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무공도 마법도, 그렇다고 교황청의 신성력이나 미국에서 사용되는 기가스 같은 과학과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대 로봇도 아닌 러시아만의 새로운 비기를 사용하였다.
과학기술보다 비기가 더 중요한 세상에서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인도의 비기들처럼 비효율적이지도, 남미의 비기들처럼 실속 없이 화려하기만 한 비기도 아니었다.
아직 누구도 정확한 비교 분석을 하지 못했지만 동양의 무공에 버금가는 비기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국력이라면 대한 제국은 힘들지 몰라도 대한 제국의 위성 국가인 원나라는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군.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야.”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지원을 아까 말했던 것에서, 3배 더 늘려 주면 너희들의 말대로 해 주지.”
그 말에 독일 사신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지만 나머지 사신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수긍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식민지가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은 대한 제국의 영향권에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대한 제국의 팽창 공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러시아를 지원하는 데 소모되는 재원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독일의 대포가 마음에 드는데, 독일의 지원은 고작 후장전포 100문이 끝인가?”
“……차르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독일 사신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결국 차르가 원하는 답변을 해 주었다.
그러자 차르는 다시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러시아의 차르는 아까처럼 입으로만 웃지 않았다.
눈까지 호선을 그리는 것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좋다. 좋아! 너희들의 말대로 해 주지. 원나라? 그까짓 미개한 나라쯤은 8주 안에 멸망시켜 주지.”
“현명한 결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르 폐하!”
“이제부터 러시아제국은 영원한 혈맹입니다!”
“혹시 혼인 동맹을 원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 왕가는 언제든 러시아제국의 황가와 혼인 동맹할 마음이 있습니다.”
차르의 호언장담에 네 강대국 사신들은 흡족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사냥개가 사냥개답게 행동하기로 결정한 셈이니 그들로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일단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해 주지. 나 역시 대한 제국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네놈들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네 사람의 얼굴을 보며 차르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언젠가 자신을 사냥개 취급하였던 유럽 강대국들에게 복수를 해 주겠다고.
그리고 그가 그런 다짐을 한 그날, 러시아제국은 대한 제국의 제후국인 원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 * *
“역시 다 좋을 수는 없나.”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8회 차의 대한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했다.
인구는 6억이 넘었고 제후국은 10개나 되었다.
군사력도 7회 차와 비교했을 때 최소 3배 이상 강성해졌다.
세계적인 영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초강대국 수준이었고 말이다.
거기에다 소빙하시대를 잘 넘겼는지 다른 나라들이 대기근에 시달릴 동안 아사자 한 번 나온 적이 없었다.
100년 동안 대한 제국은 그야말로 발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좋게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적이 너무 많아졌어.’
팽창을 거듭했던 대한 제국.
당연하겠지만 적이 없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전 회 차에도 대한 제국의 적은 항상 존재하였다.
7회 차에는 이렇다 할 강적이 없었지만 북미의 공화주의 세력이나, 강남의 반청복명 세력이 주적이었고 6회 차에는 명나라란 강적이 존재하였다.
그 이전에도 꽤나 많은 적대 세력들이 존재하였는데, 8회 차의 적대 세력은 이전과 스케일 면에서 비교를 불허했다.
세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 전체가 대한 제국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아시아와 북미 서부를 제외하면 이제 어느 곳에도 대한 제국의 적대 세력이 존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니, 이제는 아시아에서도 적대 세력이 존재하였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닌 제법 많은 나라가 적대 세력으로 전향하였는데, 이유는 단순하였다.
신라, 백제, 부여, 조선, 가야, 발해 등등.
한국의 옛 국가 이름을 사용하는 대한 제국의 제후국들이 팽창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구려란 나라도 있었는데, 고구려는 인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고구려 때문에 인도에서도 대한 제국의 적대 세력이 점점 늘어 가는 추세였다.
아마 인도의 절반 이상은 대한 제국과 적대 관계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유럽 열강들이 8회 차가 시작하자마자 연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을 상대하기가 더욱더 까다로워질 거야.’
대한 제국의 비상은 강력한 적을 탄생시켰다.
유럽 열강에 속해 있던 유저들이 유럽 연합, 즉 EU를 만들어 유럽을 하나로 결합시켰던 것이다.
“미주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중부에서 EU의 식민지 왕국들과 연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만주국이 조금 밀리는 추세입니다.”
북미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비록 대한 제국의 제후국은 아니지만, 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청나라, 아니 만주국이 북미에 진출한 상황이었다.
