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제대로 된 시작(3) >
이른 오전임에도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하젤린은 인천국제공항으로 나와 김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프 아냐?”
“피부 하얀거 봐. 맞는 것 같은데?”
“한번 가서 물어볼까?”
어차피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왔으니 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로브때문에 선망 혹은 의심의 시선이 집중되어서 곤욕이다. 몇몇은 아예 대놓고 고개를 내려서 얼굴을 살펴보려고 할··· 아, 또 저런다.
하젤린은 저 몰상식한 사람의 멍청한 면상에 마법을 끼얹고 싶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아냈다.
‘···성격 많이 죽었네.’
예전 같았으면 사고부터 치고 봤겠지. 그녀는 어느정도 유해진 자신의 성격에 감탄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곧 도착합니다. 일찍가려고 했는데 웬 파파라치가 따라붙어서.
어디쯤 왔느냐고 전화를 하려고 보니 이미 김세진의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하젤린은 -천천히 와도 돼요. 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어 놓고서 웹서핑을 시작했다.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포털사이트의 기사들을 뒤적이던 그녀는 문득 궁금해져서 ‘김세진’을 쳐봤다.
-김세진.
188cm. 화제의 인물.
프로필 사진도 꽤나 멋들어지고, 검색하니 나오는 정보는 웬만한 중견급 연예인 뺨친다. 대로변을 걷는 그를 몰래 찍은 사진은 물론, 언젠가 만났던 일화, 그간 드러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드러난 선행까지··· 와. 무슨 고아원에 10억을 기부했대?
“하젤린 씨!”
그렇게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는 와중, 그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이게··· 파파라치 때문에.”
웬 선글라스를 쓴 키다리 남자가 저벅저벅 반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볍게 흰 와이셔츠와 청바지 하나만을 걸쳤을 뿐이지만 큰 키와 절묘한 비율로 인해 옷거리가 살고,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보이스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젤린은 연예인들이나 쓰는 선글라스 아래, 입가에 드리운 진한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았으나,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짐짓 불퉁스레 그를 노려보았다.
“괜찮아요. 고작 20분 기다렸는걸요.”
약속시간은 10시, 그러나 현재는 10시 20분. 김세진이 뒷목을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파파라치를 좀 어떻게 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김선호가 튀어나와 대신 사과했다.
“···괜찮다니까요? 어서 가기나 합시다.”
괜히 멋쩍게 뒤돌아선 하젤린은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마나석을 연료로 이용한 비행기는 고작 한 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한 시간이라고 해봤자 시차라는 변수가 있어, 캘리포니아 주는 한창퇴근시간인 오후 8시였지만.
[본능이 버틸 수 있는 시간 14:45:94]
체내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특성이었기에 시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Over there!
펑펑펑펑펑! 공항의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미친듯이 터지는 플래쉬와 수 많은 인파의 외침은 일행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야?”
“뭐, 뭐, 뭐 ,뭐···.”
허나 하젤린에 비하면 김세진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공항을 가득 메운 환영(?)인파에, 그녀는 연신 다리를 비틀거리다가 김세진의 등뒤로 꾸역꾸역 숨어들었다.
“김세진 씨! 어어어, 어떻게 좀 해봐요! 나나, 나 이런거 못 견딘단 말이야···!”
-세진 길드장님! 이 쪽을 한번만 봐달랍니다!
-이번 포션 수출 건에 대해, 스켄달 부통령이 이례적으로 한국 정부에 직접 감사와 기대를 표출했는데요, 그것에 관해······.
하젤린은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마냥 웩웩댔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자들은 연신 러쉬를 해왔다. 김세진은 쓰러지려는 하젤린을 붙잡아주며 김선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그와 부하용병들이 용감하게 나서 길을 트기 시작했다. 역시 기사출신은 일당 백이었고, 김세진과 하젤린은 이 이상의 문제 없이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한바탕 난리 끝에, 일행은 겨우겨우 로스앤젤레스의 시내에 위치한 고급호텔에 도착했다. ‘프로망스’라는 이름의 호텔은 최상층부터 그 아래층까지 모조리 예약되어 있었는데, 최상층은 플로어 전체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이쪽에서 최대 공급업체인 ‘로커맨드 포션’과 ‘트리트 포션’ 중 한 곳 이상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어야 해요.”
