지 않겠느냐? 이제 와서 의원을 불러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폐하.”

“됐다. 물러나라. 짐은 혼자 있고 싶으니라.”

“알겠습니다.”

내관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고는 황제의 침소에서 물러났다.

침소에 혼자 남게 된 황제는 조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경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짐을 죽이려 하는구나. 황태자 자리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 자리를 달라고 시위하는 건가.”

기미 상궁이 독에 걸렸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황제가 평정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그가 암살 위협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니 베개 옆에 단검이 있었다던가, 아끼던 내관이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던가, 황제를 지켜야 할 근위병이 갑자기 검을 휘두를 기세로 살기를 날린다던가.

1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사이에 황제는 암살 위협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러니 기미 상궁이 독에 걸린 일 가지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쿨럭! 쿨럭!”

무엇보다 황제는 이미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나오는데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은, 황궁에서 그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였다.

즉, 내관이나 궁녀들조차 황태자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높아 아무에게도 자신의 증세를 알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오히려 알려 봤자 황태자의 명에 따르는 의원들이 ‘마음의 병이 깊다.’라든가, ‘황제가 정신병에 걸렸다.’라는 소문을 퍼뜨려 입장만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제나라 전쟁에서 필시 기회가 생길 줄 알았는데······.”

황제는 몇 번의 암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호영에게 굴복하듯 황태자 책봉을 해 줄 때조차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겨우 4년.

4년만 버티면 저절로 사라지게 될 존재들이었다.

굴욕적이지만 어떻게든 황제 자리에서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몇 년 안에 기회가 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때마침, 삼국 동맹이 결성되고 제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황제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제나라는 천하에서 알아주는 강대국.

아무리 준비를 철저하게 하였다지만, 제나라 같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원정을 떠났던 한국군이 전멸한다거나, 제나라의 반격을 당해 한국이 위기에 처할 일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기적이 벌어지기를 기도하였다. 자신의 군대가 패배하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 대혼은 실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작년에 느닷없이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는 엄청난 실책이라 판단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잘한 선택이었고, 군대를 느긋하게 진군시킨 선택 역시 지금 봤을 때 옳은 선택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동속도를 줄인 한국군의 피해는 얼마 없었지만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여 이동속도를 높였던 청나라군의 피해는 무척이나 컸던 것이다.

결국에 제나라를 침공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한국의 피해는 2만 이하에 불과한데 청나라군은 10만의 피해를, 제나라군은 20만이 넘는 피해를 보았다.

한마디로 동맹국이든 적국이든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이 압도적으로 이득을 본 것이다.

“역시 인간이 수백 년 묵은 악령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단 말인가.”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한국이 승기를 잡을수록, 황제는 의기소침하였다.

안 그래도 황제의 실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승리가 거듭될수록 황제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이제는 조정에서조차 ‘양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황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쿨럭! 쿨럭!”

다시 기침이 나오자 황제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기절이라도 한 듯 아무런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다가 돌연, 광소를 지었다.

“하하하하! 짐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관심을 가져 줄 이가 하나 없겠구나.”

그의 충신들은 이미 작년에 모두 죽거나 만주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황제이면서도 측근이나 충신이라 부를 존재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제 사람이 없는 군주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다시금 광소를 터뜨린 황제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이제 그만 이 자리를 넘겨줘야겠구나. 어차피 내후년까지 살아남기는 글렀으니 말이야.”

황제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황위도, 그리고 목숨도 포기하겠다는 결정이었다.

물론 그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태자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작정하고 어깃장을 부린다면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호영도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는 어찌 되었건 이 나라의 유일한 황제니까.

그러나 황제는 옹졸한 짓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물론 청나라 전쟁 당시, 옹졸하고 한심한 짓거리를 많이 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본래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에, 그리고 대씨 일족의 정통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자식에게 황위를 빼앗긴 황제가 되는 것도 역사에 부끄러운 일인데, 이 이상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 * *

“양위라······.”

쥐 죽은 듯 조용하게만 지내던 황제가 갑자기 조정에서 한 가지 선언을 하였다.

다름 아닌, 양위 선언이었다.

“다행이군요. 암살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호영은 충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갔다.

황제가 왜 갑자기 변심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미 상궁이 독에 당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진 것인가? 그런 걸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면 진즉에 양위를 선언했으면 될 일인데.’

본래 경계심이 많은 호영이다 보니 그런 우려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황제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어차피 황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황태자가 된 지 1년이 조금 지나서 황위에 오르게 되었군.”

“경하드립니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마라. 아직 친황제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경고하듯 말했지만 그 못지않게 의심이 많은 충구이니 크게 방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혹시 모를 위협을 배제하고자 더욱더 악착같이 불온 세력을 박멸할 터.

‘표정을 보니 안심해도 되겠군.’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화제를 전환하였다.

어차피 황위를 잇는 것이야 통과의례나 다를 게 없었기에 이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제나라는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고, 문제는 양나라인데.”

“지금 추세대로라면 5회 차가 끝날 때까지 전쟁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어쩌면 5회 차가 끝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질지 모르고 말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청 동맹군의 공격을 잘 막아 내던 제나라는 올해에 들어서자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제아무리 제나라가 강대국이라 해도 양면 전쟁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한국과 청나라였다.

두 나라 모두 세계 어디를 가도 강대국이라 자부할 수 있는 국가들이었기에 제나라로서는 더욱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나라가 순나라의 인적자원까지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치자, 제나라는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아직 수도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내년까지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심지어 중국인들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나라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양나라는 여전히 굳건하였다.

조금씩 전선이 밀려나고 있었지만 1, 2년 내에 무너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몽골군에 변화가 없다면 최소 3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물론 그때쯤 되면 오히려 몽골의 국력이 약화되어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제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가 몽골군을 도와줄 것이니, 6회 차부터는 양나라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청나라가 몽골과의 동맹을 파기한다면?”

“청나라가 그렇게까지 근시안적으로 행동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청나라의 힘이 월등하지만, 중국에서 유일한 아국이 되어 줄 몽골을 버린다면 청나라는 사면초가의 처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두 나라의 골이 깊어졌다 해도 강남의 나라들이 멸망하는 순간까지는 동맹이 유지될 것입니다.”

순나라와 제나라가 멸망했다 해도 여전히 중국의 국가는 양나라까지 포함해서 다섯 개나 되었다.

강남의 국가들이 잠시 사분오열 되어 싸우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그들의 내전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니, 제나라에 이어 양나라까지 무너진다면 그들도 필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청나라와 몽골은 서로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힘을 합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대신, 삼국 동맹에서 청나라의 입지가 더욱 강해지겠어. 양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협조해 주는 대신, 몽골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 낼 터이니 말이야.”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우려하는 것은 100년 뒤야. 청나라 황제 누르하치는 의외로 백년대계를 구상하는 것에 능해. 어쩌면 6회 차의 청나라는 몽골까지 집어삼킨, 강북의 유일한 국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어.”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개 용병 대장이었던 자가 고작 100년 만에 만주라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통치자가 되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의 우려대로 순나라에 이어 제나라까지 차지하게 된 청나라가 양나라를 장악한 몽골까지 지배하게 된다면?

사실상 청나라는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라 할 수 있었다.

인구는 2억이 넘고 군사력은 200만, 아니 어쩌면 300만까지도 동원할 수 있는 초강대국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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