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영웅, 오크, 인간 (3) >
"···예? 뭐요? 무슨 대회요?"
─일단 이름은 공로전입니다만, 콘테스트나 대회의 성격이 강합니다. 정부에서 저희에게 직접 요청을 해왔습니다. 심각한 시국에 국민들 위로도 해줄 겸이라면서요.
김세진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신다는 핑계로 잠시 부락지를 나왔다. 김유린이 곧 함정매설을 해야 한다고 삐대긴 했지만, 딱 한 시간만 달라고 하니 마지못해하며용인해주었다.
"아니 취지가 좋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뭐가 위로가 된답니까?“
그는 인적이 드문 숲에서 인간형을 취하자마자 가장 먼저 유세정과 해후를 풀었기에(장장 50분에 걸쳐), 지금의 통화상대는 업무 관련해서 일이 있다던 조한성이었다.
내용은 'THE MONSTER 공로전' 개최.
공로전(功勞展) 이라는 이름을 빌린 이 대회는 마법, 기사, 예술, 연금, 사회의 다섯 가지 분야 중─다섯 분야가 무리라면 '마법과 기사'의 두 카테고리만─ 사회에기여한 공로를 따져, 가장 순위가 높은 재원을 더 몬스터의 길드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핵심골자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합니다. 이 침체된 시기에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열정을 갖고 주목할 만한 콘테스트가 될 테니까요.
"아니 뭐 그렇게만 된다면야 좋지만, 국민들이 주목 할까요?“
물론 주목은 할 것이다. 일단 모든 과정이 전파를 타고 방영될 테니.
헌데 겨우 길드원 하나 뽑는데 침체된 국민을 일으켜 세우니 뭐니 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약간 오그라들기도 한다.
─예. 당연합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할겁니다. 그때, 이유진 단장님을 뽑을 때도 각자 유력후보끼리 팬덤이 형성돼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는걸요. 이번에는 후보까지 저희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거니까 더더욱 치열할겁니다.
"···그래요? 근데, 너무 성공해도 문제 아닌가요? 경각심이 너무 엷어지거나 하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시대가 우울하긴 하지만, 과도한 불안은 그보다 더욱 안좋습니다. 정부도경각심 문제 보다야 지금의 과다한 불안을 덜어내는 것이 더욱 낫다고 생각한 것 같더군요.
김세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대회를 연다고 불안이 덜어집니까?"
─만약 저희가 몇몇 후보를 길드원으로 선출하면, 더 몬스터에 입단할 만큼 탁월한 기사 혹은 마법사가 우리나라에는 충분히 많다······ 고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겠지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하. 흐음······ 그렇다면야 뭐. 예, 추진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김세진은 핸드폰을 영체화시켜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여기서 사족을 아주 살짝 덧붙이자면, 영체화한 핸드폰은 꽤나 특수한 능력을 술자에게 더해준다. 알림창을 읊어보자면 이렇다.
[스마트폰이 영체가 되어 스며듭니다. 육안을 렌즈로 사진 혹은 동영상을 찍을 수 있습니다.]
조금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지만, 이 이상의 의미는 없다.
***
"10분 늦으셨습니다.“
김유린의 툭 튀어나온 입술은 마치 자신을 쏘아붙이는 듯하다. 김세진은 괜히 뒷목을 긁적이며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늦을 수도 있는 거지.“
"흐음······ 알겠습니다, 어서 갑시다. 함정 만들러.“
다행히 별 다른 잔소리는 없었다. 김유린은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서 함정을 매설할 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손목을 붙잡았다. 별거 아닌 스킨십임에도 상대가 상대라 그런지 기분이 꽤나 묘하다.
"어이, 계획은 확실한가?“
그래서 괜히 한번 물어보았다. 겸사겸사 그녀의 손도 뗄 겸. 허나 그녀가 손목을 예상 외로 꽉 잡고 있어 뗄 수가 없었다.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패배보다는 승리 확률이 더욱 높습니다. 졸병은 졸병이, 대장은 대장이 상대함으로써 희생도 가장 적을 테고요."
김유린이 웃으며 말하는 '계획'의 내용이란 대략 이러하다.
우선 TM사의 탐지레이더가 포착한 바에 따르면, 현재 오우거 군단은 50~60기 정도가 10열 종대의 대형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머리통 세 개 오우거는 4마리 정도의 친위대-이쪽은 머리가 두개다-와 함께 대열의 중앙에서 위풍당당한 풍채를 뽐내고 있고.
허나 오우거는 지능이 낮은 존재. 그래서 김유린은 가장 기본적인 전법, '함정'과 '매복'을 이용하기로 했다.