그리고 그 최상층에서 김세진과 하젤린은 회의를 하는 중.
“죄다 기업들이네요?
“그럼요. 한국과 미국이 같을 수는 없지요.”
미국의 연금계 사정은 한국과는 다소 달랐다.
땅덩어리가 좁은 한국은 소규모, 끽해봤자 중소규모의 알케미하우스가 포션의 공급을 맡았다면, 광활한 미국은 둘 혹은 셋 이상의 대기업이 주(state)의 포션 공급을 독점한다. 또한 그만큼 기업의 입김이 강해 연금술사의 익명성도 한국에 비해 엷은 편이라고.
즉, 여러모로 시장에는 친화적이지만 공급자-연금술사-에게는 불리한 조건.
“모두 조건은 좋아요. 유통비를 제외한 수익금의 85%를 주겠다고 하니까.”
그러나 김세진의 길드는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김세진 뿐만 아니라 요즘 미국에서도 연방정부의 주도로 연금술사를 배려해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물론 포션의 가뭄 때문이다.
요 근래 전세계적으로 큰 굴곡없는 평화가 계속된 탓에 몬스터 사냥이 안정화되어 포션의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줄었는데, 세계 방방곳곳에 별안간 몬스터 난리가 터져 포션 수요가 급증해버렸으니···
그 전부터 ‘고블린 연금술사’라는 천재로 말미암아 포션 공급이 활발했던, 오직 대한민국만이 전세계의 시류를 거스르는 특이한 국가였다 하겠다.
“···그럼 뭐··· 만나보고 결정합시다.”
일반 기업인이었다면 조건과 사람을 치밀하게 따져봐야 했겠지만, 다행히 김세진에게는 사람을 가리는 필살기가 하나 있었다. 물론 성공한 기업인들이 마냥 선할리는 없겠으나, 차악(遮惡)을 골라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큰 이점이 될 터.
“네. 그래요 그럼.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하젤린은 서류를 주섬주섬 모으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우측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고로 김세진의 특성 탓에 최상층은 김선호와 하젤린이 함께 쓰기로 하였는데, 그녀는 우측의 가장 노른자 땅을 먹었다.
“그럼 저희도 좀 쉽시다.”
김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김세진은 늑대화를 취했다.
그 급작스런 변화에도 김선호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
다음날. 김세진과 하젤린은 두 대기업을 차례로 만났다. 각 기업들은 현 포션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모두 저마다의 최선을 다했고, 서로의 경쟁사를 견제하는 아주 사소한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김세진에게 이득이 가는 계약이었다.
또한 두 기업간의 미팅이 모두 끝나자, 두 기업이 삽질을 하여 계약 자체가 무산이 될까 두려워 미국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까지 찾아와 혹시나 불편함이 없었느냐 물어왔다.
“한국 정부와는 이미 이야기를 끝마쳤습니다. 이 계약으로 인해, 한국과 저희의 파트너쉽은 더욱 공고해지겠지요.”
“···그래요?”
고작 포션계약이 국가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러웠으나, 몬스터 관리부의 차관은 아무래도 이 계약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계속해서 그쪽을 강조했다.
“예. 다른 어느 국가보다 저희 미합중국을 먼저 선택하신 것이시니, 아마 대통령께서도 곧 직접적인 언급을 해 주실 것입니다.”
“큼. 근데 한국어가 유창하시네요?”
허나 김세진은 이런 게 괜히 낯부끄러워 화제를 돌렸다. 실제로 말끔한 백인이 한국어를 이토록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은 꽤나 신비했으니.
