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기묘한 일 (2) >
순식간에 공각이 전이되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불편하고 불쾌했다. 전신이 우그러진 뒤에 다시 재조립되는 흉측한 느낌 뒤에, 김세진은 비틀거리며 눈을 떴다.
새까만 공간 속, 바토리가 바닥에 엎드려 피를 토하는 광경이 보였다.
문득 든 생각은 "이게 기회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허나 기공포는 체내와 체외의 마나까지 싸그리 끌어모아 뿜어내는 필살기. 아쉽게도 지금은 남은 마나가 별로 없다.
구웨에에엑!
바토리는 기괴한 소리를 내뿜으며 혈토했다. 허나 김세진은 저 행위가 자신의 죽은 피를 쏟아내고, 신선한 혈액을 체내에 공급하는 회복의 과정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레비아탄의 비늘을 섭취하면서 얻은 여러 가지 지식 중 하나일 것이었다.
왜 뱀파이어의 지식이 비늘 속에 들어있었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는 저 고통이 분노로 치환될 멀지 않은 미래가 두려웠다.
바토리는 가학을 즐긴다고 하니 필사적으로 뇌를 가동시켜야만 한다.
그러다 김세진의 머릿속에 돌연 '탁기의 고리'가 떠올랐다. 거듭 진화하여 여러 부가적인 기능들이 덧붙여져 무척 쓸모가 있어진 스킬이다.
그 부가적인 기능들 중, 김세진의 머릿속에 번뜩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탁기(濁氣)의 고리]
- 공포와 두려움을 비롯한 '감정' 뿐만 아니라, 고통과 쾌락 같은 '감각'에도 고리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감각'을 매개로 고리를 연결할 경우에는 느끼는 감각을 공유할 뿐, 그 이상의 기능은 발현되지 않습니다.
물론 바토리 같은 거물에게 공포나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굴복의 고리를 이을 순 없다. 허나 이 '감각'의 고리는 가능할 터. 게다가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탁기의 고리는─아무리 레비아탄이 강하다 하더라도─ 라이칸슬로프인 상태로 사용해야 효율이 높아지는 스킬. 그래도 그는 일단 레비아탄 폼을 유지한 채바토리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허튼 짓은 하지 마렴.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단다. 여긴 바다가 아니······ 우웨에에엑!"
서늘한 음성 뒤 게걸스러운 구역질, 김세진은 조심스레 늑대의 동공을 발현했다. 토악질을 하는 그녀의 등허리 위로 고통의 그림자가 보였다. 허나 레비아탄인 상태로는 그 기운을 끌어모아 자신과 결부시킬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한번만 성공하면 된다.
보통 가학적인 성향의 존재들은 피학에 적응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레비아탄의 몸이 슬그머니 축소되기 시작했다.
용의 얼굴은 인간의 머리통이 되고, 몸체는 축소되어 수족이 달린 형체로 바뀐다.웬만한 남자 머리통 5개는 얹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이 떡 벌어진 어깨와, 죽 뻗은 근육질의 팔. 그리고 그 모든 탄탄한 육체를 따뜻하고 견고하게 가리는 은빛의 털까지.
그는 라이칸슬로프가 되었다.
야수의 눈으로 보니, 그녀의 위에서 아른거리는 고리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만질 수 있는 것은 고통 뿐. 김세진은 손가락을 뻗어 고통의 고리를 끌어당겼다. 고리는 손가락 주위를 빙빙 돌았다. 김세진은 그것을 신중하게 관찰하다가, 순간. 콱! 움켜쥐고 아가리 속으로 삼켰다.
그때 바토리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하고, 동시에 여러 알림창이 떠올랐다.
[압도적인 존재와 고리가 연결됩니다!]
[조건 완료: 창천을 집어삼키다(1/2)]
[라이칸 슬로프의 전체적인 능력이 크게 강화합니다!]
[라이칸 슬로프의 고유스킬 '울프 센스'를 습득합니다!]
