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
결국 청나라와 함께 북미 서부까지만 진출을 허용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이상 진출하면 영국과 스페인 또는 그 외의 열강들과 충돌을 하게 된다는 말이니까.
‘이렇게 위협을 하면 내가 지놈들이 정해 준 선에서만 영토를 확장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이슬람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지놈들이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착각을 하고 있군. 우리보다 약소국인 주제에 말이야.’
호영은 피식 웃고는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아랍에 진출하여 이슬람교를 지원한다면? 그때는 교황청이 대한 제국을 불편하게 여기려나?”
“······.”
이슬람교가 나우만의 역린이었는지 여태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우만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호영의 협박이 확실히 위협이 되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하였다.
대한 제국의 국력이라면 다 죽어 가는 아랍권 국가들을 기사회생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유저 수가 적은 제삼세계의 영토 일부를 식민지로 삼았다고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초강대국 행세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유럽 열강들이 제삼세계에서나 강대국이지, 아시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제 규모로 보나 군사 규모로 보나 대한 제국은 유럽 열강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역시 유럽 열강들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제삼세계의 국가들보다는 훨씬 강했고 말이다.
“······불편하게 들리셨다면 사죄하겠습니다.”
“할 이야기는 그거뿐인가? 세계를 어떻게 분할할지, 그 시답잖은 말을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냐는 말이다.”
나우만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호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처음으로 유럽 열강들과 접촉하는 것이라서 나름 기대했건만, 고작 이런 이야기나 나누게 될 줄이야.’
물론 유럽 열강들이 청나라의 북미 진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단한 딜이 오고 가는 것을 기대했던 호영으로선 실로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접촉에서 호영이 알게 된 것은 유럽 열강들이 북미 진출에 대한 야욕이 생각보다 더하다는 사실과 벌써부터 세계의 절대자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황제 폐하에게 꼭 해야 될 말입니다.”
“말해라.”
“폐하께서는 혹시 신을 믿으십니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교황청의 대주교라 해도 이 같은 질문을 던지다니. 만약 그가 NPC였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 제국의 황제는 천자라 불리며 반쯤 신의 아들과 다를 게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믿는다면 이교도라 욕할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황제 폐하께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좀 의외일 것 같기는 합니다.”
“어째서지?”
“신께서 폐하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
호영은 눈을 크게 뜨며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신인지 인공지능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 센추리에서는 분명 신이 존재하였다.
시간을 다루는 유일신 말이다.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침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정말 센추리의 신이 나의 회귀와 연관되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나에게 무슨 목적이 있기 때문?’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약 그의 추론대로 센추리의 신이 그를 회귀시켜 주었다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이 자신의 삶에 간섭하려 든다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호영의 인생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던 호영은 이내 인상을 찡그리고 나우만 대주교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군. 신이 어째서 짐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지?”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신께서 황제 폐하를 총애한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군. 짐은 신앙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기이한 일이군요.”
나우만 대주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래도 신께서 황제 폐하에게 관심을 보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신앙심 가득한 종교인의 모습이었다.
‘종교인의 사고는 역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짐에게 꼭 해야 된다는 말은 그것뿐인가?”
“예. 신이 황제 폐하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을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내고 있다? 그게 과연 중요한 일일까?
뭐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호영으로선 그저 미묘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렇군. 잘 들었으니, 이만 가 보아도 좋다.”
나우만 대주교에게 축객령을 내린 호영은 턱을 괸 채 수심에 잠겼다.
‘그냥 헛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군.’
신의 말을 들었다니.
더군다나 신이 호영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헛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광신도들이 본래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나우만의 말이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나우만의 말이 진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신이 나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을 짓던 호영은 마침내 후련하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실존하는 신이건 아니면 센추리의 인공지능이건 간에 그는 묵묵히 그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 * *
북군 대 남군, 즉 연방군 대 연합군의 전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것은 서부와 남부를 가릴 것 없이 북미 전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였는데, 특히 동부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미국 정부가 동부에 힘을 집중하고 있었고, 연합군 또한 유럽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 치열한 사투를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동부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해서 서부가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서부도 동부만큼은 아니어도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망할 북군 놈들. 오클랜드에서 대패를 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네바다를 노리는 거야.”
