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97화 (97/174)

< 28. 일상의 변화. (3) >

오크 무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터져나온 충격파에 의해 창천을 뒤덮던 수천의 촉수들이 마치 안개처럼흩어졌다.

그렇게 촉수의 쇄도가 잠시 끊어지자 자연스레 기사들의 숨통이 트이게 되었고, 제 페이스를 되찾은 그들은 나름대로의 반격을 개시했다.

취이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조의 촉수는 끝이 없었다.

허나 정예 오크들의 일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파괴적인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촉수가 재로 스러졌다. 기술이나 기교따위 없이, 오로지 경악할 만한 힘으로.

──!

수 많은 오크 중 특히 위엄있고 웅장한 오크가 야성의 포효를 내지르며 지축을 크게 박차, 허공으로 도약했다.

오크의 각력은 무려 수십미터를 가뿐하게 뛰어넘어 놈의 닭벼슬로 거세게 쇄도하여─

취이이익-

본능적인 위협을 감지한 괴조의 촉수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오크에게로 맹독을내뿜었다. 허나 오크는 개의치 않고 그저 전신에 레비아탄의 비늘을 최대로 활성화했다.

호기롭게 뿜어진 맹독이었으나 비늘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오히려 표면에 달라붙은 먼지를 씻겨냈는지 방금 전보다 반들반들해졌을 뿐.

‘조금 부족하다.’

라이칸슬로프가 아닌 이상, 오크의 각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목표는 놈의 약점인 닭 벼슬이었으나 도약의 한계치는 목젖 언저리.

어쩔 수 없이 오크는 목젖에 강타를 사용했다.

타아아앙-!

타격과 동시에 맑고 청명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울대를 공격당한 괴조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특기인 계명성을 내지를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 차선책도 어느정도 괜찮지 않은가.

-취이이익-

괴조와 촉수는 서로 독립적이기에, 괴조가 괴롭다고 해서 촉수도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주가 위험에 처하자 촉수들은 이성을 잃고 오직 한대상, 숙주를 공격한 오크를 향해서만 쇄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최악의 패착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김유린은 시간이 아까워 단 한 단어를 외치고서 곧바로 도약했다. 기사들은 모두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고, 10인의 기사 전원이 괴조를 향해 뛰어올랐다.

허나 굳이 10명까지도 필요 없었다. 김유린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전신의 마나를쥐어짜내, 마나로 번뜩이는 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목적성 ‘깨지 않는 기절’을 담아냈다.

-······

유린의 일격이 명중함과 동시에 괴조의 몸이 스르르 쓰러졌다.

“허으···.”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린도 다리를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은 마나가 부족했던 탓에 고작 10초가 최대였으나, 그 10초면 충분하다.

촉수는 여전히 반응하지만, 정작 무너져내린 괴조는 그저 치킨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

무너진 치킨 위로, 오크의 무리와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렇게 김세진은 기분 좋은 알림을 받게 되었다.

사실, 김세진이 일부러 정예오크들까지 이끌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태까지의 실마리로 보아, 오크들과 함께 무리사냥을 하면 혹시나 족장으로 진화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

그리고 그 예상은 기분 좋게 적중했다.

[조건 완료: 무리 사냥. (3/3)]

[포밍 몬스터가 오크 대전사에서 오크 족장으로 진화합니다.]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고, 몸의 털이 길어집니다.]

‘···털?’

무슨 털? 머리털이 스킬과 동급이라는 뜻인가?

그는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이내 상태창을 확인한 순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마나친화력과 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00 이상씩 뻥튀기 되어있었다.

라이칸슬로프의 본능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인간형의 김세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도 무려 18.5시간으로 늘었으니··· 이 이상 더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

이제는 족장이 된 오크가 괴조의 닭벼슬이 뜯어냄으로써 전투가 끝나자, 광활한 대지를 가득 메우는 것은 적막이었다. 10인의 기사들은 기진맥진 숨을 고르며 영웅오크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그 와중에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김유린이었다. 그녀는 오크족장을 향해 천천히 발자국을 뗐다.

