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겨울나기 (3) >
영상으로 보여지는 청룡의 면모는 그야말로 풍부했다. 동해에 둥지를 튼 물고기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뭇 사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새겨지게 만들었고, 혹시라도 괴수가 다시금 나타날까 바다의 아득한 수평선을 멀리 내다보던 수호신의 위엄은 감동적일 만큼 믿음직스러웠다.
또한 더욱 미려한 은색으로 변한 비늘은─호칭에 관한 문제는 좀 생기겠지만─ 여러 대중들에게 호기심과 탐구욕을 불러일으켰다.
"······아.“
그리고 이 곳은 최고급 호텔의 최상층.
로드에게서 권좌를 물려받을 유력한 후보, 여왕 바토리는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청룡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었다. 새로워진 청룡을 보고 있노라니, 빌어먹을 아랫것들의 만류 때문에 오랫동안 참아야만 했던 여러 충동적인 감정들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소유욕이었고, 호기심과 동시에 설렘이었으며, 도착적인 욕망이기도 했다.
-그릉, 그르릉~
자신이 수호하는 생명(물고기)들을 보며 환히 웃는 모습을 보라. 저 웃는 낯짝은 볼때마다 타락시키고 싶다. 지금보다 보다 더 저열하게, 난폭하게, 흉악하게. 오직 나에게만 굴복하고, 나 이외의 잡것들에게는 흉험한 이빨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단 말이다······
"바토리 님···“
동동동동-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을 구르고 있던 바토리에게, 사도가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왜.“
단 한 음절이었지만, 등골에 한기가 서늘하게 오를 정도로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사도는 감히 그녀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만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말했다시피··· 동해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여왕을 알현할 수 있는 최소의 신분에 속하는 '사도'들은 여태 바토리를 필사적으로 자제시켜왔다. 그녀는 하고 싶은 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스런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원대한 계획을 핑계로 그나마 막을 수 있었다.
"나도 안다마다. 로드님과 대화도 나눈 마당에, 내가 저런 거에 신경을 왜······"
-훙냐아아.
그렇게 말한 순간.
청룡이 하품과 동시에 기지개를 켜는 유니크한 장면이 나왔다. 바토리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거에 신경을 내가 왜 쓰겠니.“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한쪽 벽면에 영사되는 영상에 고정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다행이······."
"그렇게 가지고 싶으시다면, 겨울에 도모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름 모를 사도가 나섰다. 요 근래에 무력이 급상승하여, 바토리 근위대에이름을 올린 젊은 사도였다.
"네, 네이놈 무슨···“
"음, 무슨 말이니?“
간신히 그녀를 막고있던 늙은 사도가 질겁하며 속삭였으나, 방금 그가 꺼낸 말은 이미 바토리의 흥미를 잔뜩 돋구어 버린 듯하다
"바토리 님! 아니되옵니다! 지금은···"
"너는 입 닥치고, 어서 말해보렴."
바토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젊은 사도를 바라보았다.
"바토리님의 넓은 식견으로는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그래도 설명을 해드리자면, 우선 겨울은 춥고 먹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몬스터가 더욱 난폭해집니다. 당장 혹한기에는 바깥 외출도 자제하는 인간들인데, 바다까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의 눈은 줄어듭니다.“
그의 이름은 로스한델. 과거 김세진에게 사로잡혀 ‘탁기의 고리’에 얽매인 그는 김세진의 노예나 다름이 없었고, 김세진이 비밀스레 전달한 착실히 읊었다.
"그리고 또, 저는 예전부터 바토리님의 생각이 오히려 저희 계획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왔습니다. 다른 사도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저런 어마어마한 신수를 세뇌할 수 있다면 실로 엄청난 전력이 되는 건 당연한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만큼, 일정량의 손해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이도 어린 놈이··· 바토리 님, 믿어선 안됩니다. 겨울에는 보는 눈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지만, 세뇌가 가능하다는 보장은···!"
"저는 바토리 님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을 뿐입니다.“
로스한델은 최선을 다해 아부를 하였으나, 그를 보는 바토리의 얼굴에는 의심이 번져갔다.
