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96화 (196/220)

196화

“……드레드.”

새벽에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소리가 머리를 두드리는 소리처럼 편치 않았다.

“말레드레드, 일어났어요?”

벨이었다. 나는 불편한 몸을 뒤척거렸다. 잠을 못 잤기 때문일까. 머릿속이 울렸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 대답했다.

벨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깨끗한 원피스가 들려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잤나 봐요. 안색이 좋지 않군요.”

나는 그건 당신들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정신 사나운 방에서 애초에 평안하게 잠을 잔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약간 무뚝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옷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말레드레드에게 손님이 찾아왔어요.”

“제게요?”

나는 제대로 들은 것인가 싶어 되물었다.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는 방문을 허용치 않지만 특별히 예외로 허락해 드렸어요. 같이 온 분이 성기사니,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폐하께서 보셨거든요.”

“같이 온 사람이 성기사라니, 대체…….”

“옷을 입고 내려오세요. 그러면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나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씻고 나와 깨끗한 새 옷을 집었다. 엊저녁에 무리한 탓인지 다리 사이가 조금 뻐근하게 느껴졌다. 팔다리도 나른하고. 나는 아래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어제 아론의 입술이 닿았던 곳. 그의 혀가 농밀하게 파고들었던 그곳이 보인다. 아론의 모습을 상상하자 얼굴은 단번에 뜨거워지고 말았다.

‘시간만 더 있다면.’

그를 더욱 느끼고 그의 아래에서 신음할 텐데. 나는 침울해지고 말았다. 오늘 가자고 굳게 결심해 놓고 금세 흩어지는 이 나약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게 미련이란 게 있을 줄 몰랐다. 아론을 이렇게나 원하게 될 줄은…….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옷을 폈다. 여전히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하얀 비단의 옷. 나는 그것을 무표정하게 입고는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내려오자 나를 반기는 반가운 목소리가 있었다.

“말레드레드!”

비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비키는 문 앞에서 달려와 나를 다짜고짜 껴안았다.

“아, 상큼한 냄새! 목욕한 거예요? 설마 지금 일어난 건 아니죠? 제가 깨운 거예요? 어쩌면 좋아!”

말을 쏟아내며 묻는 그녀 때문에 나는 조금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비키. 이곳까지 와 준 거예요?”

“그럼요! 다시 만나러 온다고 했잖아요! 제가 말레드레드와 한 약속을 어기겠어요? 어떻게든 말레드레드 주소를 찾아내서 이렇게 만나고 말죠.”

나를 만나겠다는 고집. 황제의 명으로 낯선 저택에 와 있는데도 찾아와 준 그녀가 고맙기만 하다. 나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정말 고마워요.”

“뭘요! 얼굴도 보고 싶었고, 제가 만든 것도 주고 싶었고, 그러니까 쿠키 상자가 어딨더라? ……어머. 내 정신 좀 봐!”

비키는 뒤를 돌아보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소개했다.

“말레드레드! 오늘 저와 함께 와 준 기사분이 있어요. 말레드레드도 잘 알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바른 자세로 서 있는 기사가 보인다. 일반 기사가 아닌 은빛 갑옷의 성기사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얼른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라드 경.”

“오랜만입니다.”

그는 조용한 미소를 화답을 해 왔다. 비키가 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죄송해요. 혼자 오고 싶었는데 저 혼자는 아무래도 허락을 안 해 준다고 해서요.”

아마도 황제겠지. 그녀라면 비키가 나를 찾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일에 방해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라드가 동행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나의 결혼 상대로 황제가 밀었던 자니까. 그하고 조금이라도 잘될 기미가 있다면 황제 입장에서 나쁠 게 없다. 내가 아론에게서 절로 멀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나는 라드를 만난 것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반면 라드는 내 얼굴을 보며 잘 계신 듯 보여 다행이라고 살갑게 말을 걸어 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비키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제가 말레드레드에게 주려고 맛있는 쿠키를 구워 왔거든요.”

“물론 맛있는 쿠키가 나오기까지 반죽을 수십 개 태워 먹긴 했지만요.”

“어허! 숙부! 쓸데없는 이야긴 하지 말아요!”

비키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얼른 대꾸하자 라드가 멋쩍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투덕거리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좋았다. 나는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벨이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은은한 꽃 향이 올라오는 차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벨이 말했다.

“부족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 저택에 손님이 오시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감사합니다.”

라드가 인사했다. 비키는 고개를 숙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떠나지 않고 있어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다. 벨은 비키의 눈치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비키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물었다.

“저어, 따로 가실 데는 없으신가요?”

“비키.”

