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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56화 (156/220)

156화

“커헉!”

그가 돌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걸을 때마다 마차에서 뒹군 몸이 아팠다. 저릿저릿한 팔보다 더욱 나를 화나게 하는 건, 영주였다. 신음하는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잘 들어요.”

“으, 으윽…….”

나는 그의 손등을 발 앞꿈치로 살짝 눌렀다. 가볍게 눌렀을 뿐인데도 과장해서 몸을 떠는 영주를 보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는다.

“제, 제발 살살해요!”

“…….”

제 몸은 이렇게 살피면서 어째서 남의 고통은 하찮게 보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다. 나는 다시 되물었다.

“영주님, 듣고 계세요?”

“네, 네! 드,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거예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신품을 잃어버리고 사제까지 없어진 거로요.”

“네?”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없어져요? 실종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레드레드 사제는 운 나쁘게 사라진 거예요. 자세한 걸 말할 필요는 없어요. 습격으로 땅바닥을 구르다 눈을 떠 보니 사제가 사라졌다고만 하면 될 거예요.”

“하, 하지만 사라지기만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요. 어쩌면 찾으려고 사제단을 파견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당신을 찾고 계신 아론…….”

“그러니까 영주님께서는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입장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만약 모든 것을 목격했는데 사제가 괴생명체들과 안 보인다고 한다면 영주님께서 뭐라 말하든 영주님을 추궁할 겁니다. 괜한 조사를 받거나 오해를 사고 싶지 않으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로 하셔야 해요. 저보다 영주님께서 이 점을 더 잘 아시겠죠. 상부는 물론이고 황성까지 관여하면 온갖 감춰 둔 비밀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걸요.”

“으음…….”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가 순간이지만 보였다. 이런 성향의 영주라면 더러운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황제의 성향을 알고 있는 그라면 이런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약삭빠르게 계산하겠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어요.”

나는 얌전히 발을 떼었다. 입술을 말아 올린 채 고민하던 영주는 재빨리 그러겠노라며 대답해왔다. 나는 몸을 돌렸다. 약간 절뚝거렸지만 그래도 걸을 만했다. 나는 마차에 묶여 있는 말들을 보았다. 고정해 놓은 인장을 풀자 말들이 앞발을 구르며 울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마리의 고삐를 잡은 채로 신성력이 도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번쩍이는 불빛에 놀란 말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가고 내게 잡혀 있는 한 마리만이 머리를 휘두르며 히이잉 울었다. 나는 그 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어,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질문이 들려왔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물음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말에 올라탔다. 말은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고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사제, 어, 어디로……! 쿠, 쿨럭!”

목청을 높이던 영주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왜 그것을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으나 알려 주고 싶은 마음도, 알려야 할 의무도 없다. 나는 고삐를 잡은 채로 달렸고 강물이 보이자 천천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

다행히 신품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물에 빠져 있는 단검을 주웠다. 신성력이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걸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신성력이 물에 빠진다고 씻겨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흘러가는 강물에 보이는 내 모습은 썩 좋지 않았다.

뜯긴 앞섶이며 실밥이 터진 옷들이 초췌한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여분으로 가져온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 속에는 일상복으로 입을 수 있는 옷과 망토가 있었기 때문에 사제복 위에 덧입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복장을 정비한 나는 신성력을 끌어내어 아픈 팔 위로 뿜어냈다.

잦아드는 고통과 선명해지는 빛.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사제로서의 신분을 버리면 신성력을 온전하게 쓸 수 있을지. 나라는 개인에게서 신성력이 나오는 것인지, 내 신분과 의무에서 신성력이 발휘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은 채로, 나는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밤새 달렸다. 상인들의 도시의 특징이라는 성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린 나는 가끔 뒤를 흘깃거리며 쫓아오는 무리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그런 무리는 목격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무사히 노트담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솔즈베리로 향해야 하지만 시찰단의 임무에서 벗어난 만큼, 사제들이 들를 거라고 예상하는 도시로는 갈 수 없었다. 나는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이었고, 그 목적을 실현하려면 노트담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 지대이자 산맥인 비오타를 넘어가는 게 좋았다.

