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제대로 된 시작(2) >
“연금술은 무가치에서 가치를 창조해내는 학문입니다. 포션을 만드는 연단은 물론······.”
참석인원 거의 전부가 후드를 푹 눌러 쓴, 뭔가 범죄인의 소굴같은 연금술 협회모임은 예상대로 지루했다. 이것은 비단 김세진 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앉은 하젤린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녀는 연신 하품과 한숨을 번갈아 뱉어댔다.
“언제 끝납니까?”
그가 고블린 연금술사가 아닌 ‘길드장’의 자격으로 협회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블린 연금술사의 활약이 여타 연금술사들의 자극제가 된 덕택에 현재 국내 포션계는 유례없는 활황상태가 되어, 포션이 충분한 국내를 넘어 상대적으로 포션이 부족한 해외로 수출하기 위함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중에 고블린 연금술사의 혁신이라고 저희가 발표할 시간이니깐. 그거만 끝내고 집에 가면 돼요.”
그는 늘어져라 하품을 내쉬며 부디 그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5분, 10분, 20분··· 피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요즈음 연금계를 넘어 세계에서 주목받는 연금술사, ‘고블린 연금술사’라는 술사가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를 로데스의 재림 혹은 연금의 혁명이라고 칭하지요.”
“저, 다녀 올 게요. 세진씨는 제가 부르면 올라와서 정해진 대본만 읽어주세요.”
하젤린은 세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허리를 숙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연금술사를 발굴한 ‘요선 알케미하우스’ 책임자 분을 모시겠습니다.”
그녀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연금술사들답게 박수따위는 없었다. 그저 몇몇 선망과 질투어린 눈빛이 단상 위로 향했을 뿐.
“크, 크음.”
로드를 푹 뒤집어 쓴 하젤린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아아아, 안녕하십니까. 여여여, 여러분들.”
···대참사가 벌어졌다.
*
하젤린과 김세진은 협회모임에서 고블린 연금술사의 포션 해외 수출계획을 선언했다. 물론 하젤린은 단상 위로 단 한번도 나가보지 않았던 다크엘프답게 횡설수설과 말 더듬기를 반복했으나, 연금술사들은 익숙한 일인 양 무덤덤하게 대했다.
“차가 되게 편안하고 좋네요?”
그렇게 무사히(?) 세미나를 마치고, 김세진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젤린은 차 내부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감탄했다.
“···그래요?”
“네. 잘 바꾸셨네. 이거 브랜드 유명한 거 아니에요?”
그는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브랜드 자체도 유명할 뿐더러, 차종 또한 없어서 못살 정도이지만··· 그걸 굳이 제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진세한 기사가 중하급 기사로 승격을···
허나 하젤린이 호기심 어린 손으로 라디오를 건드린 순간 진세한의 얘기가 흘러나왔고, 세진은 황급히 라디오를 껐다.
“요즘 저 남자 얘기 많이 나오네요.”
“그러게요. 근데 저, 매번 하젤린 씨 보면서 궁금했던 게 있는데···”
그는 하젤린의 완벽한 옆모습을 힐끗 살피며 조심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으음? 뭔데요?”
“아 그게···.”
“근데 김세진씨, 다른 여자를 궁금해 할 입장 아닌거 아니에요? 이미 유부남이나다름 없잖아요.”
“···.”
하젤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김세진은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 다시금 운전에 집중했다.
참고로 그가 유세정과 연애-동거-를 한다는 사실은 모든 길드원들에게 널리널리알려지게 되었다. 이혜린에게 들으니 유세정이 말실수인 척 직접 말했다고 한다.
“하핫, 농담이에요 농담. 어차피 뭐··· 저랑 세정이도 친하니까요 괜찮아요. 뭐가궁금한데요? 뭐든 물어봐요. 세진 씨는 저한테도 은인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 말에 김세진이 하젤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젤린 씨는 다크엘프잖습니까?”
“예. 그렇죠.”
“근데-”
“아···.”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그녀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부, 말하시는 거죠?”
“···예.”
엘프는 총 세종류로 나뉜다. 엘프, 하이엘프, 다크엘프.
여기서 엘프는 대중매체에 익히 알려진 하얀 피부, 아름다운 외모, 길쭉늘씬한 사지를 지닌 미적존재를 일컫는다.
그 다음으로 하이엘프. 이른바 ‘귀족엘프’라 하여, 같은 엘프들의 동경과 존경을 받는 고귀하고 고결한 핏줄이다.
마지막으로 다크엘프. 그들은 어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피부색 또한 다른 엘프와 달리 거멓기에 다크엘프라고 불린다.
“으음······.”
약간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린 하젤린을 보며, 김세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호기심 때문일까. ‘곤란하시면 안 알려주셔도 돼요’ 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사라졌다.
“···궁금해요?”
“아··· 뭐.”
그는 일부러 얼버무렸다. 그리고 하젤린은 그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고블린 연금술사께서 궁금해하시니······. 간단해요. 제가 포션을 만들었어요.”
“예?”
“포션이요 포션. 피부가 하얘지는 포션. 그거 먹고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 덕분에 피부가 하얘졌어요.”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한 켠으로는 어느정도 납득이 가기도 하였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이 ‘키가 크는 포션’을 만들었다는 개소리를 했을 때도 깊은 의심없이 믿어주었으니까.
“근데 왜 그러셨어요? 하젤린 씨는 피부가 까무잡잡 하셨어도 충분히 아름다우셨을······”
“김세진 씨,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으시네.”
세진이 조금 더 깊게 물었으나 하젤린은 미소로 일축했다.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가 스며있었기에 그는 거기서 그만두었다.