황량한 바람이 나뒹굴며 발목을 간지럽히는 속에서, 유린은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채 오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진 엷은 미소가 지금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와주셨네요. 안 오신다더니.”

그녀가 수줍게 말을 이었다. 오크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땀과 정체모를 검은 혈액으로 범벅되어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어 있었다. 게다가 예민한 후각에는 시궁창을 연상시키는 악취마저도 솔솔 풍겨왔다.

“···아, 저..”

그러나 자신의 실태를 모르는 김유린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오크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몸을 베베 꼬았다.

“······.”

오크는 헛웃음을 터트리고서 등을 돌렸다. 족장이 되었으니 이미 얻을 만한 것은 모두 얻었다. 시궁창 냄새를 견뎌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저, 오크 씨!”

김유린은 냉정하게 멀어지는 그의 뒤를 쫓으려 했으나, 어디선가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이혜린의 방해였다. 유린은 얼굴을 굳히고서 팔을 뿌리쳤다.

허나 혜린은 아주 현명하게도, 별다른 말 대신 깨끗한 검면을 보여주었다. 검면에맺힌 유린의 얼굴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아.”

그녀는 자신의 처참한 몰골에 입을 떡 벌린 채 충격에 빠졌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

레이드가 끝나 기사들이 모두 무사귀환함과 동시에 엠바고가 풀렸고, 아주 멀리서 레이드 광경을 지켜보던 언론들은 일제히 보도를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레이드에 영웅오크가 끼어들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갔다. 여론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괴조의 강함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롯이 오크가 레이드를 도와줬다는 사실만을 대서특필했다.

그 관신집중에 처음부터 오크와 레이드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던 김유린이 재평가 되었으나, 그녀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채 기자회견을 했다.

[저는 영웅오크의 부락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러면서 영웅오크 족장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레이드를 계획하는 순간부터 저는 영웅오크와 함께 레이드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찾아와주었습니다···.]

그녀의 기자회견으로 오크는 뭇 여인들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여자들이반하는 나쁜남자의 전형이라나 뭐라나.

한편, 여러 학자들은 이 일을 두고 세계의 역사에 기록될 ‘신기원’이라며 뜨거운 흥분을 표출했고 이 대사건을 주제로 수 많은 논문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허나 막상 그 난리를 야기시킨 김세진은 8월이 처음 시작하는 날, 꽤 의외의 장소에 출석해야만 했다.

“숫자는?”

강원도에는 하늘의 저편까지 아득히 솟은 탑이 하나 있다.

현대 빌딩 마천루의 숲 사이에서도 단연 압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질적인 탑.

이 탑은 기사의 성지라 불리며,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최종예선까지 통과한 사람은 총 205명으로 꽤 많습니다.”

“꽤 수준이 아닌데?”

에덴은 매년 시험을 통해 기사를 뽑고 그들의 등급을 심사하는데, 오늘은 하급기사, 즉 전국의 기사단에 배정 될 정식 기사를 뽑는 날이다.

그리고 보통 이 시험에는 기사 아카데미의 생도들과 특성 개화자들이 참가한다.

생도들은 특성이 없더라도 아카데미에서의 성적을 제출하면 시험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고, 특성 개화자들은 간단히 자신에게 '유의미한' 특성이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비율은?”

“거의 전부, 아니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생도 혹은 재수생도입니다. 생도 중에서는 10명만이 특성을 지니고 있고요.”

“주목할만한 인물이 있나?”

“예. 세 명 있습니다.”

부하기사가 상사에게 차트를 건넸다.

“먼저 이유진. 성별은 여자로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몹시 특출납니다. 벌써부터 능숙하게 검기를 다루는 것이, 포스트 김유린 혹은 유세정이라 불리게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재능이 좋은 여기사는 얼굴도 예쁜 게 트렌드인가?

