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 역사
서기 2042년.
아라한 컴퍼니 설립. 시각과 청각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가상현실 ‘크리에이트 필드’가 만들어졌고, 그를 이용해 만들어진 최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더 필드’가 출시되었다.
서기 2064년.
아라한 컴퍼니의 엄청난 성장이 이루어지며 시각과 청각, 촉각을 완전히 구현한 가상현실 ‘크리에이트 스페이스’가 만들어지고, 가상현실 구현 기계 ‘스페이스 워커’가 발매. 두 번째 게임 ‘더 스페이스’가 출시된다.
서기 2076년.
의학, 중공업, 화학, 전자, 가전, 모든 분야로 진출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아라한 컴퍼니는 미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구현시킨 세 번째 현실 구현 기계 ‘어비스 워커’를 발매하고, 가상현실 공간 어비스를 선보인다. 세 번째 게임인 ‘더 어비스’와 함께.
서기 2088년 현재.
다국적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여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아라한 컴퍼니는 오감의 완전 구현을 선언하며, 네 번째 가상현실 기계 ‘플레인 워커’와 상위 가상현실 공간 ‘플레인’을 내놓았다.
이제는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발전하고 발달한 가상현실 ‘플레인’은 인터넷과 하나가 되어 세계를 뒤덮고, 네 번째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라이프 크라이’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서기 2088년 ‘라이프 크라이’가 문을 여는 그 시각, 한 명의 다크 게이머가 그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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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라이프 크라이
그날 녀석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NPC는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일 뿐인 거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물어오는 그 녀석.
왜 그렇게 물었는지, 왜 슬퍼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나는 녀석에게 대답해주었다.
“그래. NPC들은 그저 사람이 만들어낸 정보의 조각들일 뿐이지. 그들은 ‘살아’ 있지 않아.”
그렇게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대답을 하는
나를 보면서 왜 그토록 쓸쓸하고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미소 지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래. 역시 그들은 살아 있는 게 아닌 것이지.
어디까지나 NPC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의 조각일 뿐이야.
그런데 있잖아? 그들은 어째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나를 보며 환히 웃어주고, 눈물지을 수 있는 거지?
왜 나를 보면서 웃고, 눈물지을 수 있는 거냐고!”
절규를 할 때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았으니까.
-나의 세상에서-
갈증이 난다. 싸우고 또 싸워도 갈증은 계속된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답을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느끼는 것은 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아아, 그래그래.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원래 사람은 스스로의 일을 제대로 알 수가 없으니까. 그게 사람의 슬픔인 것이겠지?
“그렇지 않냐?”
내 손에 뒈져 버린 고블린에게 물어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내가 아는 NPC 중에 이런 말을 하는 NPC가 있었지. 착한 몬스터는 죽은 몬스터뿐이라고 말이야.
어디에선가에서 들어본 패러디된 듯한 말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NPC가 그런 말을 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흐음… 레벨은 얼마나 올랐으려나?”
손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아직도 고블린을 죽일 때의 감각이 손에 남아 있었다. 이럴 때마다 이 세상이 너무 잘 만들어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렇게까지 현실과 같은 감각은 대체 어떤 기술을 써서 만든 것일까? 하기야 뇌의 기능의 활용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아라한 컴퍼니를 따라올 수 있는 기업은 없지.
“만들어진 세계… 그리고 삶의 외침인가?”
이 만들어진 세계의 이름은 ‘라이프 크라이’. 어떤 삶을 외친다는 걸까?
알 수 없는 이름이지만 어찌 됐건 좋다. 나는 그저 게임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
그래. 그걸로 오케이지.
꽈악!
손을 꽈악 쥐어보고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대충 감각은 익혔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사냥을 해봐야겠지.
그렇게 사냥과 전투를 통해서 나는 강해져 왔고,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왜 이런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은 한두 번씩 들어본다.
하지만 대답할 가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니까. 사람은 누구나 꿈을 위해서 움직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런 물음 따위 던지지 않아. 나는 그저 꿈속을 걷고 있을 뿐이다.
***
“이야… 슬라임, 이거 대단한데?”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 그만둬주세요. 정말이지…….”
“왜? 네 이름이잖아?”
아아, 이 아저씨 분명 일부러 이렇게 부르는 거야. 정말로 일부러 이렇게 부르는 거야. 젠장! 확 때려 버릴까아? 아니면 저주라도 걸어서 볼일도 못 보게 만들어줄까아?
“어이어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부탁드리지 않았나요, 센든 아저씨?”
“몇 번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그래가지고 키는 안 커.”
이 NPC 아저씨가…….
“키가 무슨 상관이에요, 키가! 그리고 이걸로 정확히 스물네 번째란 말이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이제 스물다섯 번째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야… 이거 키가 작으면 조잔한 거야? 그걸 일일이 세고 있다니……. 라임 너 대단한데?”
