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물론 호영은 흥분에 들떠서 관산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호감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관산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산이 호영에게 아부를 떠는 것도 사실은 다른 목적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청나라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관산에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나를 직접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혹, 반란 진압에 도움을 요구하기 위함인가?”
사실, 관산이 반란 진압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호영으로서도 나쁘게 볼만한 일은 아니었다.
반란을 진압하려면 당연히 지원군을 보내야 했고, 지원군이란 명목으로 한국의 군대를 강남으로 내려보내면 청나라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곧 청나라에서는 전국적인 반청복명 운동이 시작하게 될 것인데, 군대만 있다면 약화된 청나라를 흡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저는 반란을 진압하는 사소한 일로 송호영 회장님을 귀찮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가?”
호영은 입가를 다셨다.
관산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쉽군. 쉽게 청나라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명분 없이 군사를 청나라로 이동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비록 지금 청나라 황제가 없다고는 하나, 중앙정부는 여전히 멀쩡하게 존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가장 큰 이유는 송호영 회장님을 현실에서도 한 번 뵙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혹시 마카오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센추리의 마카오를 말하는 건가?”
“예.”
“유럽 열강들이 거주권을 얻고서 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라 들었다.”
만약에 강남을 지배하는 나라가 대한 제국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청나라는 태생부터가 바다와 인연이 없는 국가였다.
그나마 강남의 지배자가 되면서 어느 정도 관심이 생겼겠지만 마카오 같은 남쪽 변두리 땅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결국 고위 관료들이 스페인의 뇌물을 받고서 일종의 조차지를 내주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음 스페인의 조차지가 되었던 마카오는 현재 유럽 5강, 그러니까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전부가 진출해 있었다.
호영이 말했던 것처럼 유럽 열강들이 중국 진출과 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하는 지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회장님 말씀대로, 마카오는 유럽 열강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마카오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점점 장황해지는 설명에 호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독일인 중에 저와 연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자가 어제저녁에 저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청나라 내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청나라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인가?”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저로서도 유럽 열강이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제안은 꽤나 고민이 되었습니다.”
“어떤 제안이었지?”
“북미를 나눠 가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
지루한 표정이었던 호영의 두 눈이 순간 반짝 빛을 냈다.
독일인의 제안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사실 제안 자체는 그리 구체적이진 않았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할 것도 딱히 없을 정도입니다. 북미 서부는 청나라가 갖고 북미 동부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이 가지자는 제안이었으니 말입니다.”
관산은 그리 대단할 게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였지만 호영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북미를 나눠 가지자는 유럽 열강들의 제안은 호영이 듣기에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가능한 일인가? 그게?”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독일인의 말을 들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북미는 곧 내전에 휩싸일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내전이야 언제나 있는 일 아닌가? 애초에 북미는 통일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내전이란 표현이 옳은지도 모르겠고.”
“물론 회장님의 말씀이 맞기는 하나, 전쟁의 규모가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북미 전역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서 싸울 예정이니 말입니다.”
“군주제와 공화정의 싸움인가.”
호영이 무언가 아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관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였다.
“군주제와 공화정의 싸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북군과 남군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와 유저들의 싸움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라…… 중국 정부가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 하는군.”
미국 정부가 북군 그러니까 공화정을 지지하여 센추리에 간섭하려는 것은 그 역시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7회 차의 목표를 북미 점령으로 정한 그가 북미의 정황을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엔 대부분의 나라들이 센추리에 간섭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처럼 유저의 힘이 정부를 능가하게 된 경우는 예외지만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센추리의 인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대기업은 물론이요, 정부까지 센추리에 진출하고 있었다.
만약 로열 그룹의 힘이 약했다면 한국 정부도 센추리에 진출하였을 터.
미국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초강대국의 힘을 센추리에서도 보여 주려는 것인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5회 차 이전에 몰락했다시피 한 ‘공화정’을 부활시켜 북군으로 조직한 것도 미국 정부의 공로였다.
“아무튼 독일에서는 우리와 손잡고 미국 정부가 지지하고 있는 공화정의 나라들과 싸우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겠어.”
북미 전체와 전쟁을 한다면 제아무리 유럽 열강과 손잡았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똥개도 제 집 마당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태평양이라는 바다까지 건너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미 절반과 전쟁을 하고 나머지 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나름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같은 이야기를 내게 해 주는 이유가 뭐지?”
가만히 듣고 있던 호영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약간 설명충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관산이었는데 정작 본론이 뭔지를 알 수 없었다.
“제가 이 같은 이야기를 한 이유는, 독일이 제게 한 제안이, 저보다는 회장님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청나라의 국력으로는 북미까지 진출하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반청복명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전쟁도 해야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한 제국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관산을 보며 호영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 들으니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그 역시도 북미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었고, 유럽 열강이라면 손잡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유럽 열강들과 손잡고 북미 진출을 희망하신다면 강남의 항구들을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항구의 사용권을 준다는 것인가?”
“예. 물론 열도를 지배하고 계시고, 대만의 여러 항구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지고 계시는 것은 알지만, 보급을 생각하면 강남의 항구들도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강남의 항구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대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보급이 한결 수월해진다는 장점도 장점이지만, 강북보다 풍요롭다고 알려진 강남이었으니 식량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영은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네. 다만,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대답은 나중에 해 주겠다.”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지만 이렇게 중차대한 일을 지금 당장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솔직한 말로 관산이 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편할 때 답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 독일인도 지금 당장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배려해 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앞으로, 혹시 시키실 일이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불러 주십시오. 아, 강남의 항구들은 언제라도 사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보면 호영의 충복이라 생각될 정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관산이었다.
호영은 그런 관산의 태도가 어색하게도 느껴졌지만 이내 미소를 그렸다.
만약 저 태도가 진심이라면 호영으로선 나쁘게 볼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결과가 나왔나?”
그는 혹시 몰라 원재에게 관산의 정체를 파악해 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관산이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인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대한 제국의 황제로서 사소한 의심거리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예. 관산은 청나라 황자, 혁흔이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독일의 제안도 사실인가?”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제안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흠.”
호영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고민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마카오로 사자를 보내 유럽 열강들과 접촉해 볼까?’
유럽 열강과 손잡고 북미라는 거대한 피자를 나눠 먹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북미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누군가와 함께 진출할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적이 될 수 있었던 유럽 열강이 동맹으로 바뀐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대한 제국의 입장에서 아시아를 노리는 유럽 열강들은 눈에 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북미 진출을 계기로 손잡는다면 유럽 열강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으니 대한 제국으로선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물론 유럽 열강들의 탐욕을 생각하면 그들이 북미 동부로 만족하지 않으리란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즉, 언젠가 대한 제국의 땅으로 인정받은 북미 서부까지 진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대한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열강들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거나 세력이 약화된다면 대한 제국도 당연히 동부를 노릴 거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동맹이 한시적인 동맹이란 사실은 대한 제국이나 유럽 열강들한테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유럽 열강들이 과연 대한 제국과 손잡으려고 할까?’
청나라라면 손잡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이기는 하나, 대한 제국이란 초강대국에 밀려 100년 동안 계속 이인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