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 크라이-258화 (258/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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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실상

그나저나 이그젝션 길드도 엄청나군. 저 거대한 구체라는 것이 바로 그 중력의 구체라는 건가? 그래서 언데드 타이탄에게도 부서지지 않던 얼음들이 박살 나서 저렇게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로군.

“그럼 내가 할 일은 더 없겠군.”

“그래도 같이 있어줘.”

“혹시 모르는 상황을 위해서.”

아린과 아란이 예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눈동자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지만 알 것 같았다. 나에게 같이 있어달라는 그 마음을 말이다.

“그래, 같이 있어주지.”

이렇게나 표현이 서툰 녀석들이라니. 후우! 내가 어쩌겠냐. 이런 녀석들을 두고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찝찝하다.

“그런데 저것들은 왜 아리엔을 납치한 거지?”

“가상에서 실상을 얻기 위해서.”

“죽음에서 부활하기 위해서.”

“내 말은, 그 일에 대체 아리엔이 왜 필요하냐는 거다. 아리엔이 무슨 만병통치약 같은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냐? 그리고 아리엔은 지금 왜 저렇게 정신을 잃고 있는 거지? 로그아웃해서 육체만 이쪽에 있는 건가? 아니면 어떤 다른 수단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건가?”

내 질문에 아린과 아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상과 가상의 문제다.”

“라임도 알 테지. 지금의 우리는 현실의 우리와 이어진 꼭두각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우리다.”

“현실의 육신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온 자들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모두가 현실을 완전 부정한 것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육신을 버린 거지.”

“불구인 자.”

“불치병인 자.”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인 자.”

“여러 가지 사정들.”

“여러 가지 이유들.”

“그런 자들이 현실의 육체를 버렸어.”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그리워해.”

“그래서 다시 되돌아가려는 거야.”

“그래서 아리엔이 필요해.”

둘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라이프 크라이’지?”

둘은 말을 멈추었다.

“이상하군. 불치병인 자가 있다고? 그럼 그 잘난 ‘리셉티클’을 준비해서 바로 정신을 ‘리셉티클’로 다운로드하면 된다. 왜 ‘라이프 크라이’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려는 거지?”

아린과 아란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했다. 하지만 무언가 기색이 달랐다.

나는 이 둘이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임은 아직 몰라.”

“가상의 ‘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이프 크라이’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니까 왜 반드시 와야 하냐고! 그게 내 궁금점이라니까!”

내 말에 둘은 처음으로 약간 어두운, 그늘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겨우 눈을 살짝 내리깐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매우 어두워 보였다.

“여기는 완벽하니까.”

“현실과 가상 모두를 통틀어서 여기와 현실만이 진실로 완벽하다.”

“그렇기에 여기에 와야만 해.”

“현실에서 다시 살기 위해서는 가상이 되어 새로운 실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현실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버리고 가상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가상의 존재로서 현실 세계의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냐? 여기가 완벽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뭐냐? 여기는 허상의 세계이지만 완벽하다는 그 말은.

여기가 허상이냐, 실상이냐를 뺀다면 현실과 같은 또 하나의 세상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거냐!

“크크큭! 이그젝션 길드에서는 역시 알고 있었군?”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등이 오싹했다. 나는 바로 뒤로 돌며 본 액스를 던졌다. 그러자 쾅! 소리가 나며 본 액스가 튕겨져 나가는 게 보였다.

그 자리에는 발밑에 회전하는 검은 바퀴 같은 것을 매달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광살자 베헤만!

“이 미친놈! 안 죽었냐?”

“낄낄낄! 내가 죽기는 왜 죽어? 이렇게 재미있는 쇼를 두고 죽을 것 같아?”

“쇼? 그렇군. 네 녀석, 이걸 보려고 이번 일에 끼어든 거냐?”

“대가도 챙겼지. 원래 한 가지 일에 두 가지 이익을 얻는 것이 올바른 사회인의 모습이 아니겠나?”

녀석은 낄낄거리며 피 묻은 철장갑을 낀 손을 흔들어댔다.

재수 없는 녀석.

“그래··· 이 두 요조숙녀들께서 재미난 부분은 다 이야기한 것 같군. 다시 살아나려면 현실에서 현실로 이동할 수는 없어. 현실에서 현실로 가는 것은 결국 똑같거든. 그래서는 불구도, 불치병도, 그리고 여러 사고로 잃어버린 것도 되찾을 수가 없단 말이야. 왜 불치병이겠어? 못 고치니까 불치병 아닌가?”

“그건 이유가 못 되지 않나?”

“이봐, 라임, 너 뇌 의학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너보다는 잘 알걸?”

“오오! 정말이야? 나 이렇게 보여도 정신학과를 나온 몸이라고. 뇌신경학과도 나왔지! 여하튼 설명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야! 아주 재미있지!”

녀석은 정신병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람의 정신은 육신을 지배한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은 육신의 영향을 받는 거지! 네가 팔 한쪽이 없다고 치자고. 그런 상태의 너의 정신을 멀쩡한 ‘리셉티클’에 옮긴단 말씀이야!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설마······.”

“딩동! 그래. 팔이 달려 있어도 움직이지 못해.”

녀석의 미소가 위험스럽게 변했다.

“불치병도 마찬가지야. 정신을 그대로 옮기면 병은 분명 없지만, 그 병의 고통이 계속해서 육체에서 일어난다. 정신은 새로운 육체에 병이 없어도 정신을 옮기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몸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거지. 크크크크크큭! 재미있지 않나? 있지도 않은 병에 고통스러워해! 팔이 달려 있어도 움직이지 못해! 인간이란 이처럼 가련하고도 약해빠진 생명체야! 그리고 그런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는 건 즐거워! 즐겁지 않나! 크히히히히하하하하!”

녀석의 얼굴이 사람의 형상이 아닌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런가. 그래서 반드시 ‘라이프 크라이’에 와야만 하는 거로군.

하지만 그게 아리엔과 무슨 상관이냐?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크하하하! 잡담은 끝이야! 아리엔이 필요한 이유는 너희들도 모를 테지? 한 가지 힌트를 가르쳐 주고 죽여주지. 이그젝션(Exception)! 그게 힌트다.”

녀석이 귀신처럼 빠르게 다가오며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손을 내밀었다.

멸룡마수라고 했던 그 스킬인가?

공중전에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어리석은 녀석!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

쿠와아아아앙!

“크핫!”

막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아래에서부터 태풍만큼 강렬한 바람이 일어나며 나를 날려 보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린, 아란도 바람에 날려 위로 튕겨져 나가고, 베헤만 녀석도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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