그렇게 화제는 다시금 일상으로 전환이 되고, 이사했느냐, 안했다, 얼마벌었느냐, 비밀이다 따위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차는 하젤린의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과연 10억짜리 답다, 라는 자찬을 속으로 하며 김세진은 차를 세웠다.
“잘가요.”
“네. 매번 고마워요. 아, 저희 2주 뒤에 또 만나야 하는 거 알죠? 세진씨가 말한 해외협상도 해야하니까요. 미국으로 날아가야 돼요.”
“···예?”
갑작스런 말에 김세진이 벙찐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제가, 제가 날라간다고요?”
“네. 연금술사가 공식적으로 인가한 직접적인 대리인이 꼭 필요해요. 분명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
잔뜩 당황하는 김세진을 바라보는 하젤린의 입가에는 어느새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차피 상관 없잖아요 세진 씨 요즘 시간도 많고. 2박 3일이면 충분할거예요.”
“알잖아요 저···.”
“다 알아요. 근데 저는 세진 씨 비밀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그리고 세정이한테도 제가 내일 일 끝나고 직접 말할게요.”
*
탁!
유세정이 수저를 탁자 위로 강하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복합적 감정이 묻어나왔다. 분노, 어이없음, 두려움, 불안 등등···.
“말이 된다고 생각해?”
목소리는 마치 서리가 낀 듯 차가웠다.
“···일이잖아.”
“그래도! 아니, 그럼 나도 갈래!”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 동원령이잖아.”
새벽을 비롯한, 아니 에덴을 제외한 모든 기사단은 현재 몬스터 사태 탓에 동원령이 내려와 불침번은 물론 순찰임무까지 하루에 3시간도 채 못 자는 실정이다.
“아, 아··· 근데 왜? 오빠가 꼭 가야 돼? 언니 혼자만 가면 안 되는 거야?”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선호 씨랑 용병 몇 분도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별로 걱정 안해도 돼.”
“···이씨.”
김유손의 아들 김선호까지 간다고 하니··· 그녀는 입을 삐죽 내뺀 채 수저를 거칠게 놀렸다. 할 말은 참 많다. 무지 많은데, 그러면 속 좁은 여자로 비쳐질 까봐 그러질 못하겠다.
“흠···.”
세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쭉 뻗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금방 올 게. 최대한 빨리. 나도 너 보고싶을 거거든.”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와, 입가에 스며든 잔잔한 미소.
유세정은 그와 눈을 마주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애타고 속타는 법.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것을 감내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매일 전화해야돼?”
“당연하지.”
“···맨날 말만··· 어디 비행몬스터 안 날아오려나.”
*
출국 하루 전의 늦은 저녁.
김세진은 김유손의 급한 호출에 직접 용병단까지 행차했다. 김유손의 파리한 안색에 세진이 걱정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꿈을 한번 더 꾸었습니다. 그런데··· 최대한 빨리 전세계에 먼저 알리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예?”
“제가 본 미래는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은 미래, 그곳에서 세계는 지옥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일단 세계에 경각심이라도 일으켜야 합니다.”
세진은 수정구로 통신을 나눴을 때 보다 더욱 다급해진 김유손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 그··· 물을게 많긴 한데, 일단··· 저희가 그런 걸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까요?”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거대한 사건을 예측하다는 것은, 잘못하면 과대망상자 혹은 음모론자 의심을 받기 십상. 그것은 아무리 특성이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제 말은 물론이거니와, 김세진 길드장님의 말은 믿지 않겠지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대한민국 한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저희 말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카드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김세진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용병 라이칸.
“특수경찰국에게 라이칸의 인장이 찍힌 교서를 보내고, 기자회견을 열어야 합니다.”
“헌데, 믿는다고 해도 시민들의 혼란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현재 상황 또한 심각하니 정부와 조율도 해야할 테고...”
전시, 혹은 준전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생존본능은 사재기, 약탈 등등부정적인 사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일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생기를 잃은 김유손의 눈동자에는 갈급이 엿보였다.
이토록 다급했던 그는 처음이다. 김세진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김유손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세진은 핸드폰을 꺼내 조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길드장님. 조한성입니다.
요즈음 길드의 실세다 뭐다 해서 하루에도 몇 백 건에 달하는 청탁제의를 받는 조한성이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빳빳한 겸손을 유지해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니, 2개월 내에 라이칸의 중대발표가 있을 예정이니까 정부와 한번 이야기도 나눠보시고, 그에 맞은 준비를 해주세요.”
-···예?
많은 권력을 주무르면서 국회의원, 재벌가의 이름에도 눈 깜빡 하지 않게 된 조한성은, 그러나 이 이름의 무게만큼은 막중한 듯했다.
-그게···.
“더 이상 묻지 마요. 아······ 그리고 거기 있죠? MBS놈들. 만약 기자회견을 하게되면 거기는 빼세요.”
참고로 MBS는 김세진과 더 몬스터의 행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저열한 언론이다. 괜히 좀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다. 말로 하면 들어먹질 않는 놈들이니까.
-이미 사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를 하지 않으면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해놓았습니다.
“···역시 일 처리 좋네요.”
-감사합니다. 준비라면··· 일단 장소는 어디로 선정해 놓을까요?
기자회견에는 장소선정도 중요하다. 아무래도 길드부지나 몬스터 용병단의 중앙홀 보다는···
“새벽 기사단 쪽에 허락을 구할 수 있나요?”
요즘 유세정이 가는 말로 툭툭 내던지듯 말했었다. 요즘 새벽에 너무 소홀하고 칠흑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이 아니냐고.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을 표출했었겠지.
-네. 물론입니다. 오히려 환영하겠죠.
그러니 이번 기자회견을 새벽에서 함으로써 아직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국내에 공표할 수 있게 될 터.
“그럼 그렇게 갑시다.”
김세진이 결단을 내리고 전화를 끝내자, 김유손은 한결 덜은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