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미래의 청사진 (1) >
김세진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오크의 강함이 부족해서 불안함이 모두 없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요즘 내팽개쳐 둔 일이 너무 많다.
요 근래 가장 활발한 연금술사로 꼽히던 고블린 연금술사는 약 3주동안 아무 포션도 내놓지 않았고, 세번째 아탄이는 아직 탄생조차도 하지 못했으며, 오크 대장장이의 ‘한 달에 두개’ 공약은 고작 두 달 만에 깨질 위기에 처했다.
물론 지금은 하젤린에게 빚진 돈도 다 갚았고, 설렁설렁 태업해도 평생 먹고 살 만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김세진은 굳이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4개월, 이번 1개월. 무려 5개월동안이나 음습한 동굴에 틀어박혀서 지켜낸 소중한 인생인데, 적어도 감히 상상만 했던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포션 가져갈 직원 좀 보내주세요. 뭐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비밀이에요”
오랜만에 하젤린에게 전화해서 포션을 가져가라 말했다. 하젤린은 기뻐하며, 요 근래 고블린 연금술사가 종적을 감춘 탓에 언론과 기사, 대중들까지 걱정했다고 말을 늘어놓았다.
“예. 다음에 봐요.”
그는 5분여간 이어진 하젤린과의 전화를 끊고서, 이번에는 인터넷을 켰다. 접속한 사이트는 ‘더 몬스터’ 단체의 공식 홈페이지.
유세정이 사람을 시켜 만든 사이트라서 그런지 때깔은 무슨 포털사이트 급으로 뛰어난데,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하루 접속자가 자신포함 2명뿐이다.
그 활성화를 위해. 김세진은 일부러 이 사이트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장인, ORK가 만드는 ’오크 시리즈’ 무기의 주인을 구합니다.」
- 오는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일주일 간, 오크의 대장간 본점에서 면접을 실시합니다(면접관은 단체장 김세진).
- 준비물은 사전에 고지했던 양식 그대로, 솔직하게 적어 오시면 됩니다.
- 가격은 합격자와 협의.
공지 글을 작성하고 엔터를 누르자마자,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그는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그러나 전해오는 말이 없었다.
액정화면에 찍힌 이름을 슬쩍 보니 ‘유세정’. 그는 피식 웃었다.
“왜 전화했어?”
-···이제서야 받으시네요.
세진이 다시금 묻자, 그녀는 그제서야 대답했다. 한기가 잔뜩 서린 목소리였다.
“미안. 일이 있어서.”
-알아요 뭐. 그리고 미안할 것까지 있나, 싶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멋대로 건 거니까, 별로 빈정이 상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빠는 아니었구나. 뭐 이런 느낌이 살짝 들었달까. 근데 별건 아니에요 그냥···.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게, 안 봐도 잔뜩 토라진 모양새다.
김세진은 왠지 지금 핸드폰을 쥔 그녀의 얼굴이 상상이 되었다. 눈이 가늘어지고,입술은 댓발 튀어나와서는 애꿎은 손톱이나 긁어 대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몸은 괜찮아?”
-...네? 아. 괜찮아요. 그런데··· 오빠가 저 구해줬다는데 맞아요?
“응. 우연히 그 근처에서 사냥하고있었거든.”
-뭐요? 사냥꾼이 혼자서 중급지대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고요?
순간 뜨끔했으나, 그는 부러 한숨을 내쉬고선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이럴 땐 뻔뻔한 게 최고다.
“야, 너 근데 무슨 사냥꾼 무시하는것처럼 말한다?”
-네? 아 그건 아닌···
“뭐가 아니야. 너 그러고 보니까, 나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사냥꾼이라 말하니까무슨 벌레 대하듯이 했었지?”
-예? 아, 아니에요! 무무, 무슨 버버, 내가 무슨 오빠를 벌레 했다고, 내가 언제··· 오해예요, 오해······
자신의 죄는 자신이 아는 법. 그때를 떠올린 그녀는 횡설수설 말까지 더듬으며 무지막지 당황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사람 무시하는 거, 그렇게 좋은 습관 아니야.”
이건 진심이다. 이른 나이에 사회라는 전선에 뛰어들면서 정말 수도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그중 가장 혐오스러운 부류는 지위와 능력으로 타인을 재단하고,자신보다 하급이라 판단하면 아주 철저히 무시하는 작자들이었다.