여제로서 살아오면서, 그녀는 수많은 간신을 만나왔다. 그렇기에 너무 일방적인 금칠이 간신의 미덕이란 것은 아주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 적막감에 얼굴이 굳은 로스한델은 그녀가 더 의심을 하기 전에, 핸드폰의 액정을 허공에 투사했다.
"저는 여태 바토리 님을 위하여, '사방신 청룡 사이트'의 등급을 차근차근 쌓아왔습니다. 모임에도 참가하고, 엄청난 액수의 기부금도 냈지요. 그 결과 청룡의 활동반경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의 계정으로는 '사방신 청룡'의 VVIP급 정보 열람이 가능했다. 참고로 이 사이트는 등급 선정이 꽤나 까다로워, 몰래 가입한 바토리도 고작 GOLD등급에 불과하다.
"···으음.“
그러자 바토리의 표정이 살짝 풀린다. 그것을 빠르게 감지한 로스한델은 재빨리 가장 최근의 내용을 읊어주었다.
"성장기의 청룡은 잠이 많아짐에 따라, 다음 산책 시기는 아마 12월 25일 '밤'이 될 것 같다··· 고 합니다. 최적이지요. 겨울, 그리고 가족과 함께 지낼 크리스마스에바다로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거기까지. 로스한델은 말을 끝냈다.
허나 감히 고개를 들어올릴 깜냥은 없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시 당장이라도 자신의 피를 모조리 뽑아낼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너, 꺼져.“
로스한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그녀의 눈 앞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몸이 떨려서 그러지를 못했다.
이대로 죽는건가 싶었지만,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일갈은 그를 향한게 아닌 듯하였다.
"바토리 님! 저희에게는 청룡 따위보다 더 원대한 계획이······“
늙은 사도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니?“
로스한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늙은 사도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하는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네가 간신이 아닌 건 알아. 근데, 이 일에는 얘가 더 쓸모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어이, 아가야?“
"예, 예!“
바토리가 로스한델을 훑어보며 혀로 입술을 쓰윽 핥았다.
"앞으로 여기서 머물러.“
"그, 그렇다면···.“
"승진이네? 축하해. 물론 그 자리가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발바닥을 쭉 내밀었다. 창백하리만치 희고 고운 발에는, 새빨간 선혈이 패디큐어처럼 칠해져 있었다. 이건 바토리가 즐기는 충성과 굴복의 서약이다. 로스한델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가락을 핥았다.
* * *
겨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11월, 단원들이 모인 회의실에는 묘한 긴장감이맴돌았다.
─작전 날은 12월 25일. 성탄절입니다.
책상 위의 수정구에서 릴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네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바다로 나올 일도 없고······ 우리만 괴로우면 되죠 뭐. 일 년에 하루 있는 날인데."
이혜린이 짐짓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근데 아직도 안 믿겨지는게······ 단장님 진짜 청룡, 아니 레비아탄으로 변하는게 특성이에요?“
김세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린과 주지혁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오···?“
"안 됩니다.“
물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기가 싫다. 거의 장난감처럼 다뤄질 게 분명하니까.
그에 주지혁은 아쉽다는 듯 과자를 씹었고, 이혜린은 얼굴을 찡그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그때, 띠링-
문자가 왔다. 이혜린의 핸드폰이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하더니,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거 세정이 한테는 끝까지 말하면 안 되는 거 맞는거죠?“
"···방금 문자 세정이에요?“
"네. 저보고 길드장님이랑 같이 있냐고 묻는데요.“
”모른다고, 업무 중인 것 같다고 그러세요.”
김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겉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혜린은 오- 입을 벌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시게요? 예상외로 가정적이시네~?“
"···예상 외라니요.“
"아니. 지금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불륜이거든요.“
이혜린이 그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웬만한 돌베개 못지 않게 튼튼한 그 허벅지 위에는, 유백송이 쎄근쎄근- 잔잔한 코골이를 하며 편안히 잠든 채였다. 게다가 방금까지 세진의 오른손은 그녀의 귀와 머리를, 왼손은 꼬리를 쓰다듬고 있었지 아마.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지가 슬그머니 와서 기댄거예요. 내가 종용한 게 아니라.“
···살짝 유도하긴 했지만.