일단 함정. 오크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함정을 파고, 일부 오우거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머리가 2개 이상만 되더라도 그나마 똑똑하여서 티나는 함정에는 걸려들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결국 오우거는 오우거인 법이다. 분명 몇 대 줘패면, 그게 정도 이상의 고통을 놈들에게 선사한다면, 분노에 의해 지능이 폭삭 낮아져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그것 말고 뭐 다른 할 일은 없나?"
"예. 오늘은 함정만 만들고 올겁니다.“
20분정도 걸어, 김유린과 오크 군대는 강물이 흐르는 부근에 도착했다.
함정 증축, 땅을 깊고 넓게 파고 그 안에 날붙이들을 세워넣는 일대공사는 금세 끝났다. 과연 학자들도 눈여겨 봤던 오크의 어마어마한 노동력이라 하겠다.
"됐습니다~!“
마지막, 수풀을 이용해 함정을 덮는 과정까지 금세 끝. 김유린이 호기롭게 외치며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그녀의 만면에는 뿌듯함과 행복이 깃들었지만, 그러나 김세진의 감회는 조금 달랐다. 딱 봐도 '여기 함정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비쥬얼인데······
"···허술하군."
"괜찮을겁니다. 오우거는 큰 몸체 때문에 자기 발 밑을 보지 못합니다.“
"흠······.“
김세진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함정을 둘러보자, 김유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그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괜찮을 거니 이제 돌아갑시다, 피곤합니다.“
그러더니 또 다시 손목을 잡고 김세진을 이끌어간다.
혹시라도 뿌리칠세라, 아주 꽉.
이거 보니 무의식이 아니라 다분히 의식적이구만.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아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일순 화르륵 붉어졌던 그녀의 얼굴은, 그러나 이내 고통으로 물든다.
"아악! 아, 왜, 왜 이러십니까! 아픕니다 아파요! 꺄아아악! 부서져, 부서져! 오크, 오크가 잡네!"
"오크가 사람 잡는건 당연하다."
"이, 이익!"
뒤이어 여러 오크와 콘락에게까지 구조를 요청하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 * *
함정공사를 마친 오크들은 녹초가 된 채 부락지로 돌아왔다.
그들은 식량창고에서 꺼낸 정체불명의 고기들을 구워먹고, 한바탕 싸움도 한 뒤에 각자의 잠자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크가 아닌 김유린은 마땅한 보금자리가 없다. 그녀는 그래서 적당히 고요한 동굴바닥에 콘락의 배를 깔고 베개삼아 누웠다. 아무리 기사라고 한들 차가운 침소일 것이었다.
"···흠."
급히 통화를 하기 위해 잠깐 밖으로 나온 김세진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곤, 어디선가 따스한 담요 한 장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허나 과연 기사의 감각은 허투르지 않은 것인지, 담요가 덮이자마자 그녀의 눈이 반쯤 뜨였다. 보석같은 두 눈동자에 당황한 영웅오크의 얼굴이 담긴다.
김유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한기가 느껴지던 참인데······ 고맙습니다.“
"······.“
은은한 미소와 게슴츠레 잠긴 눈동자. 일순 가슴이 철렁였지만, 오크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족장실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 했다. 근데 문득 눈에 띄었다.
콘락의 꼬리 아래에 놓인 가죽가방에서 대놓고 삐져나와 있는 오크 인형이.
상황을 모르는 유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악!"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하늘 높이 튀어오르더니, 급히 인형을 회수한다.
"제, 제, 제가 가져온 거 아닙니다. 오크중에 한 명이 만들어서 줬습니다.“
"······우리 오크가?“
"예. 예. 오크치고는 손재주가 좋더이다.“
"왠지 나를 닮은 것 같다만.“
김세진과 여타 오크의 생김새는 확연히 차이난다. 지능이 낮은 원숭이가 보더라도 '아, 쟤가 대장이구나', 혹은 적어도 '쟤는 뭔데 잘생겼지?' 라고 생각할 만큼.
과거 이혜린도 말했다시피, 일부 인간보다는 확연히 나은 생김새인 것이다.
"······전혀 아닌데요. 나, 나참. 도끼병이신가..“
그녀는 슬그머니 가방을 등 뒤로 숨겼다.
"그렇다면야."
그는 피식 웃고서 족장실 안으로 돌아갔다.