-···알겠어요.
그녀는 살짝 삐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이건 제 잘못이 맞았기에 별 다른 반항은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하나만 부탁해도 돼?”
김세진은 기왕 그녀가 전화한 거, 부탁까지 하나 하려했다.
-응? 부탁이요···? 뭔데요?
“너 SNS같은거 하니?”
-네? 아.. 하죠. 왜요. 팔로우 해드려요? 오빠 아이디 뭐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살짝 의외였다. SNS라고는 담 쌓고 살아왔을 줄 알았는데···
“지금 단체 공식홈페이지에 오크 대장장이 관련 글 하나 올려놨거든? 그것 좀 퍼트려줘.“
-네?
“보면 알아. 부탁할게.”
그렇게 말한 김세진은 무의식적으로 또 다시 전화를 끊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네. 알겠어요.
“그래. 고마워.”
둘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끝맺음을 맺었다.
그러나 둘 중 그 누구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안 끊어요?
“응. 네가 먼저 끊어. 뭐 할 말 더 있으면 하고.”
-···언제는 할 말 있다고 해서 더 들어줬나..
이번에는 들어줄게- 김세진은 덧붙이며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문득 아탄이가 생각나서였다.
그는 다시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탄이의 세번째 주인을 구합니다.」
- 모든 사항은 면담을 통해 결정합니다. (면담 장소는 강원도에 원주에 위치한 단체 더 몬스터의 사옥 ‘엘론 빌딩’.)- 개설된 게시판에 문의 글을 올리시면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릴 예정입니다.
-됐어요 뭐. 할 말 있지도 않고··· 끊을게요. 자세한 내용은 사이트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죠?
“응. 총 두 개 있을거야.”
-네. 그럼 끊을게요.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끊지 않고 기다렸다. 세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올~
“···진짜라니까. 시험하지마.”
그에 그녀는 장난기 섞인 감탄사를 한번 내지르고는, 이번에는 진짜 끊을게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세정이 SNS면 많이 홍보 되겠··· 잠깐.’
그러다 문득 그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SNS나 할까.’
방년 23세. 한창 사회에 끼어들고 싶은 욕구가 큰 나이. 그러나 여태까진 살기 위한 노동이라는 풍파에 휩쓸려 그런 걸 즐길 여력조차 갖추지 못했었다.
“···큼.”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유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
3월 21일. UN기사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에 한해 1등급 위험, ‘궤멸’을 선포했다. 1등급이란 위험한 몬스터가 너무 많고, 진압할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그 지역을 포기 해야하는 단계.
일단 균열의 진압은 아주 힘들게나마 성공해 아프리카 대륙의 남은 80%는 지켜냈지만, 그 나머지 20%는 등급이 분간되지 않는 극악의 몬스터 필드가 되어버려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이처럼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대사건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구촌의 수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몇몇 관련단체는 몬스터와 균열은 돈벌이가 아니라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최악의 위험이라며, 지금처럼 낙관만 하지 말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너무 먼 나라의 일은 가슴 깊이까지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일까. 활활 타오르던 애도의 불길은 일주일도 안 지나 사그라들고, 민중들의 관심은 금세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그 시작은 유세정의 SNS였다. 팔로워수가 이백만에 육박하는 그녀는 당장 일주일 전, 단체 ‘더 몬스터’에 관련된 글 하나를 올렸다.
그건 요 근래 아프리카 균열사태때문에 완전히 잊혀진 ‘세번째 아탄이’와 ‘오크 시리즈’에 관련된 글이었다.
글은 게재된 그 즉시 기사들은 물론 대중들에게까지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고, 더 몬스터의 공식 홈페이지는 터질 듯한 트래픽 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주 잠깐 서버가 터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지?'
그리고 지금 이 곳은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단체의 중심지. ‘더 몬스터’ 전용사옥의 꼭대기 층, 5층.
김유린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해야할 일도 특히 많은데.. 그렇다고 이 중요한 안건을 놔두고 개인업무하러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그녀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근데 많긴 하네. 뭐.. 그만큼 좋은 물건이긴 하니까.’
대기실에는 수 많은 기사들로 북적였다. 국내기사들은 물론, 외국 기사단에서 파견 온 기사와 마법사까지 무척 다양했다.
