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 크라이-347화 (에필로그) (347/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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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침묵이 나와 아리엔 사이에 흘렀다.

“그러니 너도 현실에서 도피하지 마. 봐. 아직 너와 나는 교제도 시작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나는 조금 멍청해서 말이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다느니 하는 건 못하거든.”

아리엔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부서지는 육신도, 고통도 모두 잊고 오로지 아리엔의 눈동자만이 내 전부인 양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봐. 네가 남자든, 여자든, 외계인이든 상관없으니까. 그 정도의 각오도 없는 거야? 너 역시 현실을 직시해줘. 그리고 나를 움직여 봐. 네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날, 너에게 반드시 대답해줄게.”

“어떤··· 대답을 해주실 건가요?”

“너를 사랑한다고.”

아리엔의 표정이 변했다. 눈이 녹고, 봄이 와 깨어난 새싹처럼 피어나는 미소와 함께 아리엔이 손을 뻗어 내 목을 휘감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라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라임을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라임의 말대로 저는··· 라임을 사랑하겠어요.”

아리엔의 입술이 내 입술에 부드럽고 달콤하게 키스를 해왔다. 그리고 세상은 창세의 빛으로 휩싸였다.

@에필로그

뒷 이야기 조금. 재미있겠지?

-누군가의 중얼거림-

“수고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청년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모두 도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술을 배우려고 온 아이들인 모양이다.

“모두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라.”

청년은 조금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나이는 많아봤자 스물로 보였는데, 몸이 아주 다부졌다.

청년은 작은 무술 도장의 관장이다. 무술 도장은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아무리 시스템이 잘 만들어진 사회라고 해도 우발적 사고와 사건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걸 떠나서 강해지려는 욕구는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청년은 도관 내부 정리를 시작하면서 TV를 틀었다.

「보십시오! 칼츠의 검이 지금 마장 기병 한타이스 고렘을 반 토막 냈습니다! 그 뒤에는 칼츠의 여동생으로 알려진 홀리프리스트 하이렌 양이 있군요!」

TV에서는 요새도 한참 인기인 라이프 크라이라는 게임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그걸 보면서 피식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의미일까?

“칼츠도 여전하군. 그럴 만도 한가? 그때 모든 것을 되돌렸으니까. 여동생이 다 나은 것으로 해둔 후로는 펄펄 날아다니네.”

청년이 도관을 정리하는 동안에 영상이 바뀌었다.

「신기한 라이프 크라이 속 세상 이야기의 리포터 김아정입니다. 오늘은 라이프 크라이 속의 또 다른 지옥으로 알려진 이공간인 ‘통조림’ 차원에 와 있습니다. 이곳의 개발자이신 마인 아크 님께 인터뷰를 해보겠··· 아앗! 놔, 놔주세요!」

방송 화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리포터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사··· 살려 줘요오! 마, 마감이······!”

그는 카메라에 ‘범인은 아크 형’이라고 피로 글을 적다가 누군가의 손길에 얻어맞고는 끌려갔다.

그 후로 화면이 삑 하고 바뀌었다. 방송 사고가 나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음 코너가 진행되었다.

이어지는 유쾌한 프로를 보면서 청년은 흐릿하게 웃고는 도관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는 도관에 딸린 샤워 룸에 들어가 막 씻으려는데, 위층과 이어진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다 끝났나요?”

“아아, 끝났어.”

내려온 사람은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길고 아름다운 생머리를 뒤로 넘겨 깔끔하게 묶었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긴 머리와 청초한 분위기가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미인의 흠이라면 가슴이 조금 빈약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다들 개구쟁이이지요?”

“그렇지, 뭐.”

“식사 다 되었으니까 가서 먹어요.”

“응? 벌써? 잠깐! 나 아직 씻지도 않았다구.”

“에? 그럼 같이 씻을래요?”

“뭐어? 야, 너······.”

“레나는 같이 했다면서요?”

“그건 레나가 우겨서······.”

“저는요?”

“이봐······. 으윽! 알았어.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구.”

둘은 그렇게 잠시 다투더니 같이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샤워실의 벽면에는 큰 LCD 화면이 매달려 있었는데, 샤워실을 제어하는 컴퓨터였다.

“아앗! 이봐! 어디를 만지는 거야!”

“후훗! 좋지 않아요?”

“레, 레나보다 더하잖아! 아리엔, 아니 윤환이 네가 이럴 줄은······.”

안에서 둘이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계단으로 또 한 명의 미녀가 내려왔다. 방금 전의 여인과는 다른, 보라색 머리가 매우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국적인 미녀였다.

“라임, 거기 있······! 둘이 지금 나 빼놓고 뭔 짓거리야!”

쾅! 하고 샤워실 문을 연 미녀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 끄지 않은 TV에서는 다음 코너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크 종족을 택해 영웅이 되신 박병석 씨를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샤워실 안쪽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TV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NPC 인기 순위 1위 베리얼이 기계적인 대사를 말하는 모습이라든가, 라이프 크라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NPC로서의 인공지능의 한계라든가 하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샤워실 문 옆에 부착된 LCD 모니터가 검은색으로 바뀌더니 하얀 글씨가 지나갔다.

<의지를 가지고, 삶의 외침을 가진 자만이 살아 있다 말할 수 있다. 신도, 인간도, 프로그램도 의지를 가진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의지를 가지고 삶의 외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중요한 문제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신은, 인간은, 프로그램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문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채 화면은 검게 변했다가 곧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샤워실에서의 소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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