잘 둘러댔다고 생각한건지, 그의 등 뒤에서 김유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족장실로 돌아간 김세진이 자기가 통화라는 목적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는사실을 다시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온다.“
저 멀리, 굳이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거대한 실루엣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대충 가늠 잡아도 60기는 가벼이 넘긴다. 숫자가 60이지, 오우거는 중상급 이상 지대에서만 서식하는 고급 몬스터다.
혼자 방황하는 오우거도 어려운 상대인데, 저렇게 많은 숫자가 모인─비록 제대로 된 단합은 없더라도─ 광경은 김유린도 긴장케 만들기 충분했다.
"계획숙지 하셨습니까?“
"그래.“
대충 10열 종대로 다가오는 오우거들의 가장 중앙, 특히 몸집이 웅대한 오우거가하나 있다. 세 개의 머리통과 새까만 피부. 둘 중 하나를 가진 오우거도 보기 드문데둘 다, 가진 빌어먹을 탐욕쟁이.
이제 특정 위치에 다다르면, 950의 영웅오크들이 좌우에서 시산을 분산시켜 적어도 40 정도의 오우거가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다.
그만한 숫자가 빠져나가면, 이제는 콘락을 탄 김유린의 차례다. 그녀는 대장 오우거와 나머지 친위대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물함으로써, 놈들을 김세진과 오크들이 매복한 장소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 이후에는 서로 힘을 합쳐 가장 먼저 거슬리는 졸병 놈들부터 처리하고, 대장 하나만 남았을 때 김유린의 특성을 이용해 '1분 기절'을 먹인 뒤 다구리.
"기절, 자신있나?“
"예. 비록 소환된 레비아탄이지만 레비아탄도 5분간은 잠들게 하는 데 성공했었습니다. 비록 엄밀히 말하면 기절이 아니라 '수면'이었지만요.“
"흠.“
김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그 광경을 보았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제 저도 가보겠습니다. 족장님은 매복 장소로 가십시오.“
"잠깐."
김유린이 콘락의 고삐를 잡은 순간.
"가기 전에, 받아라."
김세진은 그녀에게 영웅오크의 문양이 새겨진 휘장을 건네주었다. 소유하기만 해도 활력을 증진시켜주는, 그래서 아티팩트 중에서 가장 값비싸다는 '패시브형 아티팩트'다 "네가 우리의 '동료'라는 증표다.“
"아..?"
김유린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안고서 가슴팍에 모았다.
"···감사합니다.“
부우우웅─
때마침 영웅오크 대전사가 나팔을 불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오크들의 움직임이 날래고 매서워졌다. 950의 병사는 각각 반절씩 좌우로 나뉘고, 나머지 50의 정예는 김유린이 오우거들을 유인해 올 험지로 조심스레 움직인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김유린은 방금의 감동에 눈가를 글썽이며, 콘락을 타고 전장으로 향했다.
* * *
오우거의 낮은 지능에 어떤 변수가 있겠냐만은, 전황은 김유린의 말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40기 정도의 오우거가 양익으로 빠져나가 함정에 걸려들었고, 대장 오우거는 김유린에게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온다. 준비해라.“
20보.
20보면 오우거 20여기가 이쪽으로 온다. 김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심호흡을 했다.
쿵쿵쿵쿵!
여러 발소리. 그 중에는 아마 투 헤드와 쓰리 헤드 오우거까지 섞여있을 터.
세진은 눈을 감고 시각을 제외한 다른 오감에 몸을 맡겼다. 어차피 몸체가 하도 거대한 오우거는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워질수록 눈은 방해만 될 뿐.
점점 다가오는 놈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메이스를 움켜쥔다. 영체화 되어있는 '고블린의 분노' 포션과 '역전의 전사'를 동시에 사용한다.
쿵, 쿵, 쿵. 감각이 확장될 수록 놈들의 발소리는 점차 느리게 느껴진다.
쿵, 쿵, 쿵······ 그렇게 발소리가 세 번 더 울렸을 때.
솟아오르는 활력과 치미는 분노를 담아, 자신의 앞을 스쳐갈 오우거의 거대한 발목에 풀 스윙을 날린다─!
콰아아아앙!
가공할만한 힘이 담긴 폭압적인 강타가 투 헤드 오우거의 발목을 그대로 소멸시켰다. 한쪽 발목을 잃은 놈이 노면으로 낙하하고, 그 위로 오크들이 달라붙는다.
그러나 김세진의 눈은 여전히 감겨있다. 영웅오크는 붉게 타오르며, 또 다른 압제의 희생양을 찾아 메이스를 휘둘렀다.
쾅!
거대한 진동에 온 산이 부르르 떨었다.
< 43. 영웅, 오크, 인간 (3) > 끝
ⓒ 지갑송