이건 아마 요 근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캐릭터 인형. ‘아탄이’ 때문.
요즘 기사단은 물론 마탑까지, 모두 단체 ‘더 몬스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를 보고 경쟁적으로 구매요청서를 보내왔다. 그 수가 너무 많아 하루에 열 번만 관련 면담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기사가 많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다른 기사단의 중책들은 수행기사까지 대동하고 온 듯했다.
‘..나도 몇 명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차오르는 외로움에 김유린은 살짝 후회했지만, 다시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어차피 혼자 간다고 하지 않았으면 채영호가 끼어들었을 일. 오히려 지금이 더 낫다.
“어! 김유린 기사님 아니십니까.”
유린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와중에, 별안간 남자기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순간.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런 상황이 싫어 일부러 모자와 마스크까지 꼈건만···
유린은 살짝 불편했으나, 친절한 태도로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서 맞이해주었다.
아탄이를 위해 이 곳에 모인 기사들은 대부분이 기사단의 간부급 이상일 테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자신은 다른 기사를 은연중에 무시한다는 채영호의 말도 괜히 떠올랐다.
“칠흑도 왔어?”
“허어··· 이거 참. 욕심이 너무··· 크음.”
헌데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넓은 대기실 안, 기사들이 모두 날카로운 눈빛으로김유린을 적대시하며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목청껏 말했다.
“근데 칠흑기사단은 이미 아탄이가 하나 있는걸로 아는데···. 뭐 이해해요. 두 개가 있으면 좋긴 하겠죠. 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타이틀도 한동안은 무사할테고. 사실, 다른 기사단보다 칠흑이 가져가는 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좋을테니까요. 그렇죠?”
아주 노골적으로 엿 먹어라- 는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그에 살짝 화가 난 유린은 무어라 대응하려 했으나, 이름모를 기사는 무운을 빕니다- 따위의 말도 안되는 내뱉고서 어딘가로 사라질 뿐이었다.
“아니 저···”
그녀가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났으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
“어휴. 혼자 온 거봐. 괜히 실적 분산될 까봐··· 참, 괜히 최연소 고위기사가 아니네.”
“독하네 독해.”
얼굴과 이름은 없었고, 오직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유린은 그제서야 눈치챘다. 이곳은 거대한 정치판이다. 이들은 아탄이를 위해 잠시 예의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적의가 담긴 목소리에 연신 얻어맞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이곳에 자신의 우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김유린은 기사들의 공격적인 시선과 차가운 비아냥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 했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단체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대백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오정혁과 그 아들 오대수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들의 옆구리에는 아주 두꺼운 서류철과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저것들은 모두 그들이 PR를 위해서 준비한 자료들.
대백기사단이 아탄이를 구매하면 '더 몬스터'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실리적인 이야기부터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까지. 그들은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김세진을 맞이했다.
물론 기사단이 아탄이에 관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토록 본격적일지는 예상 못했던 김세진은 그저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아. 예···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결과는 2주 뒤에 공표하겠습니다.”
언뜻 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둘이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그렇게 보기 유쾌 하지만은 않았다.
“최대한 잘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기사단에서는···.”
오정혁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기사단이 김세진과 그 단체에 줄 수 있는 혜택을 읊으며 끝까지 노력했다.
“..후.”
그렇게 면담이 끝난 후, 잠시 쉬는 시간. 김세진은 일단 종이에 그들이 말한 내용을 모두 적어 놓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오. 벌써 5만명됐네.”
고작 3일새에 팔로워 5만을 찍어버렸다. 과연 유세정이 해준 홍보의 위력은 대단했다.
홍보래봤자 그냥 팔로우를 해준 것뿐이지만··· 그녀의 팔로우는 오직 한 명. 김세진뿐이었으니 대중들은 그의 SNS계정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겠지.
-다음, 들여보낼까요?
그때 새벽에서 붙여준 임시직원이 물어왔다.
“예. 그렇게 하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뒤이어 한 여인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세진에게도 익숙한 기사, 김유린이었다.
헌데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얼굴이 벌게지고, 고운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에서는 피가 살짝 새어나오고 있었다.
“칠흑도 왔어?”
“허어··· 이거 참. 욕심이 너무··· 크음.”