7회 차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북군이 존재하는 상황이라 다른 세력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8회 차에는 북군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공공의 적이 사라졌으니 만주국의 팽창에 경계심을 느끼고 있던 세력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동부를 집어삼킨 EU의 식민지 왕국과 서부 일부의 왕국들이 만주국을 공격했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전 세계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막막한 기분이군. 뭐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야.’
대한 제국의 지도자로서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해 냈던 호영이지만 8회 차에서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커지다 보니 머릿속이 산만해졌던 것이다.
‘일단 지금 해야 하는 것부터 해 보자.’
세계가 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렵게 느껴지는 거지, 차분하게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타국이 침략한다면 역으로 반격하면 되고 꼭 필요한 땅이 있으면 병력을 퍼부어 땅을 빼앗으면 되는 것이다.
“만주국을 어떻게 지원할 계획이지?”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전쟁이 시작된 북미 대륙의 만주국을 지원하는 일.
EU들의 식민지 왕국도 문제지만 미국 정부가 언제 개입할지 모르는 만큼, 만주국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였다.
“일단 군사적인 지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만주국은 7회 차의 청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이니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많아서 그렇겠군.”
“예. 비록 동양계가 많기는 하나, 어쨌든 만주족은 불과 10%도 안 되기 때문에 군사적인 지원을 하면 반발이 클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대한 제국에 남아도는 무인들을 대규모로 파견시켜 식민지 왕국이건, 공화주의 세력이건 싹 다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교를 책임지는 신현무의 말처럼 8회 차의 만주국은 7회 차의 청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군사적인 지원은 어려울 것 같았다.
북미 대륙의 유일한 제국을 자처하는 만주국에게 있어 대한 제국은 외세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자라도 최대한 지원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물자 정도라면 만주국의 백성들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도 대한 제국과의 동맹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러시아제국이 원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두 나라의 관계가 앙숙인 것을 알고 있어서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8회 차가 시작된 지 불과 열흘도 안 된 시점에서 전쟁이 벌어지리라고는 그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러시아제국은 벌써 침략할 준비를 끝마쳤다는 건가. 이곳의 시간으로 따져도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EU가 러시아에 엄청난 지원을 퍼부은 것 같습니다.”
“또 유럽 열강들이 문제군.”
북미 대륙에서야 두말 할 것 없이 EU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만 다른 대륙에서도 EU들 때문에 적대 세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원을 무기로 또는 종교를 무기로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전 세계가 대한 제국의 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회의를 소집한다.”
러시아와 원나라의 전쟁은 대한 제국에서도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기에 호영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여러 신료가 자기주장을 펼쳤다.
“이건 대한 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도전입니다! 본국이 직접 군사를 보내 러시아를 응징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이번 전쟁은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원나라를 뒤에서 후원해 주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그보다, 러시아 놈들이 저리 날뛰는 것은 EU 때문이 아닙니까? 러시아는 원나라에게 맡기되, 이제 그만 EU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온갖 의견이 나오고 있을 때, 외무장관 신현무가 말문을 열었다.
“일단, 원나라의 실질적 지배자인 테무르 경이 어떻게 대처할지를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러시아가 동원한 병력을 보면 원나라가 밀릴 것이 분명한데도?”
“설령 그렇다 한들, 테무르 경이 원하지 않는다면 지원해 봤자 득 볼 것이 없을 겁니다.”
“하기야, 테무르라면 우리의 지원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겠군.”
칭기즈칸을 꿈꿀 정도로 테무르는 엄청난 야심가였다.
로열패밀리에서는 그가 언젠가 독립을 꾀할 것이라고 호영에게 경고하기도 하였는데, 어찌 되었건 야망이 큰 테무르가 대한 제국의 지원을 바랄 것 같지는 않았다.
즉, 원나라의 힘만으로 러시아제국의 공세를 이겨 내고자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만약 원나라의 국력으로 러시아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나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지.’
하지만 호영은 이번 회 차에서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8회 차의 세계 초강대국은 바로 러시아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나라만으로 러시아를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물론 역사가 달라졌고 회귀 전보다 러시아제국의 국력도 약해진 것 같으니 전쟁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경의 말대로 하지. 테무르가 지원을 요청하면 그때 지원을 해 주는 걸로 말이야.”
호영은 결국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원나라와 러시아의 전쟁을 방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왕이면 전쟁이 장기화되었으면 좋겠군.’
독립을 꿈꾸는 테무르의 힘을 약화시키고 러시아 국력도 쇠잔시킬 겸,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호영의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수도까지 밀렸다고?”
“예. 원나라는 러시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