그는 변명아닌 변명을 하며 유백송의 귀를 톡 건드렸다. 촉각에 예민한 귀는 쫑긋! 솟았다가 다시 앙증맞게 가라앉는다. 이어서 꼬리를 한번 쥐어보니,
"갸르릉···“
웬 고양이 소리를 낸다.
이혜린도 애정어린 눈길로 그런 유백송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귀엽긴 한데···“
"게다가 인간 나이로 치면 15~16살이잖아요? 그냥 여동생 느낌이에요.“
"뭐, 그렇긴 하겠지만··· 저도 만져봐도 돼요?“
이혜린이 슬그머니 손을 뻗었으나, 탁! 세진의 손길은 냉담했다.
"하얀색에 때탑니다.“
"···뭐요? 제 손은 더럽다는 길드장의 횡포입니까? “
"아뇨, 익숙한 손길 아니면 깨서 그래요.“
으으응- 때마침 유백송이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잠꼬대를 피웠다. 김세진이 손을 바삐 움직여 코와 귀와 꼬리를 비롯한 여러 부분을 만질만질해주니, 다시금 깊은 잠에 빠진다.
"깰 뻔했잖아요.“
"······참 애기 잘 키우시겠네요. 세정이는 좋겠다.“
김세진이 유백송을 내려다보며 흐뭇하니 웃었다. 허나 유백송을 깨우지 않기 위한 김세진의 노력이 무색하게─
"아아아악!!“
결계를 뚫고 거대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 즉시 잠에서 깬 유백송은 세진의 허벅지를 벗어나 하늘 위로 솟구쳤고, 단원들은 모두 결계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하젤린 씨! 괜찮······.“
”됐다! 됐어!“
허나 들려오는 소리는 비명이 아니라 환호였다. 모든 단원들은 벙찐 채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고, 하젤린은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방금 제 목소리 세어나갔죠?!“
”예······ 아. 인공심장 성공하셨어요?“
”네. 완벽하게 다뤘는 걸요!“
하젤린이 꺅꺅 환호를 내지르며 성큼성큼 달려왔다. 그리고는 주지혁을 내팽개치고, 유백송과 이혜린을 지나, 가장 뒤에 서있던 김세진의 품에 폭 안긴다.
”완벽, 완벽 그 자체! 어떻게 해야할지 확실히 감 잡았어요!“
”······저, 하젤린씨?“
”···이건 진짜 누가 봐도 빼도 박도 못 할 불륜이네~“
이혜린이 의문스런 눈길로 둘을 쏘아보았다. 김세진은 슬그머니 하젤린을 떼어냈고, 그녀도 무안해하며 세 발자국 더 물러났다.
”큼, 아 미안해요. 너무 기뻐가지고······.“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회의실 내부에는 기묘한 적막이 가라앉았다.
”저기. 나 밥 줘.“
김세진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배고파하는 유백송만 제외하고는.
* * *
12월을 하루 앞둔 11월 30일.
김세진은 동해의 해변가에 서서 제 손에 들린 레비아탄의 비늘을 바라보았다. 이걸 섭취하면 레비아탄의 성장률이 급증하고, 본신의 위력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될 터였다.
허나 그런 만큼 걱정도 컸다. 급성장한 압도적인 강함에, 이번에야말로 '자아'가 휩쓸리는 것이 아닐까.
릴리아는 그럴 걱정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 자신감의 근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믿고 먹어야 한다. 한층 더 성장한 레비아탄의 몸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연습을 해둬야하니까.
”후······.“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기를 담아내는 심호흡, 김세진은 레비아탄 폼으로 변한 뒤, 비늘을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끄으으으···
온몸의 뼈마디가 수축하고 늘려지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수많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성체 레비아탄의 비늘을 섭취합니다!]
[성장률이 25%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한계 ‘1단계 성장’에 부딪힙니다!]
[성체 레비아탄의 비늘의 도움으로 한계를 이겨냅니다! 성장률이 25%에서 33%로 상승합니다! 레비아탄의 등에 자그마한 날개가 돋아납니다!]
[스킬 '레비아탄의 이해'와 '마나지체'가 한 단계 더 격상합니다!]
[해신(海神) 스킬이 해금됩니다!]
···
···
< 40. 겨울나기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