헌데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넓은 대기실 안, 기사들이 모두 날카로운 눈빛으로김유린을 적대시하며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목청껏 말했다.
“근데 칠흑기사단은 이미 아탄이가 하나 있는걸로 아는데···. 뭐 이해해요. 두 개가 있으면 좋긴 하겠죠. 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타이틀도 한동안은 무사할테고. 사실, 다른 기사단보다 칠흑이 가져가는 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좋을테니까요. 그렇죠?”
아주 노골적으로 엿 먹어라- 는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그에 살짝 화가 난 유린은 무어라 대응하려 했으나, 이름모를 기사는 무운을 빕니다- 따위의 말도 안되는 내뱉고서 어딘가로 사라질 뿐이었다.
“아니 저···”
그녀가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났으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
“어휴. 혼자 온 거봐. 괜히 실적 분산될 까봐··· 참, 괜히 최연소 고위기사가 아니네.”
“독하네 독해.”
얼굴과 이름은 없었고, 오직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유린은 그제서야 눈치챘다. 이곳은 거대한 정치판이다. 이들은 아탄이를 위해 잠시 예의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적의가 담긴 목소리에 연신 얻어맞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이곳에 자신의 우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김유린은 기사들의 공격적인 시선과 차가운 비아냥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 했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단체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대백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오정혁과 그 아들 오대수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들의 옆구리에는 아주 두꺼운 서류철과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저것들은 모두 그들이 PR를 위해서 준비한 자료들.
대백기사단이 아탄이를 구매하면 '더 몬스터'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실리적인 이야기부터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까지. 그들은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김세진을 맞이했다.
물론 기사단이 아탄이에 관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토록 본격적일지는 예상 못했던 김세진은 그저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아. 예···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결과는 2주 뒤에 공표하겠습니다.”
언뜻 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둘이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그렇게 보기 유쾌 하지만은 않았다.
“최대한 잘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기사단에서는···.”
오정혁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기사단이 김세진과 그 단체에 줄 수 있는 혜택을 읊으며 끝까지 노력했다.
“..후.”
그렇게 면담이 끝난 후, 잠시 쉬는 시간. 김세진은 일단 종이에 그들이 말한 내용을 모두 적어 놓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오. 벌써 5만명됐네.”
고작 3일새에 팔로워 5만을 찍어버렸다. 과연 유세정이 해준 홍보의 위력은 대단했다.
홍보래봤자 그냥 팔로우를 해준 것뿐이지만··· 그녀의 팔로우는 오직 한 명. 김세진뿐이었으니 대중들은 그의 SNS계정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겠지.
-다음, 들여보낼까요?
그때 새벽에서 붙여준 임시직원이 물어왔다.
“예. 그렇게 하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뒤이어 한 여인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세진에게도 익숙한 기사, 김유린이었다.
헌데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얼굴이 벌게지고, 고운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에서는 피가 살짝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듯한 모양새로 터벅터벅 걸어와, 김세진의 집무책상 앞으로 와 앉았다.
*
“..될까요 아버지?”
“그럼. 딱 봐도 분위기 좋았잖냐. 그리고 여태 김세진의 측근에 쓴 돈이 얼만데, 그 무기점의 엘프 매니저한테도 선물이랍시고··· 크음.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매니저요?”
오대수의 물음에, 오정혁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들이 가엾고 딱하다는 눈빛이었다.
“무기점의 엘프 매니저. 지금 김세진의 애인이라 추정되는 여자말이야. 너는 어떻게 된 게··· 후. 됐다. 말을 말지 내가.”
오정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성큼성큼 걸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대수는 그런 아버지를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큼지막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뒤를 따랐다.
“역시 아버지십니다. 그 짧은 새에 단체장의 애인과 친해지시다니···.”
“아서라. 아직 추정이라고 말했잖냐. 확실한 건 아냐. 뭐. 김세진이란 남자가 그 엘프를 보고도 아무런 흑심이 들지 않았을리는 없겠지만··· 근데 너는 도대체 뭐가 좋다고 방실방실 웃는게냐?”
오정혁은 그렇게 말하며 아들의 뒤통수를 툭 때렸다. 그럼에도 오대수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왠지 조금 모자란 아들, 그러나 아버지로서는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에이 짜식. 살 좀 빼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건만.”
그는 아들의 뱃살을 꼬집으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