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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앞
역겹군.
“그럼 내 정체가 뭐지?”
녀석의 목소리의 울림이 사라졌다. 빛이 사그라지고, 녀석이 레나와 같은 몸을 한 채로 허공에서 내려와 바닥 위에 섰다.
나신으로 땅을 내려선 아라한은 신이라기보다는 레나의 쌍둥이 자매로 보였다.
“신이잖아.”
내뱉듯 던진 내 말에 녀석은 웃음을 띠었다. 더 없이 즐겁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은 지독하게 레나를 닮아 있었다.
“레나가 걱정돼? 그 아이에게 손대지는 않을 거야. 다만···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잠시 잠재운 것뿐이야. 그래도 나의 아이니까.”
“하! 웃기는군. 퍽이나 레나를 생각해주는 척하지만, 네가 정말 신이라면··· 네가 창조했다고 해서 애정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세계는 부조리하다. 강자와 약자로 나뉘고, 부자와 빈자로 나뉜다. 그러한 세계에서 신이 창조물에게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부자와 강자만 사랑한다는 거냐? 그럴 리가 없겠지.
정답은 하나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 그게 신이라는 녀석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저주받은 왕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왜냐면 저주받은 왕의 바람은 죽음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인 평등 세계의 완성이니까.
“후훗. 그럴까? 신을 인간의 잣대로 재려고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 몰라?”
“헛소리는 그만 해라. 네가 신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네가 라이프 크라이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리엔을 내놔. 그리고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려 놔라.”
나를 조롱하는 저 녀석을 찢어 죽이라고 내 속에서 야수가 속삭이고 있다. 신이라도 물어뜯어 찢어주마.
나를 태어나게 하고, 라이프 크라이를 만들어내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따위는 관심 없다.
중요한 건 그 와중에 내가 고통을 받았다는 거다. 빌어먹을 저놈이 내 삶을 휘둘렀다는 거다.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이제 정말로 끝을 볼 시간이다.
“말은 필요 없겠지. 찢겨 죽어라!”
저주받은 왕에게 받은 권능을 모두 끌어내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흉험한 괴소를 토해내며 부르르 떨린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 의지를 담아 나는 그대로 일보를 내디뎠다.
쾅!
폭발이 일고, 내 몸이 빛처럼 녀석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게 녀석의 본체가 아닐지라도 우선 박살을 낸다! 그리고 저 뒤의 본체로 보이는 거대한 플레인 워커를 깨트려 주지!
퍼어엉!
“컥!”
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 그대로 벽에 쾅! 하고 부딪히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후려갈겼다.
염력인가? 하지만 나 역시 저주받은 왕의 힘을 가지고 있는 터. 겨우 이 정도로 당할 리가······.
“저주받은 왕의 힘을 얻는다고 해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고개를 드니 눈앞에 녀석이 레나의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보고 있다.
“이놈··· 큭!”
손이 안 움직인다. 손을 뻗어 녀석의 목을 틀어쥐려는데 전혀 뜻되지 않고 있다.
“너의 몸에는 저주받은 왕의 힘이 들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만든 몸이야. 그런데 그 몸을 가지고 나를 해할 수 있다면 웃기는 일이잖아?”
얄미운 저 주둥이를 짓뭉개버리고 싶다!
“뭐냐.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완전······.”
녀석이 화사하게 태양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시 속삭였다.
“나는 완전해지고 싶어.”
뭐라고?
적막 속에 위잉! 위잉! 하는 기계음만이 들린다.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나는 아라한을 바라보았다.
“나는 뭘까?”
“하! 현학적인 질문이냐?”
“신은 뭘까?”
“내가··· 알게 뭐야.”
“하핫. 너 아직도 정신 제어가 덜 풀렸구나? 그게 인간의 한계겠지.”
녀석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번갯불이 머릿속에서 우르릉거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알고 있었잖아? 라이프 크라이를 통해 그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조금씩 제어하고 있었다는 거. 그리고 너는 아직 그게 덜 풀린 거야.”
“대체··· 뭐가?”
“왜 의심하지 않아?”
“뭐?”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왜 의심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 신이 뭔지, 세계 창조의 비밀은 뭔지.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신을 만나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왜 세계를 창조했습니까, 혹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나요, 혹은 당신은 진정으로 전지전능합니까? 같은 거 말이야.”
일순 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웃기잖아. 신이라니. 살면서 신을 본 적이나 있어? 지금 너는 정말 신을 만난 걸까? 펜톤이, 그리고 저주받은 왕이 정말로 신일까? 아니, 그래. 신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 신들은 대체 뭐하는 신들이야?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이 있잖아.”
“뭐가 이상하지?”
“신은 왜 세계를 창조하고 관여하려는 걸까? 그리고 왜 신인 그 둘은 나에게 관여하는 걸까? 신인데 말이야.”
아라한은 웃기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렇지? 생각해봐. 이 세상의 종교에서 신들의 의미를.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전지전능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내려 주신다지? 그럼 펜톤은 뭘까? 저주받은 왕은 뭘까? 그리고 나는 뭘까?”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그걸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 너는 정신이 아직 제어되고 있다는 이야기지. 너 정말 바보구나. 여기까지 와놓고는 아직 속박도 못 풀다니. 그건 그렇게 강력한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바보 같아.”
“그게 세뇌를 걸어놓은 네놈이 할 말이냐!”
으득! 하고 이가 갈렸다.
“그래, 좋아. 네놈의 장단에 맞춰주지. 네놈이 말하듯 신의 의미가 뭔지 의문투성이라고 치자. 펜톤과 저주받은 왕이 원하는 게 신이라는 존재로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치자고.”
“흐응?”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네놈을 죽이고 싶을 뿐이야!”
우그그그극! 하고 몸에서 흉포한 힘이 흘러나왔다. 내 마음속 심연에 연결된 저주받은 왕과의 연결점에서 큰 죽음의 힘이 넘치듯 쏟아져 나와 전신을 내달렸다.
움직인다. 이제 움직일 수 있다!
“아라한··· 네가 진짜 신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지금 세계를 이 모양으로 만든 이유도 상관없다. 그냥 죽어라!”
좋아. 움직인다. 그렇다면 죽인다!
쐐에에에엑! 하고 날아간 손이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 감촉도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녀석의 몸이 내 옆에 와 있었다.
“하아! 정말이지 바보 같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겠지만.”
“너······.”
“의문이 있음에도 분노가 먼저라는 거지? 좋은 목적의식이야. 하지만 어쩌지?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을 텐데.”
그 눈동자가 내 얼굴에 바싹 다가왔다.
“네가 신이라서냐?”
신은 불멸의 존재. 그렇기에 저주받은 왕도 그저 봉인만을 당했다.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너, 신이 뭐라고 생각해?”
녀석을 향해 손을 휘둘렀지만 놈은 이미 다시 사라졌다. 내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사라진 녀석이 내 왼쪽에 나타나서 나에게 바싹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