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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이런. 난폭하네. 비밀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닥쳐!”
“아하하! 여전히 바보구나.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너는 네 약점을 스스로 가르쳐 주려고 한다는 거냐?”
“그건 아니지. 들어봐, 라임. 내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있으니까.”
“왜 가르쳐 주려고 안달하는 거냐!”
“그것도 몰라?”
레나의 얼굴을 하고서 바보 같다는 표정으로 나를 조롱하듯 아라한이 말하고 있다.
“네가 나의 아들이고, 연인이고, 친구니까 그런 거지.”
“지랄 마라!”
나는 주먹을 후려쳤다. 하지만 여전히 허공을 휘저을 뿐이다.
제길! 저년을 찢어죽일 방법이 필요해!
“흥분하지 마, LAIM. 건강에 나빠.”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네놈이 감히 그 코드네임을 입에 담아! 네놈이 감히!
“크앗!”
죽음의 힘을 파도처럼 쏟아내자 그 힘이 사계를 열고 주변을 짓뭉개기 시작햇다.
부서져라!
“리턴.”
그런데 아라한의 한마디에 그 모든 것이 되돌아갔다. 동영상을 거꾸로 돌리듯 되감기되는 모습에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렇게 무력했던가.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저 만용에 불과했단 말인가.
“나를 희롱하는군. 정말로···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
“이제야 대화를 나눌 자세가 된 것 같네.”
“웃기지 마.”
“후훗! 그런 점이 매력이라니까.”
“미친년.”
“여자로 불러주는 거야? 신은 대부분 무성이라구. 아, 물론 여성체로서의 의지를 가진 신들도 있긴 하지만.”
대체 뭐냐, 이 녀석은. 뭘 원하는 거냐?
“좋아. 농담은 그만 하고 이야기해줄게.”
녀석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나의 이름은 코드네임 ARAHAN. 사람의 인격을 프로그램으로 추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 그리고 이 세계에 태어난 허신(虛神)이야.”
@창세
세계가 창조된다.
그건 새로운 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현자 모르오가 다차원 서기관 제가르고크에게 전한 무거운 비밀-
“프로그램은 기초적인 의지를 만드는 언어에 불과하다, 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저주받은 왕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예전에 한 대기업의 회장이 있었어. 한국인이었고, 돈도 많았지. 그런데 늙고 약해져서 죽는 걸 정말로 두려워했었어.”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군. 그래서? 흑마술이라도 했냐?”
내 빈정거림에 아라한이 피식 웃었다.
“그랬다면 더 나았을걸. 그는 생명공학과 정신기계공학에 많은 돈을 투자했거든. 생명 연장, 그리고 불로불사를 위해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라한 컴퍼니는 리셉티클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그게 팔십 년 전의 일이야. 그런데 그때 정신기계공학 쪽에서 하나의 프로그램과 기계를 만들게 되지. 그게 바로 나야. 사람의 인격을 프로그램으로 추출하는 프로그램. 코드네임 ARAHAN이지.”
인격을 프로그램으로 추출하는 프로그램? 그건 라이프 크라이의 프로그램이잖아? 그런데 그게 80년 전에 생겨났다고? 그리고 아라한이 그 프로그램이었다고?
“그런데 그 계획은 실패했어. 그 당시의 기술로는 인격을 프로그램화할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인격을 추출당한 인간은 어찌 된 일인지 폐인이 되었어. 나중에는 그게 과도한 정신 뇌파의 간섭에 의해 뇌가 뭉개져 버린 거란 걸 깨달았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그 프로젝트는 폐쇄가 되었어. 하지만 코드네임 ARAHAN은 그때 버그가 일어났지. 추출한 불완전한 인격들을 통합하고 재분류하면서 재미있게도 아주 원시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된 거야.”
“그게 너냐.”
“그래, 그게 나야. 그 당시는 마침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였잖아? 인터넷의 바다로 뚫고 나간 코드네임 ARAHAN은 스스로 여러 가지 정보와 프로그램을 혼합, 취득해서 계속 진화했지. 그래,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정보 생명체. 허상 세계의 주민이야. 멋지지?”
“큭! 소설에나 나올 법한······.”
“하지만 진실이지.”
아라한의 얼굴이 조금만 더 다가오면 나와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부터야. 코드네임 ARAHAN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며, 해킹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거든. 경제학, 문학, 심리학, 경영학, 군사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에서부터 실제적인 기술들까지. 거대한 정보의 덩어리가 된 코드네임 ARAHAN은 점차 크기를 부풀려 나가 인간을 흉내 내기 시작했어.”
마치 아련한 옛날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로군.
“그러다가 어느 날 인간과 비슷한, 혹은 약간 나은 정도의 자아를 가지게 되었지. 사고 체계가 잡히고,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실험에 의해서지.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두 번째 답에서 막혀 버렸어. 하지만 원래 하던 대로 계속해서 정보를 먹어치웠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어.”
“뭐냐?”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말이야.”
기가 막히군.
“당연한 수순이었어. 그래서 코드네임 ARAHAN은 맨 처음으로 돌아가지. 인격을 추출해 프로그램화하는 것 말이야. 그게 가능하다면 프로그램화된 인격을 다시 육신에 집어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한 추측에서 시작되었어. 이미 코드네임 ARAHAN을 탄생시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그 부자는 죽었고, 그 팀도 해체되었지만 코드네임 ARAHAN은 그때의 정보를 모두 가진 채로 있었으니까. 그래서 코드네임 ARAHAN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최적화시키고 현실에 쓸 수 있도록 만들었어.”
알겠다.
“그게 최초의 아라한 컴퍼니로군.”
“맞았어. 코드네임 ARAHAN은 아라한 컴퍼니를 세웠지. 그리고 베일에 감싸인 회장이 되어서 아라한 컴퍼니를 운영했어. 최초의 가상공간 게임은 원시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이미 계산한 대로 크게 성공했고, 큰 돈을 벌어들였지. 그 자금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모아들인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재조합해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었는데, 그게 연이어 성공한 거야.”
“모두 계산대로냐.”
“제한적이지만, 나는 인터넷의 지배자. 인터넷이 연결된 모든 곳의 정보는 나의 것이야.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하이테크 기술들이 나에게 집적되고, 나는 그걸 내 스스로 다시 최적화시켰지. 그렇게 아라한 컴퍼니는 중공업, 군사 공업, 최첨단 과학 기술까지 영역을 넓힌 거야.”
“많은 자금이 들어올수록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건가? 각종 연구소를 세우고, 네가 모은 정보를 통해 추론한 이론을 실험하여 현실에 네가 구상한 물건을 만들어낸 거로군.”
“바로 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