“하하..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여성이 마나를 다루다 보면 필연적으로 피부가 고와지고 골격이 이상(理想)적으로 잡히니까요.”

상사의 입가에 조소가 그려졌다. 아직도 그딴 미신을 믿는 바보같은 놈이 있다니··· 한심할 따름이다.

“다음은?”

“다음은 김명한. 성별은 남자로 특성이 희귀합니다. ‘아수라’라고, 주변의 마나를제 마나처럼 부릴 수 있다는군요.”

“호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생도가 아닌 인물인데, 노숙자 출신입니다. 꽤 오래전에, 길거리에서 동사하기 직전 특성을 얻어 지원했다는 군요?”

상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매번 있는 사례지만, 들을 때 마다 짜증나는 소리다. 노력따윈 없이, 오직 특성의 도움만으로 기사가 되려는 빌어먹을 양아치들···

“이름이 뭔데?”

“’진세한’입니다.”

“···잘 기억해뒀다가 뭔가 이상한 짓 할것 같으면 알아서 퇴출시켜.”

진세한.

사실, 그것은 김세진이 위장한 신원이었다.

그가 키워온 첩보원들 만으로도 신상 하나를 위조하고 생성하는 것쯤은 눈감고도가능한데, 거기에 유백송까지 도움을 줘서 만든 완벽한 신원.

가장 큰 문제인 외모도 ‘부분 야수화’로 해결을 했다.

물론 전체적인 틀은 김세진인지라 닮은건 어찌할 수 없었지만, 눈매와 콧대, 턱선을 늑대의 그것처럼 굵고 날카롭게 변용하고서 콧, 턱수염까지 길게 해놓으니 명백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게는 되었다. (문제적인 향기는 악취를 풍기는 신기한 아티펙트로 최대한 억제를 했다.) 그리고 그가 외면을 변용해가면서까지 에덴의 기사시험에 참여한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약 4주 전, 7월 14일로 거슬러간다.

평범한 오후, 김세진은 길드의 사무실에서 유백송과 만난 날.

*

국장의 자리를 내려놓은 유백송은 뭔가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장관 취임은 언제 하시지요?”

“몰라. 언젠가 정해지겠지.”

김한설은 뇌물수수 및 공여 등등··· 여러 명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만 김세진에게 연락을 하면서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하는 것 같지만, 세진은 냉정했다.

“만약 그 위치까지 올라가면, 제가 말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거겠죠?”

“···근데··· 이미 알아봤어.”

유백송의 말에 김세진의 눈이 화등잔이 되었다.

“그, 그···”

“허나 네가 기대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정보는 나조차도 열람이 불가능했어.”

“···뭐요?”

그러나 순간의 기대는 빠르게 식어 실망으로 돌변했다.

“왜냐면 나도 자격이 없거든. 그래서 나는 그 정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만 알았어.”

유백송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딥니까?”

“에덴의 중상층부 중 하나, '이급 기록물 보관실’. 아마 네 아버지가 에덴의 기사였었던 것 같아.”

“······.”

“너도 알겠지만 에덴은 범세계적인 기구이다 보니 거의 독립적인 나라나 다름이 없어. 물론 그 나라의 실정에 따라 시스템이 다르게 적용되긴 하지만, 내부인사가 아닌 이상 정보를 빼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김세진은 이내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여태 벌여왔던 게 다 허투루 돌아가버렸으니, 실망과 허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망 다음은 분노였다. 아버지가 에덴의 기사였다는 추측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무슨 진실이 숨겨져 있길래 에덴의 이급 기록물이 되어 중상층에 보관된 건지.

“···그럼 그걸 빼내려면 에덴의 기사가 되어야 하겠네요.”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근데 지금와서 누가 어떻게 에덴의 기사가 될 수 있겠어?평범한 기사도 되기 힘들다고 징징대는 실정인데.”