“그! 러! 니! 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쐐엑! 하고 손도끼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이 아저씨… 대체 레벨이 몇인 거야? 맨손으로 손도끼를 척척 막아내고 말이지.
“요오! 이거 감정 실렸어, 감정! 완전 불량 청소년인데?”
“좋아요.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죠.”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지, 라임 군?”
“그렇게 친한 척 불러도 안 봐줄 겁니다. 세린 아주머니께 이 일을 말해야겠군요.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헤… 헤에엑! 어… 어이, 라임, 그런 짓은 반칙이야!”
아저씨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을 보며 나는 코웃음을 쳤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자… 잠깐! 한 번만 봐줘. 내가 이 화살 공짜로 줄게.”
센든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석궁용의 짧은 화살 50개 한 묶음을 내밀었다. 그것은 쿼렐이라고 부르는 화살로 그 위력이 강하다.
“좋아요. 하지만 다시는 놀리지 마세요.”
“이야… 이거 못 당하겠군.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입담은 수준급이야. 너 상인이나 되지 그러냐?”
“나중에 생각해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라.”
물건들을 팔아넘기고, 내가 사야 할 필수품을 사서 등을 돌렸다.
AI 기술을 이용한 NPC라는 것은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뿐이지만, 방금과 같이 보통의 사람과 다름이 없다.
아라한 컴퍼니의 기술은 어디까지 나아가 있는 것일까?
하기야 일전에 겉모습만은 사람과 전혀 다름이 없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서 판매를 시작했었지.
인공 장기, 인공 근육과 같은 기술도 만들어지는 세상이니,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런 현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가상현실 공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니까.
“어디 보자. 돈이 얼추 모였군.”
분명 오늘 점심까지 50골드를 보내주기로 했었단 말이지.
주문 목록을 생각하면서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높이가 20미터는 되는, 이런 산골 마을에 있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거대한 탑 하나가 마을 중심에 서 있었다.
이 마을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실제적인 이유인 마도사 펜타자곤의 탑이다.
탑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여름임에도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찾으시나요?”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한 명의 귀여운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미모를 가진 녀석이 나를 맞았다.
이렇게 생겨 먹었지만 이 녀석 남자 녀석이다.
참 나, 사내 녀석이 이렇게 귀엽게 생겨도 되는 거야? 그런 거야?
“오랜만이야, 베리얼.”
“앗! 라임 형!”
이 녀석의 이름은 베리얼. 펜타자곤의 탑에서 일하는 견습 마법사로, 마도사 펜타자곤의 수제자이자 이 탑의 관리인인 벨레일의 제자이다. 그러니까 탑의 주인인 펜타자곤의 사손이라고 할까?
듣기로 마법 실력이 나이에 비해서 꽤 뛰어나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또 시체 팔려고 왔어요?”
“당연하지. 고블린 시체하고, 네가 일러준 각종 약초를 좀 캐왔어.”
저번에 5골드나 주고 산 약초학에 관한 책을 보고 공부를 했다. 고블린 시체의 가격이 한 구에 50실버쯤이고, 내가 등에 찬 이 석궁이 하나에 5골드이니, 이놈의 책값이 얼마나 비싼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뭔 놈의 책이 석궁 하나 값이야? 아무리 양피지라지만 말이지. 내가 묵는 여관도 한 달에 10골드밖에 안 한다고.
“밖의 수레에 있나요?”
“그렇지.”
“할부로 해줄 테니까 공간 확장 가방 하나 사는 게 어때요?”
“얼마인데?”
이 게임의 특징은 현실성을 강조해서 인벤토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직접 들고 다녀야 한다.
그것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고블린도 10마리를 잡으면 겨우 두셋 들고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매번 사냥을 가기 전에 수레를 끌고 간다.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고블린이나 야생동물을 잡으면 그대로 가져와서 수레에 싣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공간 확장의 가방이란 것은 매우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었다.
“음… 다섯 평 정도의 공간으로 확장된 가방인데요. 제가 만든 거예요. 가격은 백 골드. 할부로 매달 이십 골드씩 납부해주시면 돼요. 어때요? 무이자예요.”
베리얼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요 꼬마 녀석 보게나. 자기가 만든 걸 나에게 팔아넘기려고 한단 말이지.
“그거 결함은 없냐?”
“겨… 결함이라니요! 이건 제가 스승님께 허락을 얻어서 만든…….”
“실습 시험 보면서 만든 물건이라는 말이지?”
“흐… 흥! 싫으시면 말아요! 형 아니면 팔 사람 없는 줄 알아요?”
이 녀석… 왜 이렇게 하는 짓이 여자 애 같냐. 혹시 여자 애 아냐? 생긴 것도 사실 엄청 귀엽게 생겨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