“당연한 부분입니다. 현재 몬스터 난동 사태 탓에 몬스터관리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연금과 무기인데, 연금이든 무기든, 특히 연금 쪽에서는 한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손해인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요?”
이건 아마 김세진과 하젤린이 합작하여 만든 '연금술페이지와', 오래전부터 배포해왔던 ‘레시피’와 ‘약재논문’덕이다.
“예. 연금술페이지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온 정보들을 모두 타인의 해석과 번역에 의존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자처해서 뒤처지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고블린 연금술사는 그간 ‘더 몬스터’의 연금술사 전용 공간, 연금술페이지에 아직정보가 잘 밝혀지지 않은 약재에 대한 정확한 진실과, 하~중급 포션 중 일부-그 이상은 영업비밀-를 깔끔하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배포해왔다.
덕분에 인터넷을 사랑하는 연금술사들은 그들의 둥지를 ‘연금술 카페’라는 곳에서 더 몬스터의 연금술페이지로 이주했고, 이 페이지는 가십과 뒷담화가 주를 이뤘던 카페와는 달리 학술적인 토론으로 가득하여 수많은 연금술사들을 계몽하고 끌어모았다.
그래서 현재는 차관의 말처럼 해외 유수의 연금술사들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페이지를 이용하고,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이용을 위해 필사적으로 한국어를 배울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금술 학술포럼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상하게 카페에 악감정이 있는 하젤린은 나날이 성장하는 페이지와는 달리, 한순간에 패망한 카페를 볼때마다 므흣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면. 계약은 이미 채결하신 것이신가요?”
“아직 고민중에 있어요.”
하젤린이 대신 대답했다.
“근데 둘다 몇몇 하찮은 술수는 부리더라고요?”
“······.”
차관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김세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미국까지 온 이상 체결하긴 할 겁니다.”
“아하하하하. 다행이군요.”
그 즉시 다시금 화색이 도는 얼굴에 세진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혹시라도 그네들이 이상한 술수를 쓰려 하거든 언제든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자기 나라의 기업보다도 오히려 세진을 신경 써주는 진심이었기에,
“예. 언제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는 사양 않고 명함을 받았다.
그렇게 오후 9시까지 이어진 미팅이 끝나고-김세진과 하젤린, 그리고 김선호를 비롯한 용병들은 이제 최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만끽할 생각에 들뜬 채 돌아갔다.
*
AM00:00, 자정.
아닌 밤 중에 김세진이 눈을 떴다.
미진한 진동과 스산한 기운. 그러나 그 불확실 속에서도 몸은 먼저 불길한 위험을느낀 듯, 어느새 손에는 손톱이 길게 빠져나와 있었다.
이 위험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허나 늑대의 직감이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다말했다.
그는 제 방을 빛살처럼 뛰쳐나와 하젤린이 머무르고 있는 우측으로 달려갔다.
“···꺄아악!”
편히 자고있던 하젤린은 갑자기 문을 부술 듯 튀어나온 늑대의 형상에 세상이 떨어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무무무무, 무얼, 뭘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한 손으로는 이불을 양껏 끌어 모으고, 다른 한 손에는 마법을 응축시킨 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나가···꺅! 서, 선호 씨는 또 뭐하시는 거예요?!”
하젤린이 외치기도 전에, 뒤늦게 김선호까지 그녀의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궁- 하는 기이한 진동이 호텔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
그곳, 통유리로 이뤄진 벽면 너머, 소름끼치도록 거대한 동공 두 개가 시뻘건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형상에 온전한 것은 오직 두 개의 눈동자 뿐.
‘두억시니’였다.
“···씹!”
다음 행동은 빨랐다. 인간화를 취한 김세진은 재빨리 하젤린을 안고서 놈의 반대편으로 치달렸다.
“배리어 둘러요!”
그리곤 제 품에 꼭 안긴 하젤린에게 소리치며, 오른편에 보이는 통유리창을 일신으로 뚫어내고 수 백미터 아래로 낙하한다.
< 30. 제대로 된 시작(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