그런 질문은 무례하다는 듯이 라드가 끼어들었다. 벨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기사로서도 집사로서도 기세가 죽는 법이 없는 그녀는 젊고 발랄한 아가씨인 비키를 향해서 차분하게 말했다.

“전 여기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말레드레드하고 항상 함께 있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이런 곳에서도 폐하의 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계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드는 얼른 그녀를 칭찬했다. 아마도 수도 기사인 그녀가 비키를 나쁘게 볼까 그런 것이었지만 비키의 표정은 한껏 찡그려져 누가 봐도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감시 아닌가요?”

비키의 단도직입적인 표현에 굳어진 건 라드였다. 그는 얼른 말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비키를 꾸짖으려 했으나 벨이 먼저 대답했다.

“보호라고 하죠. 굳이 감시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이런 곳에서 말레드레드를 위협하는 게 있나요? 말레드레드가 약한 사람도 아닌데.”

비키의 질문은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느냐를 밝혀야 답이 되는 부분이었다. 벨은 그런 것까지 자세히 이야기해 줄 의도가 없는지 대답했다.

“이곳에서 저와 말레드레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방문도 불가능하지만, 라드 경의 얼굴을 봐서 폐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거예요.”

“아, 그런가요…….”

비키는 코끝을 조금 찡그렸다. 벨이 그렇게 나가지 않고 한쪽 벽에 서 있는 걸 보면서 비키는 이내 그녀를 무시하자고 마음먹었는지 내 앞으로 쿠키를 권했다.

“먹어 봐요, 제가 만들었지만 끝내줘요.”

“잘 먹을게요.”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가 권하는 쿠키를 한입 물었다. 그러자 약간 쌉쌀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번져 온다. 내가 멈칫하자 비키가 말했다.

“어때요? 기력에 좋다는 아갈란의 뿌리를 넣어 봤어요! 설탕으로 오래 재어서 작게 잘라 넣으면 맛도 좋고 몸에도 좋대요!”

“독특하니 진짜 맛있는데요?”

아갈란의 뿌리. 그것은 기력을 회복하고 신성력을 키운다는 귀한 나무다. 나를 위해서 그걸 준비했을 비키의 마음을 생각하자 쿠키가 더욱 달게 느껴졌다. 라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걸 말레드레드에게 먹인다고 얼마나 약초 가게 주인을 닦달했는지 몰라요. 기력이 약한 사제가 먹을 거니 가장 최상품으로 구해야 한다고요. 며칠을 매일 달려가더라고요.”

“헤헤, 그렇게 고생한 건 아니에요. 약초 가게가 종종 좋은 걸 빼놓고 파는 경우가 있으니 놓칠까 봐 걱정되어서 자주 간 거거든요. 간 김에 희귀한 약초도 많이 구할 수 있어서 좋았고요.”

“그랬군요. 비키.”

나는 따스함으로 젖어 드는 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남을 생각하는 배려 있는 행동에 대한 감동이었고 고마움이었다. 나는 비키의 과자를 일부러 더 맛있게 꼭꼭 씹었다. 내가 과자를 먹는 동안에 라드와 비키는 친한 사이처럼 농담을 던지며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닮은 것 같진 않아도 선천적으로 밝은 성격이 닮은 꼴인 양 드러났다. 사람을 선하게 보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지, 그들을 만나면 부담도 없고 편하다.

소환사로서 늘 혼자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돼 시간을 보낼 때면 느끼곤 한다. 나는 이런 것도 싫어하지 않노라는 것을. 사람의 온기나 대화가 마음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한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며 쿠키를 다 먹었을 때였다.

벨이 말했다.

“이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비키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온 지 30분도 안 됐는데…….”

“방문을 허락했지만 긴 시간을 허락한 건 아니에요. 양해해 주십시오.”

비키는 울상을 지으며 라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비키를 기다리는 동안 라드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못 본 사이에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조금 안색이 안 좋죠. 잠을 못 자서요. 오늘은 푹 자려고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라드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좋겠군요.”

“아니에요.”

그가 도울 건 없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고마울 뿐. 나는 미소 지었다.

“이렇게 방문도 과분한걸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언제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말레드레드를 힘껏 돕겠습니다.”

“기사님의 도움은 언제나 든든하죠.”

“그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드는 살짝 벨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나를 본 그의 눈빛은 꽤나 확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위에선 폐하의 명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할 뻔했다고 하지만, 제가 원한 거고 선택한 겁니다. 저는 말레드레드에게 마음이…….”

“숙부! 이제 갈까요?”

그때 비키가 돌아왔다. 그녀는 입을 다무는 숙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뭐예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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