에덴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지망'을 포기하고 '자원'의 형식을 택해야 한다.

즉 시험에 합격했으면서도, 수 많은 다른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오직 에덴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

게다가 국내로 한정된 것이 아닌 전세계가 대상이다 보니 그 기준이 하급기사 치고는 무지막지하게 높으며, '자원'의 기회는 평생 단 한 번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빈도수는 한국 한정 3년 당 한 명 꼴.

그만큼 에덴은 앞으로의 '재능'과 '가능성'을 중요시 여기는······.

“···.”

“···.”

순간 김세진이 유백송을 바라보았다. 유백송 또한 김세진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왠지 미묘한 눈빛이 오고 갔다.

허나 김세진 본인은 '사냥꾼'이 된 전력이 있고, 또 너무 유명하기에 신념을 중시하는 아덴의 기사가 될 수 없다.

"..너 아티펙트 만들 줄 안다고 그랬지?"

유백송이 먼저 말했다. 외모를 한정적으로 변용시키는 아티펙트는 흔하지는 않지만 있기는 하다.

"그럼요."

말과는 다르게, 사실 그에게 아티펙트는 필요가 없었다.

"에덴의 기사는 출퇴근도 자유롭다면서요?"

"그렇지. 에덴은 다른 기사단이나 국가의 의뢰를 받는 족속들이거든. 그래서 시간적 여유가 많지."

김세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딱 맞는 조건이 아닌가.

"근데 너 싸움 좀 하냐?"

"제 특기중 하나입니다."

물론 대련의 특성상 전력으로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과 대련을 해보지는 않았으나, 인간인 상태로도 중급 중에서도 실력이 빼어난 기사와 동등할 정도는 된다.

"시간이 좀 오래걸릴 텐데 괜찮은가?"

"···시간이 왜 오래걸립니까? 기사는 철저한 실력주의인데."

혹시라도 있을 합숙시험. 그것만 제대로 조심하면 된다.

*

그렇게 해서 김세진은 '진세한'으로서 에덴에서 벌어지는 기사시험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두 반갑다.”

에덴은 매 시험마다 꽤 명성높은 기사를 임시 교관으로 두는데, 이번의 교관은 김세진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주지혁.

그는 지가 낼 수 있는 최대한 엄숙한 모습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척 했다.

“자네들은 앞으로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탑으로 참석하여 여러 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 동안 에덴의 탑 1층에 구비된 기숙사에 머물 수도 있고,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도 있다······”

‘···하아.’

그를 바라보며 세진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더 커버 보스도 아니고,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단 모두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다, 실시.”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있는 사이 주지혁의 일단연설이 끝난 듯했고, 김세진은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야.”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지망생들은 동기, 재수, 지연 등등··· 끼리끼리,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마치 빗장수비같은 그들을 뚫을 틈은 존재치 않았고, 심지어 204명의 생도들은 이미 좋은 특성빨로 편하게 시험을 통과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세진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는 무려 3초만에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저 남자지?”

“뭔 특성인지는 모르겠는데, 대단한가봐?”

“우리 엄마가 말하는데, 노숙자였대 노숙자. 저 수염봐. 더러워 죽겠네.”

예민한 청각으로 모든 대화를 엿들으며 김세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사, 라고해봤자 역시 어린 건 변함이 없구나.

“근데 수염 자르면 얼굴은 꽤 잘생길 것 같은데?”

“···그러면 뭐하냐. 그냥 아무 노력도 없이 로또맞은 놈이나 다름이 없는걸.”

그는 자신을 칭창하는 대화는 귀신같이 캐치해내었고,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선남선녀라고 할까. 둘은 그저 둘이었으며,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여기 본다. 이리로 올 것 같은데?"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오면 꺼지라 해."

허나 여자는 냉소적이었다.

'안 간다 안 가.'

스리슬쩍 가능성을 엿봤던 김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턱선을 따라 길고 빼곡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뭔가 중독적인 감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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