[앞으로 조건 하나를 완료하면 최종진화를 하게 됩니다.]
뼈와 근육이 우그러지며, 라이칸 슬로프의 몸체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불온한 인기척에 뒤돌아선 바토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악! 뭐야 이 징그러운 새끼는!“
그녀가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김세진은 두 팔을 들어서 가까스로 막아냈으나, 이건 전혀 상상치도 못한 충격이었다. 팔의 뼈가 먼지처럼 으스러졌고, 충격파는 체내를 강타하여 몇몇 장기를 폭발시켰다.
인간이었다면 그 즉시 사망했을 무지막지한 일격.
그러나, 이 고통은 그녀와도 공유된다. 객관적인 고통이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고통을, 그녀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그녀가 하이톤의 비명을 내지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꺄아아아악!“
바토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이제부터는 회복력과 인내력 싸움이다. 누가 더 빠르게 회복하여, 다음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가.
허나 김세진은 자신이 있었다. 본래 전설 속 라이칸슬로프의 생명력과 회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서, 무려 '불로불멸의 종족'이라고 까지 불려지기도 하였으니.헌데 거기에 더해, 지금은 몸 속에 스며들어 있는 회복포션은 무려 100여개가 넘는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든든하게 준비해왔는데, 역시 과유불급은 개소리다. 다다익선이 최고.
[Kobhack!]
어느새 몸을 회복한 그녀는 욕설 비스무리한 소리를 뇌까리며 김세진에게 손을 내뻗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구타와 쌍방적인 고통의 연쇄가 시작되었다.
* * *
회의실은 자못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모두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계획은 실패했다. 물론, 몰살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납치당한 인물은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다.
째깍- 째깍-
초침소리가 유별나게 들릴 만큼 짙은 적막은, 그러나 어디선가 울린 핸드폰의 알림으로 깨어졌다.
김선호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액정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세정 씹니다. 어떻게 할까요.“
동시 다발적으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모두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유백송이 근엄한 얼굴로 나섰다.
"세정이한테는 사실을 최대한 숨긴다.“
"······숨기고 나서는, 어떻게 할건데?“
하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탱탱 부어있었다.
"어차피 김세진이 레비아탄으로 있는 이상 목숨은 붙어있을 거 아니야. 구해오면되지.“
"우리들 만으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아니 그러니까······.“
뭔가 반박을 하려던 하젤린이었지만, 결국 감정의 북받침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낮은 흐느낌 소리가 회의장을 적셨다.
"······울지 마. 바보야. 청룡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이면 충분해. 한국인들은 청룡을 엄청 좋아하잖아. 뱀파이어가 청룡을 납치했다고 하면 모두 다 도와줄거야. 암. 그렇고 말고.“
유백송은 그렇게 말하며 하젤린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웬 중학생이 다 큰 성인을 위로하는 듯한 광경이었으나,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어때. 릴리아, 내 계획은?"
-모든 고위기사가 자발적으로 나서준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다 모여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현재 바깥에는 보스몬스터가 여전히 난리를 피우고 있다. 출현 빈도도 잦아져서, 요즈음은 거의 2주에 한번 꼴로 튀어나온다. 그 탓에 아직 대치중인 전선도 많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고위기사들을 모두 빼온다?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리는 격이다.
-게다가 바토리가 아직 호텔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어디에 똬리를 틀었는지도 모릅니다.
"······.“
다시금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적막 속에 흐르는 것이라곤 하젤린이 흘리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 뿐이었다.
* * *
어두컴컴한 내부.
이곳이 결계인지, 아니면 바토리가 머무는 호텔의 상층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둘 중 어느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방에 낭자한 선혈 때문에 한치 앞조차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으니까.
[Gaom croshack!]
어디선가 기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드러누운 바토리가 피에 젖은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친듯한 살기였다.