“아무리 대패를 당했어도 우리는 우습다는 거겠지. 그리고 실제로 캘리포니아 전체를 장악한 슈워제네거 왕국보다는 둘로 쪼개진 네바다를 상대하는 게 훨씬 쉽기는 하잖아?”
왕관을 쓴 흑인 사내의 말에 마찬가지로 왕관을 쓴 백인 사내가 답하였다.
“처음부터 헨더슨이 우리에게 협조적이었다면 북군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볼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무식한 전술을 들이미는데 어떻게 협조를 해? 우리는 와칸다처럼 인구가 쓸데없을 정도로 많지는 않다고.”
“겁쟁이처럼 그리 소심하게만 움직이니 세력이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인 거다. 북군과의 전쟁만 아니었어도 아예 집어삼키는 것이었는데.”
“흥! 그 소리는 이제 지겹군. 매 시즌마다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떠들어 댔지만 매번 실패하였잖아? 그 때문에 슈워제네거 왕국은 안정적으로 캘리포니아를 집어삼켰고 말이야.”
“시끄러워!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낸 건 너야. 애초에 지난 과거 따위를 왜 이야기해 가지고.”
왕관을 쓰고 있으니 두 사람의 신분은 왕일 것이 분명하였지만, 언행을 보면 왕 같지가 않아 보였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들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게 볼 일도 아니었다.
백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헨더슨 왕국과 흑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와칸다 왕국의 악연은 벌써 수백 년이 넘었다.
3회 차부터 악연이 시작된 셈인데 그야말로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다.
만약 공화정이 부활하여 왕정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힘을 합칠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국왕 폐하! 북군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왔군!”
전령의 보고를 듣고 백인 왕이 쾌재를 불렀다.
마치 북군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백인 왕의 모습에 흑인 왕, 와칸다의 국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지금까지 뒷짐 지며 전쟁을 피해 왔던 주제에 말이야. 갑자기 용감해지기라도 한 건가?”
“내가 겁이 많아서 전쟁을 피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와칸다 왕국처럼 손해 보는 전쟁은 하기 싫었을 뿐이다. 우리 왕국은 언제나 그랬듯 이길 수 있는 전쟁만 하지. 그리고 이번 전쟁은 우리가 확실히 이길 거야. 남군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렇게 유리한 상황은 아닐 텐데? 아니,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지 않나?”
와칸다 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투에서 이렇게까지 승리를 확신하는 백인 왕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던 것이다.
‘믿은 구석이 있는 것인가?’
애초에 지금까지 북군과의 전쟁을 피하기만 하였던 헨더슨 왕국이 무려 7만의 군대를 동원했다는 것부터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인구가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는 헨더슨 왕국에서 7만이란 병력은 거의 총병력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와칸다 왕의 생각처럼 헨더슨 왕국에게는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북군의 비밀 병기였던 기가스 같은 것 말이다.
“오클랜드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의아해하는 와칸다 왕을 보며 백인 왕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슈워제네거 왕국이 북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일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
“뭐 대단한 전투긴 했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남군이 북군을 상대로 승리를 따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슈워제네거 왕국처럼 압도적인 승리를 따낸 적은 극히 드물었다.
현재 전황은 북군이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합군 측에서는 이번 슈워제네거 왕국의 승리로 크게 떠들썩하였다.
병사들의 사기도 많이 올라갔는데, 그만큼 이번 슈워제네거 왕국의 승리는 보기 드문 쾌거였다.
하지만 와칸다 왕은 여전히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슈워제네거의 승리는 그저 이웃 국가의 승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다니. 우리에게 슈워제네거 왕국이 지원군을 보냈잖아! 그들이 있어서 우리는 이길 거라고!”
“하,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그 이야기였어? 동양인 몇 명 지원 온 거?”
백인 왕의 말에 와칸다 왕은 코웃음을 쳤다.
뜸을 들이기에 무슨 말을 하나 기대했더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답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