문제는 비오타는 매우 험준하고 높은 산들의 협곡이라는 것이다. 능숙한 산 전문가들도 쉽게 타지 않는 곳을 전투에만 익숙한 내가 아무 문제 없이 건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산에서 괴생명체나 마물을 만나면 더더욱 위험했기 때문에, 나는 비오타와 완만한 능선을 공유하고 있는 인근 도시의 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헤르간. 그 도시가 바로 헤르간이다. 나는 지친 말의 목등을 쓸어 주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밤에도 달린 탓에 말은 몹시도 지쳐 있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눈앞의 도시가 선사하는 낯설고 황폐한 느낌만 아니라면 금세라도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나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도시로 들어가려는 줄에 합류한 것이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성벽에는 검은 그을음이 가득했다. 밤에 횃불을 밝힌 흔적으로, 밤의 전투를 치를 때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성벽에서 눈을 떼며 문지기에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목적지가 어딘데요?”

문지기가 딱딱하게 물었다. 그는 망토를 깊게 쓴 여행자 따윈 환영하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그를 보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하지 않았어요.”

“흠.”

문지기는 그제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체형과 목소리에서 젊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충고하듯이 말했다.

“괴물들 출몰이 잦아요. 이런 시기에 목적지 없는 여행은 자살 행위입니다.”

괴물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마물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나는 괴생명체의 출몰이 이곳에서도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려고요.”

“흠, 들어가세요. 오래 묵을 여관을 찾는다면 중앙 도로에서 찾는 게 안전할 겁니다.”

문지기가 뒤로 고갯짓을 하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엄격하게 창을 들고 있던 기사들이 지나갈 통로를 열어 주었다. 나는 문지기가 내 뒤에 있는 상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도시는 먼 곳에서 본 것보다 주택들이 훨씬 빼곡하게 밀집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삼면에 산을 두르고 있는 도시인 만큼 경사를 따라서 도시들이 층을 달리해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위쪽 경사진 지역에 살면 아래가 모두 내다보일 특이한 광경. 나는 영주의 성이 그 주택들 가운데에 우뚝 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오타의 능선을 타는 길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오셨죠?”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는 그게 어린 소녀라는 것을 보고선 멈칫했다. 소녀는 거뭇한 손으로 콧등에 흐르는 콧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제가 괜찮은 여관으로 안내할 수 있어요. 수고비는 아주 조금만 받을게요.”

나는 가지고 있던 동전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괜찮아. 그것보다 저쪽 능선을 타려면 어떻게 가는 길이 빠른지 아니?”

“능선이요? 저쪽 길이면 비오타인데…….”

소녀는 대번에 두려운 얼굴을 했다.

“그 산맥에 괴물이 가득하대요. 산을 잘 타는 오빠도 저곳에는 절대 가지 않아요!”

“그래? 난 꼭 가야만 하는데.”

아쉽다는 듯이 말하자 소녀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소녀는 지저분한 얼굴에서도 꺼지지 않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아침에 가면 좀 낫다고 들었어요! 햇빛이 환하게 비출 때요. 괴물들이 피부에 햇빛이 닿는 걸 무척 고통스러워한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워.”

괴물이란 괴생명체를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 도시에도 괴생명체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사하고 돌아서려고 하자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저 산길을 타려면 중간의 경비대를 지나야 해요. 경비대는 일반 사람한테 그쪽으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텐데…….”

소녀는 그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나는 소녀에게 알려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동전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알려준 정보 값이야.”

소녀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졌다. 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는 것을 보니 가슴이 시큰해진다. 아직은 어린 소녀. 일고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지저분한 행색으로 여행자들을 잡는 것은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이나 가문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생계를 이어 가려 헤매는 그녀에게 나는 씁쓸한 미소를 보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한낮이었기 때문에 나는 여관에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아침에 산을 타는 것은 문제가 없었으나 경비대를 지나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경비대는 보통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헤르간이 국경 지대인 비오타와 접하고 있다고 하나 국경 지대는 아니었고, 비오타가 자연적으로 요새 지형이었기 때문에 경비대 정도만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중앙 도로로 향할 때 나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조심해요!”

그는 날카롭게 외치고는 몸을 돌려 바르게 걸어갔다. 나는 멈칫했다.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을까. 땟자국이 가득했던 소녀가 몹시도 친절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여관에 다다랐을 때, 내 돈 가방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저런, 강도를 만난 거예요? 쯧쯧.”

여관 주인은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그녀는 나를 딱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돈이 없다면 묵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망설이던 나는 말을 보았고, 여관 주인의 시선도 자연스레 말로 향했다.

“좋아요. 저 말이라면 며칠 묵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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