"한국어로 해. 못 알아들으니까.“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조건을 완료하면서 한층 더 강화된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고리의 주인인 내가 직접 끊어주는 것 뿐. 여기서 몇 대 더 처맞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용용이는······ 이 더러운 개새끼, 감히 나를 속여?“
"뭘 속였다는 거지?‘
바토리는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지친 거겠지.
"······상관 없어. 어차피 내 몸상태가 회복되면 너는 죽어.“
바토리가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풋. 내가 그렇게 놔둘까봐?“
나는 씨익 웃고선 그녀의 얼굴에 손톱을 쏘아냈다.
조건완료를 한 덕에 더욱 강대해진 손톱이다. 강도로 치면 지구최강의 금속 미스릴 이상, 그러니 적어도 쇠잔해진 바토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있을 터─촤악!
흉악한 손톱 네 줄기가 사선으로 그어진다.
"꺄아아악!“
그녀는 갑작스런 공격에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쳤다. 그러나 나는 그저 평온할 따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탁기의 고리는 다소 주인 편의적으로 적용되는 점이 있으니까.
비유하자면 니껀 내꺼, 내껀 내꺼. 이런 식이다.
그러니 바토리를 계속해서 괴롭혀야 한다. 이 여자가 생명력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나를 방류할 때 까지.
"개새끼야!“
바토리가 욕설을 뇌까리며 내 옆구리를 발로 찼다. 순간 갈비뼈가 분쇄되었으나, 그건 바토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으, 으아앙······.“
"서로 아픈 짓은 하지 말자고“
하지만 이쪽은 포션 덕분에 금방 나았고, 나는 바토리를 약올렸다. 그러자 그녀는눈을 번뜩이며 빽 소리질렀다.
"닥쳐!“
"흠. 말을 험하게 했으니, 나도 되갚아줘야지.“
이 순간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특별히 배워두었던 '라이트닝 체인 클로'를 사용한다. 순간 기다란 손톱에 보랏빛 전격이 맴돈다. 바토리는 그걸 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너, 넣어둬! 넣어두라고 했다! 이건 경고다! 경고······ 부으으으!"
무시하고 그녀의 전신을 긁었다. 전격의 통증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내 심장에 손을 쑤셔 넣었다.
재생 포션이 없었다면 아마 세 번 쯤 죽지 않았을까.
시야가 흐릿해지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렇게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바로 옆에 잠에 들락 말락 하는 바토리가 보였다.
"하아··· 하아···.“
나는 슬그머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에 손톱을 꽂아 넣었다.
"아이 씨···!“
눈을 뜬 그녀는 질린다는 얼굴로, 내 눈알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뒤지렴, 이 개새끼야!"
"너나 뒈져."
*
결국 나와 바토리는 휴전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놓아달라고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죽일 방법을 찾을 때 까지 데리고 있을 거라면서.
그렇게, 기묘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장소는 바토리가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텅 빈 결계였다. 그 속에서 둘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서로간의 유치한 도발을 빼고는.
"배고프구나? 멍청한 놈. 나는 완전한 뱀파이어라서, 식량섭취는 일 년에 한번이면 족하단다?"
"나는 네 팔 뜯어서 먹으면 되니까 상관 없어.“
"누가 뜯어먹혀 준다니?“
탁기의 고리 덕택에 바토리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만약 바토리가 나에게 즉사의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마저도 그녀에게로 전이될테니까. 허나, 혹시 모르니 그녀가정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피해를 입혀야만 한다.
"······후.“
바토리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손톱을 쭉 뻗어 그녀의 등허리를 할퀴었다. 기다란 상처가 깊게 패이고, 그녀는 다시 바닥에 드러누울 수 밖에 없었다.
"아윽, 이 미친놈이!“
"그냥 놔주는 게 좋을걸? 이러다 내 친구들이 오면 어쩌려고. 이 상태로 이길 수 있겠어?“
"닥쳐!“
바토리는 대답 대신 주먹으로 내 면상을 후려쳤다.
< 41. 기묘한 일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